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이제 더는 '미래산업'이라 보기 어려워졌다. 산업이 쇠퇴했다거나, 흐름이 끊겼다는 말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VR이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이제는 현실. 즉 현재 진행형이라 보아도 무방할 테다. 상용화 장비의 등장이 머지않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현재 VR 시장의 흐름을 만드는 기업이 있다면, 일단 '오큘러스'를 꼽을 수 있다. 개발자용 초기 모델이었던 DK1 공개 이후, 오큘러스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델을 공개해 왔고,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 이름을 알려 왔다. 작금에 이르러 '오큘러스'는 어떤 경우에는 VR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VR이 곧 '오큘러스'인 것은 아니다. 오큘러스만큼 오랜 기간 VR을 개발해 왔고, 몇몇 행사에서 시연 과정을 거치며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과시한 장비. 바로 '소니'의 '프로젝트 모피어스(이하 모피어스)'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오큘러스의 외관과는 달리, 현대적인 디자인을 갖춘 '모피어스'는 오큘러스의 강력한 맞수로 불리고 있다. 다양한 VR 장비들이 런칭을 앞둔 지금에서도, 사실 VR 장비의 양대 산맥을 꼽자면 '모피어스'가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스컴 2015를 앞두고 쾰른에서 열린 'GDC 유럽'에서, '소니 런던 스튜디오'의 수석 디자이너인 '존 포스터(John Foster)'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강연의 제목은 'VR을 더욱 믿을 수 있게 하는 방법'. 신뢰를 뜻하는 믿음이 아닌, 더욱 현실적으로, 몰입될 수 있게 하는 비결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간 소니는 몇 번의 시연을 진행해왔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모피어스'를 풀어나간 경우는 드물었다. VR이 갖는 최고의 가치이자 장점인 '몰입감'. 소니는 모피어스를 다루면서 어떻게 이 '몰입감'을 살리려 했을까?

▲ 소니 런던 스튜디오 수석 개발자 '존 포스터(John Foster)'


■ UI를 최소화할수록, 몰입도는 높아진다.

첫 번째 화두는 'UI(User Interface)'였다. 사실상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UI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유인즉, 사용자가 게임 내 상황을 단순히 모니터를 통해 투사되는 영상 정보만으로는 모두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다채널 음향 시스템이나 고해상도 모니터, 그리고 파노라마에 가까운 시야각을 가진 모니터 등, 더 많은 정보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3차원인 게임 속 세계를 평면에 표현하려다 보니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 'VR'이라는 장치하에서, 이 법칙은 뒤집어진다. VR의 목표부터가 3차원의 공간을 온전히 시각화하고, 직접 느낄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에 있다. 이 말인즉, 마우스나 키보드를 이용해 시야를 전환하지 않는다 해도, 자연스럽게 사용자가 움직임으로서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UI' 게임 내 정보 표시에 도움을 줄지언정, '몰입도'는 도리어 해치는 요소가 되고 만다.

'VR'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이며, 이는 곧 미니맵, 퀘스트 로그 등 그래픽과 텍스트의 나열로 이뤄진 그 어떠한 부가적 정보와도 무관하다. 도리어 게임 내 세계를 제외한 이런 정보들은 VR 특유의 곡면형 렌즈, 그리고 초점에서 벗어난 사물에 흔히 빚어지는 그래픽 균열 현상 때문에 사용자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몇 년 전 출시되었던 '데드스페이스'의 'RIG'는 보통 화면 왼쪽 아래에 표시되곤 하던 체력 게이지를 캐릭터의 척추 부분에 표시함으로써, UI를 줄이고 몰입도를 살린 좋은 사례로 평가받았다. 이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실제 개발 중인 VR FPS인 '월드 워 툰즈'의 경우 게임 내 UI를 극단적으로 압축하고, 최소한의 요소들은 화면 정 중앙을 기준으로 배치했다. 쓸데없는 정보들이 몰입감을 해친다는 이론에서 도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면 UI가 최소화될수록 사용자의 시야는 평소 그들이 바라보는 현실과 비슷해지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느낌보다, 그 세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기분을 더욱 북돋아 준다.

▲ VR로 옮긴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실제로 UI를 알아보는건 굉장히 힘들다


■ '몰입'의 흐름은 끊기지 말아야 한다.

존 포스터가 말한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연속성'이다. VR이 처음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이에 관심을 두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굉장히 복잡한 성격을 지닌 실험 프로젝트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존 포스터는, VR 환경에서 '복잡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VR'게임에서 일반적으로 추구해야 할 최선의 목표는 '연속성'이라고 말했다. 플레이의 흐름을 끊지 않고, 지속적으로 게임 내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정 수준의 퍼즐이나 수수께끼는 사용자가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 수준이 선을 넘어, 복잡한 정도가 된다면 도리어 짜증을 불러오며 몰입을 해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 내 콘텐츠에 국한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의 메뉴 시스템, 성장 시스템 등, 게임 자체의 바탕을 이루는 다양한 시스템들 또한 지나치게 복잡할 경우 게임의 흐름을 끊는 주범이 된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한번 게임을 시작하면, 끊이지 않고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 극단적 예이지만, '복잡함'은 VR과는 전혀 맞지 않다.


■ 플레이어는 숙련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통상적인 사람이다. 이 말은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직업의 특성이 게임에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특수부대원 출신의 게이머가 '카운터스트라이크'를 플레이한다고 치면, 다른 이들과 다른 전략적 움직임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곧 실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렇듯 플레이어 개개인은, 게임 내 세계관에 걸맞은 전문가가 아니다. FPS를 즐기는 수많은 게이머 중, 실제로 총을 장전하고 격발해 본 이는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 내에서, 그들은 그 세계관에 녹아들고 싶어하며, 동시에 전문가가 되고 싶어한다.

문제는 그 느낌을 살리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권총을 다루는 FPS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치면, 게이머의 머릿속엔 '007'이나 '히트맨'이 연상되기 마련이다. 적어도 게임 내에서, 게이머는 불패의 승부사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게임 본연의 재미와 '간접 경험'이라는 가치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서부극의 주인공이 되어 멋들어지게 보여주는 리볼버 롤링과 재장전은, 게임 내에서 그냥 R 키 한번 누르면 된다. 남들도 다 똑같다. 그냥 R 키 한방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마당에,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존 포스터'는 게임 디자인을 통해 이런 부분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개선의 방법은 'VR'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입력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여준 데모에서, 플레이어는 한 손으로 권총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탄창을 쥔 채 재장전을 시도한다. 탄창을 꽂는 각도가 과도하게 어긋나면 재장전은 실패하지만, 각도가 어느 정도 맞았다면 위치에 관계없이 장전은 성공한다.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UI도 포함하지 않으며, 플레이어 본인에게 직접적인 조작을 요구해 몰입도를 높였다.

▲ 오른손과 왼손을 이용하는 장전


■ 사용자가 원하는 바를 구현하라.

존 포스터의 이야기는 다양한 사례들로 나열되었지만, 결국 그 종점은 같았다. 최대한 '현실과 같은 경험을 줄 것'. 그동안 PC 및 콘솔, 온라인 게임에 팽배해 있던 '타협'은 VR에서 통하지 않는다. '게임이니까 괜찮지.'라는 짧은 명제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편의성 요소들은 VR에서 몰입을 해치는 요소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애초에 그 모든 편의 요소들은 제한된 시각이라는 모니터의 한계 때문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VR 시장은 인제야 발길질을 시작한 태아와 같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까지의 게임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요소들을 정면에서 뒤엎고, 부정하며,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제 몫을 해내게 될 것이다. 존 포스터의 강연은 한 시간을 가득 채우며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막을 내리며, 그는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말했다. "유저가 진짜 원하는, 현실 같은 플레이를 그대로 할 수 있게끔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VR 게임의 가치를 나타낼 지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