컴퓨터를 갖기 위한 나의 노력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가 왜 학업에 도움이 되는지'를 주제로 강연부터 준비했다. 설득의 대상은 어머니였다. 뚫리지 않는 방패 같던 어머니의 고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금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 급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적응해야 되요. 어머니,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이 아들은 영영 패미컴만 갖고 놀지도 몰라요. 어머니, 그건 쿨하지 않아요.

치열한 줄다리기를 약 3개월간 지속했고, 결국 나는 승리했다. 방과 후 떡꼬치를 사 들고 집에 갔는데 내 책상 위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그리고 그토록 바랐던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자파 방지 패널까지 달린 CRT 모니터, 비닐 덮개를 다소곳이 덮은 순백의 키보드, 그 옆에는 무슨 프로그램이든 몽땅 다 돌려버릴 것처럼 위풍당당한 본체가 있었다. 당시 기분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컴퓨터 처음 샀을 때 느끼는 그 감정, 지금 이 기사를 보는 유저들도 한 번씩은 겪어봤을 테니까.



컴퓨터가 책상 한쪽을 차지하면서 내 인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패미컴은 거실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장시간 갖고 노는 게 불가능했지만, 컴퓨터는 치외법권에 속했다. 내 방에 놨으니까. 어머니가 과일 갖고 들어오시기 전까지 방 안에는 나와 컴퓨터뿐이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친구랑 같이 게임하는 시간은 조금씩 줄었지만, 대신 컴퓨터에는 패미컴 이상의 다채로움이 있었다. 혼자 해도 재미있는 게임들이 너무 많았다. 아마 그때 가장 많이, 다양하게 즐겼던 것 같다.

당시 플레이했던 게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이라면 주저 없이 '재즈 잭래빗2(Jazz Jackrabbit2)'를 꼽겠다. 컴퓨터 설치기사 아저씨가 깔아놓고 간 게임. 당시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컴맹이었던 나는 그게 정품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 했다. 지금이야 양심의 가책부터 느끼겠으나, 그때는 녀석의 재미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헉헉대면서 하는 수밖에.

[▲ 재즈 잭래빗2 오프닝 영상]


'재즈 잭래빗' 시리즈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게임 개발사 '에픽 게임즈'의 작품이다. 정확히는 1999년 에픽 게임즈로 개명하기 전, '에픽 메가 게임즈(Epic Mega games)'였던 시절 내놓은 게임이다. 빡세게 생긴 남정네들이 총알로 대화하는 게임, 혹은 언리얼 엔진으로 유명한 그 개발사가 맞다.

에픽 게임즈가 초창기에 출시한 '재즈 잭래빗'은 '기어스 오브 워' 시리즈의 아버지로 알려진 '클리프 블레진스키(Cliff Bleszinski)'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제작한 게임이다. 그의 작품답게, 전형적인 캐주얼 플랫포머 액션 구도를 따르면서도 군데군데 하드코어한 요소가 녹아 있었다. 이 부분은 게임 내 요소를 살펴보면서 이야기하겠다.

고전 기획 한 자리에 1편이 아닌 작품을 앉힌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재즈 잭래빗2'는 전작과 다르게 처음부터 CD에 담겨 출시되었으며, 이는 국내 유저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후속작으로 넘어오면서 일취월장한 게임 디자인도 2편을 꼽은 이유 중 하나다. '재즈 잭래빗1'은 1994년에 PC로 출시되었는데, 당시 가장 핫한 플랫포머 액션 게임은 메가드라이브로 등장한 '소닉' 시리즈였다. 1992년 출시된 '소닉 더 헤지혹2'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감을 무기로 '마리오'와 '록맨'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고, 플랫포머 장르가 다음 세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재즈 잭래빗1'은 이러한 시대적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었다. 전체적인 맵 디자인부터 시작해 특유의 속도감까지 소닉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시리즈를 상징하는 녹색 토끼 '재즈'는 소닉과 달랐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총을 쐈다. 경쾌한 슈팅과 짜릿한 속도감이 어우러진 '재즈 잭래빗1'은 팬층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만의 색을 보여준 게임은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재즈 잭래빗' 풍 플랫포머 액션은 2편으로 들어서며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1998년 출시된 '재즈 잭래빗2'는 CD의 용량을 십분 활용한 고해상도 그래픽을 선보였고, 특히 조작감은 전작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선됐다. '슈퍼 마리오', '록맨'과 7년간 동고동락, 가끔 친구 집에 가서 '소닉'까지 즐기며 나름 플랫포머 액션 게임에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재즈 잭래빗2'의 조작감은 달랐다.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구현할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재즈 잭래빗2'는 슈퍼 마리오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대쉬 버튼을 채용했지만, 실제로 체감되는 느낌은 꽤 달랐다. 약간 미끌거리는 듯 하면서도 이해 가능한 범위의 속도감이었다. 록맨의 슈팅에 마리오의 조작, 그리고 소닉의 스피드가 결합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세 작품의 요소가 절묘하게 섞인 '재즈 잭래빗2'의 조작감은 이후 등장한 플랫포머 액션 게임과도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다.



2006년에 출시된 '기어스 오브 워'의 메가톤급 성공은 클리프 블레진스키가 일약 세계적인 스타 개발자로 떠오르는 촉매가 됐다. 주인공 '마커스 피닉스'는 게임사를 통틀어 가장 마초적인 주인공 중 하나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과묵하지만 가끔 퉁명스레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카리스마가 가득했다. 개인적으로는 '총알을 가장 차지게 꽂아넣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캐릭터 성은 개발자 블레진스키의 성격에 기인한다. 그도 마커스 같았다. 일말의 필터링도 없이 쏟아지는 거친 어휘, 남성미 뚝뚝 흐르는 쇼맨십은 5분만 외신을 뒤져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재즈 잭래빗2' 역시 그의 호르몬이 섞였다. 외형만 놓고 보면 과도하게 활발한 토끼 둘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난한 플랫포머 액션 게임의 정석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연출 속에는 블레진스키만의 색채가 녹아들어 있었다. 특히 데드씬이 그렇다.

▲ 클리프 블레진스키(좌)의 호르몬이 담겨진 '기어스 오브 워'(우측 위)와 '재즈 잭래빗2'(우측 아래)


사망 시 재즈는 뇌가 터지고, 그의 동생 스패즈는 신발만 남은 채 온몸이 폭사 된다. 마리오나 소닉이 만세를 부르며 화면 밖으로 날아가는 순수함과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 록맨도 몇 대 맞다 보면 원형 모양으로 폭파되기는 하나, '재즈 잭래빗2'의 데드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주인공 캐릭터뿐만이 아닌, 일반 적들이나 스테이지 보스 역시 각각 개성 있는 데드씬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데드씬들이 섬뜩하다기보다는 게임을 유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펑키한 분위기는 게임 내 폭력 요소를 감각 있게 억제했다. 미화시키는 개념이 아니다. 보여줄 건 다 보여 주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잔혹하다고 느끼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 유비소프트의 대표적인 플랫포머 액션 게임 '레이맨'과 비슷한 개념이다.

한편 매력적인 사운드 트랙도 '재즈 잭래빗2' 특유의 유쾌함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게임의 흥을 돋우는 요소를 넘어, 별도로 음원을 뽑아들어도 훌륭한 음악들이 참 많았다. 게임 제목과는 다르게 흥겨운 신시사이저 음악이 플레이어를 반겨주는데, 전체적으로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했다. '재즈 잭래빗' 시리즈의 음악을 담당한 '알렉산더 브랜든(Alexander Brandon)'은 이후 '언리얼' 시리즈의 음악도 담당,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재즈 잭래빗2'의 여러 스테이지 BGM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중세 성'을 배경으로 한 'Medieval Jam'이다. 웅장하면서도 대중적인 멜로디 위에 특유의 쿵작거리는 느낌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무게감을 놓치지 않은 게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재즈 잭래빗2'의 모든 스테이지 음악 중 배경 느낌과 가장 잘 어울린다.

[▲ 재즈 잭래빗2 사운드 트랙 - Medieval Jam]


특색있는 그래픽과 사운드, 깔끔한 조작감을 갖춘 '재즈 잭래빗2'는 당시 내 기준으로 가장 재미있는 플랫포머 게임이었다. 패미컴에서 '록맨', '마리오'만 즐기다가 CD 기반의 고용량 게임을 만나면서 발생한 일종의 컬쳐 쇼크였다. 그만큼 내겐 의미 있는 게임이고, 지금도 생각이 날 때마다 가끔 즐기곤 한다. 그래도 꾸준히 재미있었다.

다만 냉정하게 본 '재즈 잭래빗2'는 아쉬운 점도 꽤 많은 작품이다. 플랫포머 액션은 장르 특성상 '고전적'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이는 '슈퍼 마리오'이후 등장한 게임 중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 장르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작품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소닉'은 속도감으로, '록맨'은 장비 교체와 슈팅으로, '레이맨'은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대조되는 더러운 난이도로 플랫포머 액션 장르의 한 축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외 작품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즉, 단계를 넘어선 발전을 보여주는 작품이 드물었는데 아쉽게도 '재즈 잭래빗2'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난이도로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만든 점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게임플레이 자체는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낡은 편이었다. 슈팅과 속도감을 한데 버무린 것은 좋지만, 그게 새로운 요소는 아니었다.

무기 밸런스도 단점 중 하나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종류가 꽤 많았지만, 대부분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냥 탄약이 무제한으로 지급되는 기본 무기가 제일 좋았다. 나머지 무기는 특정 벽을 깨부수는 데 쓰는 열쇠였을 뿐. 똑같이 다양한 무기 체계를 선보인 '록맨'이 아이템을 필요로 하는 공략 포인트를 적절히 배치한 데다, 이에 맞춰 보스 클리어 동선까지 디자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 왜 메인 이미지 등에서 저 총을 놓지 않는지는 게임을 하면 알게 된다.


명작의 조건은 여러 가지다. 개인적으로는 '기본기가 탄탄하면서 그 위에 혁신적인 요소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닌텐도는 '슈퍼마리오 갤럭시'를 통해 현역 게임들을 아득히 넘어서는 혁신을 보여줬다. 처음 등장할 당시의 '록맨'과 '소닉'도 명작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재즈 잭래빗2'는 탄탄한 기본기를 보여줬으나, 게임업계 역사에 남을 명작이 되지는 못했다. 재미있는 게임인 건 사실이지만, 게이머의 뇌를 강타하는 요소가 적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명작이 아님에도 고전 기획 한 페이지에 '재즈 잭래빗2'를 넣으려는 의도가 궁금할 수 있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게임을 즐기던 시절이 게이머로서 가장 즐거웠으니까. 도장 찍듯 나오는 게임들이 아닌, 정말로 개발자의 철학이 녹아든 작품이 많았다. 비록 게임플레이 면에서 특징이 없었던 '재즈 잭래빗2'도 블레진스키 특유의 '쿨함'은 오롯이 담아냈다. 세계적인 게임 개발자의 초기작이라는 것도 또 다른 이유겠다.

원래 추억은 보정되기 마련이다. 그걸 걷어내고 즐겼음에도 '재즈 잭래빗2'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철학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고마워서 여기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