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핫(SUPER HOT)'

이렇게 강렬한 이름의 게임이 또 있었던가. 그래 뭐 생각해보니 비슷한 이름은 있었던 것 같다. '데드라이징3'의 DLC였던가 뭐 이름이 슈퍼 하이퍼 뭐였던 것 같은데, 이쪽은 간결한 맛이 좀 떨어졌다.

'슈퍼 핫'을 처음 알게 된 건 '오큘러스'를 시연하던 현장에서였다. 당시 슈퍼 핫은 오큘러스의 시연용 타이틀 중 하나였는데, 완전히 완성된 버전이 아닌, 맛보기용 체험 버전에 불과했다. 당시의 느낌은 '신기하네!' 정도. 내가 움직여야 시간이 움직인다는 컨셉은 분명히 신기했다. 하지만 이 소재 하나로 얼마만큼의 게임을 만들어낼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016년, '슈퍼 핫'이 출시되었다. 게임은 내가 했을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움직여야, 시간이 움직인다. 슈퍼 핫은 오로지 이 기믹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게임이었다. 등장하는 아이템도, 적들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게이머의 목적은 하나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적의 공격을 피하고, 공격하는가. 그리고 나중에 영상을 빨리 감기로 감으면, 웬만한 닌자 액션물 못지않은 절륜한 액션 장면이 완성된다.

단순함 그 자체. 하지만 '슈퍼 핫'은 당당히 스팀 그린릿을 통과하고,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성공한 인디 게임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그 뒷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표트르 이와니키(Piotr Iwanicki)'는 '슈퍼 핫'의 디자이너이자 프로듀서다. 연단에 선 그의 모습은 굉장히 흥분한 듯 보였고, 얼굴에서는 채 가시지 않은 젊음이 한가득 느껴졌다. 마치 '터미네이터2'의 존 코너가 그대로 자랐으면 되었을 법한 모습. 영화배우 '제시 아이젠버그'의 느낌을 풍기며 연단에 선 그는 채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 '슈퍼 핫' 디자이너 겸 프로듀서 표트르 이와니키

'슈퍼 핫'은 7일 만에 FPS를 만드는 게임잼 행사의 출품작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히 출품작에 불과했던 '슈퍼 핫'은 곧 제대로 된 프로젝트로 변화했고, 표트르는 같은 이상을 가진 개발자들과 힘을 모아 킥스타터를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초, 드디어 게임이 완성되었다.



"핵심은 오로지 단 하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표트르는 '슈퍼 핫'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슈퍼 핫'이 '내가 움직여야, 시간이 움직인다.'는 단 하나의 기믹에서 탄생했으며, 게임의 모든 요소는 이 기믹을 살리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보통 '기믹'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뉘앙스로 쓰이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기믹'은 별 볼 일 없는 게임이나 영화 등을 눈에 띄어 보이게 만들려는 일종의 트릭을 의미한다.

하지만 표트르는 '슈퍼 핫'의 이 독특한 컨셉을 기믹이라고 인정했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다. 표트르와 개발팀은 이 기믹을 플레이어가 최대한 즐길 수 있게 만들어야 했으며, 자칫 이 컨셉으로 인해 게임 본연의 재미가 묻힐 상황을 배제해야 했다.

표트르와 그의 개발팀은 '슈퍼 핫'의 액션을 '흐름'과 '퍼즐'의 융합으로 규정했다. 사실 '슈퍼 핫'을 제외한 대부분의 FPS는 '흐름'에 중심을 둔 플레이를 보여준다. 적들을 무찌르며 나아가고, 필요한 상황엔 스크립트 액션이나 컷씬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레일 슈터('콜오브듀티' 시리즈로 대표되는 일자 진행형 FPS)가 그러하고, 퀘이크 등 하이퍼 FPS도 마찬가지다.

▲ 대부분의 FPS는 '흐름'을 따른 전투를 보여준다.

'디스아너드'와 같은 경우는 조금 특이한 편이다. 이쪽은 어느 정도 퍼즐적 요소를 띄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은 흐름을 따르는 전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FPS에 퍼즐이 등장하는 경우가 없는 일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경우 퍼즐적 요소는 주축을 이루는 게임 플레이와는 다소 떨어진, 사이드 콘텐츠의 개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슈퍼 핫'은 다르다. '슈퍼 핫'에는 의도된 퍼즐이 없고, 컷씬도 없으며, 스크립트 액션도 없다. 오로지 '레드 가이'라고 불리는 늘 똑같은 적들과 치르는 전투 상황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머리를 써 최고로 멋진 구도의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슈퍼 핫'의 퍼즐이자 전투다.

전투의 흐름을 디자인한 개발팀은 이 골격에 '너무나도 단순한 UI'를 뒤집어씌웠다. 누군가 보면 '뭐야 이 게임 아직 텍스처 입히기 전인가?'라고 착각할 만큼의 단순하다. '슈퍼 핫'에 쓰이는 색상은 오직 세 가지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배경인 흰색, 적들을 나타내는 붉은색, 나머지는 전부 검은색이다.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표트르와 개발팀은 '슈퍼 핫'의 유일한 컨셉이라 할 수 있는 '시간과 전투'에 모든 것을 투자했고, 그 이상의 소소한 영역에 개발력을 투자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 '슈퍼 핫'의 전투는 퍼즐과 같지만, 전투를 치르고 나면 '흐름'이 생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슈퍼 핫'의 얼굴과도 같은 전투 씬을 어떻게 하면 더 극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느냐였다. 그들은 게임의 모자란 점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슈퍼 핫의 출발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단순한 컨셉이었고, 이 하나로 끝장을 봐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슈퍼 핫의 유일한 콘텐츠이자, 핵심인 '전투'를 더욱 격렬하고,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모든 개발력을 투자했다.

표트르와 개발팀은 게이머가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를 무찌를 수 있도록 다양한 아이템을 추가했다. 아이템의 사용 방법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쏘고, 베고, 때리고, 던진다. '슈퍼 핫'의 주인공은 주먹만으로 상대를 박살 낼 만큼 강하지만, 총알 한 발에도 쓰러질 만큼 약골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이미 '슈퍼 핫'의 액션 컨셉은 명확하다. 적의 모든 공격을 피하고, 모든 적을 쓰러트린다. 표트르를 포함한 개발팀이 해야 할 일은, 이 컨셉을 더욱 멋지게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로그 라이크 게임과도 닮은 점이 있어요."

표트르의 말대로, '슈퍼 핫'의 게임플레이는 '로그라이크'라고 할만한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 같은 장소라 해도 매번 다른 전투 양상이 펼쳐지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까지 게이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투 선택지는 무한에 가깝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펼친 멋진 전투를 실시간 영상으로 만들고, '슈퍼 핫' 동영상을 게재할 수 있는 자체 커뮤니티인 '킬스타그램'에 등록한다.

▲ 많은 이들이 자신의 킬 무비를 '킬스타그램'에 자랑한다.

단순한 UI는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표트르는 당구대를 뛰어넘어 적을 처치하는 간단한 씬을 보여주면서, 흰색으로 가득한 배경과 붉게 표현된 적 캐릭터가 게이머의 모든 상상력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말했다. "누군가는 닌자 액션 영화를 생각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오우삼 감독의 느와르물을 상상할 수도 있죠."

마지막으로 표트르는 '슈퍼 뜨거운'의 적들에 대해 설명했다. "오로지 한 종류뿐이에요." '슈퍼 핫'에 등장하는 적은 오로지 '레드 가이'라고 불리는 단 한 종류의 적이다. 통상적으로 FPS에 등장하는 '그냥 달려오는 놈', '튼튼한 장갑형 적'등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반응하는 단 하나의 AI로 이뤄진 군단일 뿐이다. 스크립트 이벤트도 없고, 컷씬도 등장하지 않는다. 표트르는 '슈퍼 핫'에 컷씬은 개발비 낭비일 뿐이라 일축했다.

▲ 붉은 녀석들을 모조리 무찌르는 것. 이 게임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플레이의 깊이는 남다르다. 처음 게임이 출시되었을 때, 기자들끼리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거 플레이 시간 굉장히 짧다던데? 가격대비 좀 아깝지 않을까?" 하지만 '슈퍼 핫'의 콘텐츠는 단 한 번 소모하고 끝나는 선형 전투가 아니다. 단순한 상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리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것. 매번 다른 전략으로 전투를 치르는 '엑스컴' 시리즈의 핵심 콘텐츠에 가까운 모습이다.

30분이라는 시간이 모자라듯 격하고 빠르게 강연을 몰아친 표트르는 물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우리 게임에서 뭔가 기막힌 스토리를 찾거나, AAA급 게임에서나 볼 수 이는 멋진 점들을 찾으려는 분들은 많아요. 그리고 그들 중엔 '도대체 슈퍼 핫의 매력 포인트가 뭐냐?'고 묻는 분들도 많죠. '슈퍼 핫'은 너무나도 단순한 게임이에요. 그냥 빨간 녀석들을 몽땅 날려버리면 그게 끝이에요.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지겠죠.

말 그대로 '슈퍼'하고 또한 '핫'하다. 넓은 강의실이었음에도, 표트르의 열기가 느껴졌고, 이는 그의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라는 작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명작이 된 게임들은 그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게임도, 이렇게 단 하나의 아이디어에 전부를 바쳤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슈퍼'하고 '핫'했다. 게임 플레이가 그랬고, 표트르의 강연이 그랬다.

하지만 최고의 '슈퍼 핫'은 따로 있었다. 길을 정한 후, 단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고 꾸준히 외길 개발을 해온 표트르와 그 개발진. 전혀 검증조차 되지 않은 방식의 게임을 생각하고, 그 끝을 보기 위해 끝까지 달린 그들의 열정과 믿음이 가장 '슈퍼'하고도 '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