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한 편, 무려 반세기(매우 관대하게 생각할 때)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게임사(史)의 주요 이슈를 정리하는 '게임이슈 콕'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주는 조금 다르다. 그간 '게임이슈 콕'은 일련의 '사건'이나 '풍조'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와레즈'의 등장으로 인한 패키지 게임의 몰락, 잔혹하게 말아먹은 '게임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 등등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인공이 될 사람들이 법적 투쟁을 걸어올까 봐 조금 무섭긴 하지만, 키보드 앞에만 있으면 난 용기가 샘솟으니 괜찮다.

오늘의 주제, 바로 '먹튀'에 대한 이야기다. 투자는 했지만, 투자 대비 효과를 내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진 게임계 거물들에 대한 이야기. 수천억 원에 이르는 돈을 날름 먹고 사라져버린 게임업계의 닌자들을 만나볼 시간이다. 하지만 벌써 '아니 그런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그들에게도 뒷이야기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 표면에 드러난 현상을 보고 섣불리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지식인들이라면 다들 알지 않던가.

'스즈키 유'나 '사카구치 히로노부'도 물망에 올랐지만, 세 명으로 좁히는 단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에 많으니 찾아보길 바란다.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이 될 세 사람. 한국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게임 프로듀서이자, 지옥문을 열어두고 홀연히 사라진 게임 프로듀서 '빌 로퍼', 그리고 '타뷸라 라사'라는 희대의 괴작을 남겨둔 채 우주로 날아간 '리처드 게리엇', 마지막으로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불렸지만, '다이카타나'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며 흑역사를 뿌리고 다닌 '존 로메로'까지다.

▲ '먹튀'로 불리는 대표 3인



■ 빌 로퍼(Bill Roper) : 잘 나가던 개발자에서 '헬게이트' 오프너가 되기까지

▲ 빌 로퍼(Bill Roper)

'빌 로퍼'는 본래 게임 개발을 전공으로 삼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전공은 음악이며, 특기는 색소폰. 음악가로 살아가던 그는 블리자드의 '블랙쏜'이라는 게임의 음악 제작 의뢰를 맡기 위해 임시직으로 고용되었고, 블랙쏜이 성공한 이후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지금 블리자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무명의 뮤지션을 게임 BGM 담당자로 뽑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 당시의 블리자드 또한 그렇게 대단한 회사는 아니었다. 1994년의 블리자드는 총 직원 수 2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개발사였고, 빌 로퍼는 그 17번째 멤버였다.

이후 블리자드는 급격히 성장했다. '워크래프트'와 '디아블로'라는 두 IP를 연달아 성공시킨 블리자드의 주가는 쭉쭉 올라갔고, 성공한 작품들의 스태프 롤엔 어김없이 '빌 로퍼'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3'까지 줄줄이 대박을 낸 블리자드는 '콘도르'를 완전히 인수하면서 '블리자드 노스'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빌 로퍼를 부사장으로 앉힌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빌 로퍼는 국내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몇 안되는 스타 해외 개발자가 되었다. 90년대 말부터 세기말-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 게임을 좀 즐겼다 하는 게이머들이라면 '빌 로퍼'라는 이름을 다들 들어보았을 거다.

▲ 당시 게임 좀 했다 하면 '빌 로퍼'라는 이름은 다들 알고 있었다

사건은 2003년에 일어났다. 블리자드는 97년, 비벤디 유니버설에 합병되어 안정적인 개발 환경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비벤디가 2003년경 경영난을 맞게 되면서 블리자드의 개발 환경 자체가 위태로워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 여기서 빌 로퍼는 당시 퍼지던 비벤디의 게임 사업 매각설에 대응해 협상을 요구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강경한 의지를 밝혔으나 웬걸…. 비벤디는 빌 로퍼의 퇴사 의사를 접수했고, 빌 로퍼는 블리자드 노스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빌 로퍼'가 가지는 영향력은 굉장했고, 그의 사퇴 소식은 CNN에 뉴스 특보로 올라갈 정도였다. '비벤디가 게임업계의 보석을 잃었다'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영향력이 진짜 그의 능력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활발한 그의 대외 활동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만큼 빌 로퍼의 퇴사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데이비드 브레빅', '맥스 쉐퍼'등 빌 로퍼와 함께해온 이들까지 함께 블리자드 노스를 떠나게 되었고, 이들은 새로운 개발사인 '플래그쉽 스튜디오'를 설립한다.

그렇게 그의 안습 전설, 지옥문과 함께 열리는 눈물의 곡절이 시작된다.

플래그쉽 스튜디오는 RPG와 슈터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게임을 제작하기로 하고 이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낸다. '헬게이트: 런던'이라는 이름의 이 처녀작은 '빌 로퍼'의 이름값에 대응하듯 엄청난 양의 자금 투자를 받게 되는데, 그 투자사 중 가장 유명한 회사가 '한빛소프트'다. 당시 한빛소프트는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라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의 유통권을 틀어잡고 있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빌 로퍼'가 독립 스튜디오를 세워 게임을 제작한다는 소식은 또 다른 대박의 향기를 풍기기에 충분했을 터다. 비록 냄새만이었지만.

▲ 당시 국내 분위기 또한 '대박이다...'였다.

2007년 7월 10일, 4년간의 제작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헬게이트: 런던'은 전혀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RPG와 슈터를 합친 것은 그래 좋다. 그런데 출시 시기부터 이상한 과금제를 도입해 일반 유저들은 온라인 플레이만 가능하고, 한정판을 구매한 이들에게만 싱글 플레이를 플레이 가능하게 하는(북미는 애초에 패키지 발매라 싱글 플레이가 기본적으로 가능했다.) 엄청난 패기를 보여주었고, 게임 자체의 퀄리티 또한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어찌 됐건 '핵&슬래시'게임이기 때문에 다회차 플레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콘텐츠 소모 속도가 너무 빨라 유저들의 니즈를 쫓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버그가 산재했으며, 있는 콘텐츠마저도 기존의 콘텐츠들을 재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헬게이트 런던'은 1년여간의 짧은 항해 끝에 북미- 유럽 서비스가 중단되었고, 그보다 더 전인 2008년 7월, '플래그쉽 스튜디오'는 4년의 개발 기간과 1년의 서비스 기간이라는 흔적만 남겨 둔 채 파산해버리고 말았다. 국내에서 '헬게이트'가 진짜 지옥문을 뜻하는 관용어구가 되어버린 것은 보너스.

그와 동시에 빌 로퍼는 잠적해버리고 말았다. 사후 처리하는 모습이라도 제대로 보여줬다면 실망은 했을지언정 이미지는 굳혔을 텐데, 그는 그대로 자취를 감춤으로써 '먹튀'의 칭호를 부여받고 말았다.

▲ 그의 심경을 한장으로 표현해주는 합성 이미지

이 엄청난 흑역사 덕분에 그는 복귀할 수 없을 정도의 대위기를 맞게 된다. 투자사들이 어떻게든 손해를 충당하기 위해 달려들었기에 재산도 꽤 털렸을 테고.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게임업계에 복귀하게 되었고, '시티 오브 히어로즈'로 유명한 '크립틱 스튜디오'에 영입되었다. 하지만 크립틱 스튜디오의 차기작이었던 '챔피언스 온라인'이 제대로 망해버려서(...) 그는 다시 야인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디즈니 인터렉티브 미디어 그룹의 '마블' 코믹스 프랜차이즈 담당 부사장으로 겨우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자면 그도 불쌍하기 그지없다. 스타 개발자로 연예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자진 사퇴, 새로운 도전에 나섰지만 실패했을 뿐이다. 성공만 있는 인생이 더 드문 삶의 곡절에서 한 번쯤 미끄러질 수도 있는 거다. 그냥 엄청 크게 미끄러졌고, 그 수습 과정이 딱히 매끄럽지 않았다 뿐이지...

▲ 헬게이트 이후 개발에 참여했던 크립틱의 '챔피언즈'는 모두에게 잊혔다

실패 이후 더 높은 비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빌 로퍼가 이대로 묻혀 사라질지, 혹은 또 한 번 게임업계를 강타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잘 풀렸으면 하는 바람도 없잖아 있다. 헬 게이트를 다시 만들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인간적인 수준에서의 바람이다.



■ 리처드 개리엇(Richard Allen Garriott): 우주로 날아간 스타 개발자

▲ 리처드 개리엇(Richard Allen Garriott)

'리차드 앨런 개리엇'은 1961년 영국에서 태어나 '게임 개발자'로 거듭날 만한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컴퓨터를 만졌고,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웠으며, 고등학교 졸업 이후 컴퓨터용 RPG로서는 최초인 '아칼라베스'를 만들어내는 등 업계의 전설이 되어갔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시그니쳐 게임인 '울티마' 시리즈를 개발했고, 3편부터는 직접 '오리진 시스템'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유통하기에 이른다.

▲ 혼자 뚝딱뚝딱 만들어 판매까지 한 '아칼라베스'

당시의 '울티마'는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4, 5, 6편 모두 해마다 최고의 게임으로 손꼽혔고, '울티마'라는 이름 자체가 RPG라는 분야에서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거듭된 성공으로 고양되어있던 오리진 시스템은 이 시기에 큰 도박을 건다. 신작인 '울티마7'에 그간의 모든 노하우와 자본을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울티마7'라는 게임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명작 of 명작에 꼽히곤 한다), 하드웨어와 게임 간의 괴리가 발목을 잡았다. '부두 메모리'라는 예상 못한 변수 때문에 울티마7은 정말 실행하기 힘든 게임이었고, 많은 이들이 실행 과정에서 실패를 겪으며 울티마7을 봉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와중, 리처드 개리엇과 그의 회사를 노리는 회사가 있었으니, 지금도 대형 퍼블리셔이자 개발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EA'다.

오리진 시스템이 EA에 인수되면서, 일단 숨통은 트였다. 7편의 흥행 실패로 닥쳐온 자금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 환경이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EA는 오로지 '흥행'을 목표로 게임을 만들기를 원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만드는데 익숙한 개리엇의 팀원들은 사사건건 EA와 충돌하게 된다. 문제는 EA에 인수되는 과정에서 개리엇이 계약 약관을 대강대강 훑어보는 바람에(...) 저작권이 죄다 EA의 소유가 되어버렸으며, 발언권까지 잃게 되었다는 거다. 이 때문에 리처드 개리엇은 퇴사하는 그 날까지 저작권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게 되고,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 오리진 최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울티마7'

그리고 이 시점에서 국내 게임업계에도 길이 남을 역사적인 인사가 이뤄지니, 바로 당시 국내 굴지의 게임사였던 NC소프트의 리처드 개리엇 영입이었다.

이 사실은 전세계, 그리고 국내 게이머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막대한 자금력을 가졌으며, 온라인 게임에 대한 노하우를 착실히 쌓아온 NC소프트, 그리고 '울티마 온라인'으로 온라인 게임업계에 대파란을 불러왔던 '리처드 개리엇'(MMORPG라는 축약어를 만든 이가 개리엇이다)이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멈출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에야 실력좋은 게임개발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 업계에서 개리엇의 명성은 전설에 가까웠고, 그 영향력 또한 현재의 개발자들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 국내 게이머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후 NC소프트의 이사로 취임한 개리엇은 '타뷸라 라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래, 국내 게임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그 '타뷸라 라사'다. 언제나 자유로운 개발 환경을 원했고, 심지어 게임 내에서도 극한의 자유로움을 갈망했던 개리엇의 성향은 NC소프트 시절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개발 과정은 난항을 겪었고, 갈등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 제대로 나올리 없었다. 결국 '타뷸라 라사'는 1천억원이라는 자본을 투자했지만, 그 10분의 1도 건지지 못하고 대참패했고, 15개월만에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NC소프트는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고 말았다.

▲ 인류 멸망이라는 전무후무한 시나리오로 서비스를 종료한 '타뷸라 라사'

사실 이 실패가 전적으로 개리엇의 탓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개리엇과 NC소프트는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을 뿐, 개리엇이 악의적인 게임 디자인을 했다거나,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또한 리차드 개리엇의 영입은 북미에서 NC웨스트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전략적 영입의 일환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리처드 개리엇은 NC의 효자 자회사인 '아레나넷'의 인수를 도왔고, 본인의 인맥 네트워크를 통해 NC의 북미 정착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가장 큰 문제는 NC소프트에서 나오기 전부터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처드 개리엇'은 항상 남들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는데, 바로 '우주 여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인지(개리엇의 아버지인 '오웬 개리엇'은 나사 소속 우주비행사로 유명했다), 혹은 그저 어릴적 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개리엇은 NC에서 일할 당시부터 우주 여행을 꿈꿔왔고, '타뷸라 라사'가 패키지 가격 1달러라는 똥값으로 팔리는 와중에도 우주 여행을 준비중이었다. 덕분에 그는 민간인으로서 3번째로 우주에 나가는 영광을 누렸지만, 자신이 개발을 맡은 작품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사후 처리 없이 개인적인 꿈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 아버지 오웬 게리엇(Owen Garriott)은 유명한 우주인이었다

덕분에 리차드 개리엇은 제대로 게임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우주로 날아갈 생각만 했다는 멍에를 지게 되었고, '우주먹튀'라는 유니크한 칭호를 손에 얻게 된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타뷸라 라사'의 실패가 꼭 리차드 개리엇의 탓이라고는 할수 없다. 게임을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한 작품의 실패를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가 심심풀이 땅콩처럼 업계인들의 대화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게임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우주 여행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쨌거나 본인의 이름을 걸고 나온 작품의 사후 관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 때문일 거다. 사실 후반부의 삶에서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이상한 행동들을(가령 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던가...) 해왔기 때문에 기존의 업적까지 묻히는 감이 있지만, 개리엇의 황금기에 나온 작품들은 대단한 명작들이며, 그가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부탁인데 지금이라도 정신 좀 차려주었으면 좋겠다. '쉬라우드 오브 아바타'라는 차기작으로 그가 또 비상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 존 로메로(John Romero): 두 명의 천재 '존(John)'에서 몰락의 아이콘이 되다

미국에는 '전설'이 될만한 게임 스튜디오가 여럿 있지만,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회사 중 하나가 바로 '이드 소프트웨어(id software)'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전설의 게임 중 하나인 '둠(Doom)' 시리즈를 제작한 개발사로, 슈터 장르에서는 '전설의 조상님' 정도의 입지를 보이고 있다. 동시에 현역이기도 하지만.

▲ 푸른 옷을 입은 이가 '존 카맥(John Carmack)', 중앙의 장발이 '존 로메로(John Romero)', 입을 벌린 사내가 '톰 홀(Tom Hall)'이다

수많은 이들을 게임의 구렁텅이에 빠트렸고, 때로는 다른 개발자들에게 영감까지 주었던 이 악마적 게임사는 1991년 2월, '소프트디스크' 출신의 네 명의 개발자인 '존 카맥', '존 로메로', '에이드리언 카맥', '톰 홀'에 의해 설립된다. 이 중 두 명의 존, '존 카맥'과 '존 로메로'는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두 명의 '천재 존'이라고 불리게 된다.

'존 로메로'의 능력은 뛰어난 '레벨 디자인' 실력을 갖췄다는 점이었다. 둠에서 백미로 꼽히는 에피소드1이 그의 작품이며, '퀘이크'에서도 10개의 레벨을 제작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뛰어난 프로그래머였던 만큼 그 외에도 다양한 일도 함께했다. 문제는 '존 로메로'가 엄청나게 게임을 좋아했다는 것이고, 더불어 입마저 가벼웠다는 점이었다.

로메로는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잘하기도 했는데, 둠 발매 이후 멀티플레이에 너무 깊게 심취해버려 자신의 일을 버려두기 시작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당시의 이드 소프트웨어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바쁜 곳이었지만 로메로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퀘이크 관련 정보를, 그것도 확정되지 않은 사안을 언론에서 누설한다든가 하는 실수를 저질러 유명세는 얻었지만 동료의 눈총을 사기 시작했다.

▲ 로메로가 디자인한 둠 에피소드1은 아직도 레벨 디자인의 모범으로 꼽힌다

결국, 본인이 강하게 밀어붙이던 퀘이크 프로젝트에서 그가 내놓은 기획안은 번번이 고사될 지경에 이르렀고,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이미 사내 분위기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결국, 존 로메로는 퀘이크 발매 이후 2주 후 정식으로 해고당하면서 이드 소프트웨어와 작별을 고하게 되었고, 해고 사유는 '태업'(...)이었다.

이후 로메로는 먼저 퇴사한 '톰 홀'과 의기투합해 '이온 스톰(Ion Storm)'이라는 개발사를 차려 '다이카타나'라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메로의 파란만장한 인생극이 시작된다.

개발사에서 해고된 처지이지만 로메로는 둠과 퀘이크라는 초대박 게임의 개발에 참여해왔고, 다양한 대외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자금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빵빵한 자금을 손에 넣은 로메로는 텍사스 주 댈러스의 중심에 있는 '체이스 타워' 최상층 라운지를 임대해 스튜디오를 차렸다. 여기서부터 살짝 눈치챌 수 있는 것이, 그곳은 신생 게임 개발사가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천장이 버튼 한 번으로 열리고, 사방천지가 대리석으로 도배되어 있는 스튜디오는 아무리 스타 개발자가 만들었다 해도 상식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저 꼭대기 층이 '이온 스톰'의 스튜디오였다

하지만 그의 프로젝트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로메로 특유의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이 합쳐져 다이카타나는 등장 전부터 어마어마한 기대를 받았다. 'John Romero's about to make you his bitch(존 로메로가 당신을 그의 종으로 만들 것이다)'라는 메인탱커급 어그로의 선전 문구는 지금까지도 유명할 정도. 많은 이들이 이 글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으나, 일각에서는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바람과 다르게 내용물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로메로의 관리자 능력은 평범도 아닌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경력이나 포트폴리오보다는 열정과 의지를 보면서 사람을 뽑았고, 때문에 다이카타나의 개발은 점점 난항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미래관은 현실보다 이상에 가까웠고, 오지랖까지 더해져 디자인, 아트, 프로그래밍 등 되는 대로 간섭하다 보니 오히려 해당 전문가들의 전문성을 도태시키게 되었다.

▲ 밈(Meme)으로 승화된 그의 광고 슬로건과 '다이카타나'

결국 '다이카타나'는 처음의 출시 목적일에서 무려 2년 반이나 늦어진 2000년 5월에나 출시되었으나, 엄청난 버그와 잔혹할 정도로 구린 게임성을 보여주며 폭발하듯 망하고 말았다. 4,4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했던 이온 스톰의 모회사인 '에이도스'는 당연히 존 로메로를 해고해버렸고, 게이머들은 잔뜩 품었던 기대감만큼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최고가 될 줄 알았던 게임은 그저 말뿐이었던 거다.

게임업계에서도 손꼽을 대참사 때문에 존 로메로의 이름값은 도금이 벗겨지듯 너덜너덜 떨어지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그가 참여해 성공한 게임들은 남아 있었다. 그 덕분에 '이온 스톰' 이후 '멍키 스톤 게임즈'를 한 번 더 말아먹고 나서도 게임업계에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도 '스타급 개발자의 추락' 사례에 빈번히 들먹여지곤 한다. '천재의 몰락'에 이렇게 어울리는 이야기가 또 있으련가.



■ '먹튀'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스타 개발자들의 삶

사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빌 로퍼', '리차드 게리엇', 그리고 '존 로메로'까지 이들은 모두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업계 인들이었고,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유산처럼 업계에 남아 다른 많은 개발자에게 좋은 교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위에서 언급한 그 실패의 순간에 가장 많이 슬퍼하고, 분노했을 이들도 저들일 거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과 다른 개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수를 반복했다는 점도 있지만, 동시에 한때는 가장 잘 나가던 개발자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작이 눈에 찰리가 없다. 잘 만들던 이가 자신의 못난 작품을 볼 때 느끼는 분노는 매우 크다. 게임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개발자에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아무리 변호를 해 봐도, 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는 뜻은 아니다. 실수로 인한 실패의 아픔과 그 때문에 개인이 부담했을 참담함은 동정할지언정, 무책임한 행동마저 동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찌 됐건, 이들의 작품은 게이머들에게 고통만을 주었고, 게임업계에도 길이 남을 괴작이 되어 버렸다.

동시에 이들의 몰락은 '스타 개발자' 시대의 끝을 가져왔다. 물론 지금도 유명한 개발자들은 존재하고, 그들의 명성이 가려진 것도 아니지만, 투자자들은 절대 그들의 이름 하나에 기대 돈을 퍼붓지 않는다. 한 사람의 스타보다 '스튜디오' 단위의 게임 제작사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쯤부터였을 거다.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한 사람이 독선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1인 제작 게임은 예외지만)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앞으로 이런 개발자들의 '먹튀'행위는 보기 어려울 거다. '게임'이라는 시장 자체에 대한 레퍼런스가 적었던 당시에는 투자자들에게 있어 스타덤에 오른 개발자들은 굉장히 매혹적인 투자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매우 많은 사례가 쌓인 게임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고 자금을 낼 투자자가 있을 리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게임 산업이 커지던 시점에 잠시 스쳐 지나간 촌극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이 있었기에 더 많은 개발자와 게임사들이 이들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발전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이다. 어찌 됐건 그들이 내 게임인생에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어린 시절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아마 지금 글을 마치는 내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이들 덕분에 게임업계에 가졌던 동경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