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요리사'라는 직업을 말할 때 '예술가'로 표현하곤 한다. 여러 재료를 섞고 가공해 자신만의 맛을 만들어내는 것. '창작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요리사는 예술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술가를 요리사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씨웨이브소프트'의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는 '김범'은 게임 원화가라는 직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예술가를 요리사로 평하는게 맞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굳이 요리사로 비유하자면 잘나가는 레스토랑의 셰프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김범 특유의 화풍은 '마비노기 영웅전'에서 빛을 발했고, '야생의 땅 듀랑고'에서 다듬어진 맛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준비중인 '하이퍼유니버스'에서 그는 한껏 모양을 낸 정찬을 선보였다.


그런 그가 NDC2016의 첫째 날 모습을 드러냈다. 주제는 심플했다. "원화가를 위한 그림을 통한 소통 방법". 처음 강연 제목을 보았을 땐, 막연히 뭔가 예술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아트워크를 통한 게이머들과의 소통과 같은 주제 말이다. 이렇듯 어느 정도 단정적인 생각을 품은 채 강연장으로 향했다. 끝도 없이 늘어선 줄을 겨우 뚫고 자리에 앉자, 김범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문장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꿈도 희망도 없는 완벽하게 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 씨웨이브소프트 김범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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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을 시작하면서, 그는 '원화가(컨셉 아티스트라고도 불리나 김범 본인은 원화가라는 표현을 선호했다,)'가 업계에서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음 내용은 김범이 말하는 대다수의 원화가들이 업계 입문과 동시에 겪는 일들이다.

1. 일반적인 원화가들은 굉장히 많은 문화 콘텐츠를 사랑하며,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2. 하지만 자신 있게 그린 그림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그림이 통과되는 경우가 생기면서 점점 재미와 의욕을 잃게 된다.

3.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원화가는 자신이 약자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원화가의 제안은 번번히 거절당한다.


이어 김범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쪽의 잘못이라 할 수 없어요. 원화가가 스스로를 약자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의뢰자와 원화가가 갑을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의뢰자가 원하는 의도를 원화가가 파악하지 못했고, 원화가는 의뢰자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소통'이 필요해져요"

▲ 결국 소통의 문제

여기서 김범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소통에 이용하는 글과 말은 원화가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은 당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당신의 평가 기준이며, 문자가 개발되기 이전부터 존재한 가장 강력한 의사 소통 수준이에요. 의뢰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할 때 말로 가타부타 설명하는 것 보다 한 장의 그림이 더욱 효과적이고, 강력하죠. 이게 '그림 소통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문을 끝낸 김범은 본격적으로 '그림 소통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원화가의 가장 큰 무기

"그림 소통법을 위해 쓸 수 있는 기본 재료는 먼 옛날부터 존재했어요. 원, 삼각형, 사각형. 매우 간단한 도형이지만, 그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죠. 또한 '선'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각자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요"

김범이 말하는 '그림 소통법'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림'을 글자로 쓰는 문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작고 간단한 도형이라 해도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도형들은 문장의 구성단위인 '단어'에 비해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있고, 불명확하다는 단점을 품고 있다. 반면, 그만큼 '감성'을 전달하기엔 효과적이다. 각각의 도형과 선을 배합하고, 섞어가며 원화가들은 무한대에 가까운 표현을 할 수 있다.

▲ 소통은 아주 작은 단위부터 시작한다.

김범은 그림 소통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옳고 그른 그림은 없다.'라고 말했다. 어떤 그림이라 해도 보는 이의 수만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며, 동시에 같은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칠 때 각각의 개인은 서로 다른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뜻이다.

앞서 원화가들이 겪는 고난에서 나온 '그림을 잘 그려도 퇴짜 맞고,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보내는 일'이 이 때문에 벌어진다. 기획안을 보았을 때 의뢰자와 원화가가 서로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르므로 벌어지는 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갑론을박을 통해 의견 일치를 해나가겠지만, '그림'을 통한 소통은 이런 감성의 간격을 메우는 일을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김범은 한 장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 간단한 그림 소통의 예시

이 예시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호전적', '제국주의', '기사'라는 세 가지 키워드다. 의뢰자가 요청한 내용은 저 세 가지 느낌을 모두 줄 수 있는 그림이다. 물론 그 느낌의 주체는 '의뢰자'이다. 원화가는 앞서 말한 대로 선과 도형 등을 통해 각각의 키워드를 만족시켜나가야 한다.

'호전적'이라는 코드는 깎아지는 예각을 이미지에 사용함으로써 만들어냈다. 물론 이를 통해 의뢰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만족도는 3% 정도이며, 이 또한 원화가의 대략적 느낌이다. '제국주의'라는 코드는 진중함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직각'과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곤 하는 독수리 모양의 어셋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기사'는 이 캐릭터가 가지는 가장 큰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데, '곡선'을 이용해 로봇이 아닌 인간에 가깝다는 느낌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기사의 아이덴티티인 중세풍의 갑옷 구조를 덧붙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안은 의뢰자의 요구에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기 때문에 수용될 수 있다. 물론 비율의 퍼센티지는 모두 원화가가 생각하는 대략적인 수치이며, 의뢰자가 준 컨셉에 맞아떨어진다는 것 역시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김범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내용은 모두 수치와 확정이 배제된 '감성'이라는 현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원화가가 튕겨야 할 현 또한 이 감성의 현이었다.

김범이 말하는 그림 소통 사례

▲ 기획안을 살펴본 후, 주요 코드를 파악, 자료를 모은다.


▲ 캐릭터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포즈를 잡는다.


▲ 모은 자료를 이용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린다.


▲ 기본 컬러를 채색해 느낌을 살린다.


▲ 1차 피드백을 받는다. 방향성을 정하기 위함이다.


▲ 올드하다는 지적에 대한 디자인 시안을 들고 간다. 의뢰자에게 어떤 풍의 디자인이 가장 미래적으로 보이냐고 묻는 식이다.(보통 이 단계에서 누가 봐도 이거다 싶은 시안을 껴놓는 식의 트릭(?)을 쓸 수도 있다고 김범은 덧붙였다.)


▲ 피드백을 통해 엣지가 살아있는 디자인을 의뢰자가 선호한다는 것을 인지, 이를 반영한다. 이후 피드백을 한 차례 더 받아본 후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면 그대로 진행한다.


▲ 재미 요소를 덧붙여 완성(물론 간단하진 않겠지만...)


설명이 끝난 후, 김범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의뢰자가 '알아서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고 말했다. 원화가를 완전히 믿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시점에, 매너리즘이 찾아온다고 그는 덧붙였다. 머릿속에 프로세스가 완전히 자리 잡고,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일이 너무 쉬워지는 거다.

▲ 솔직히 누가 봐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강연의 끝에서, 강연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스텝의 재촉을 들으며 김범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일이 쉬워지면서 원화가는 점점 대담해지고, 의뢰자의 입맛에 100% 맞는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시점에 도달한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원화가가 헤쳐나갈 모든 도전의 시작이며, 가장 어려운 장벽을 눈앞에 둔 시기라는 점이죠.

그때가 되어, 원화가는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존재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집단 지성으로 이루어진 최후의 관문. 바로 게이머 말입니다"



김범의 강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원화가'로서 일하는 이들이, 다른 예술가들과 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보며 느끼는 자존감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을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그림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하지만 그냥 그림이 아닌 원화라면 옳고 그름이 있다.'라고 역설했다. 자신의 만족보다는 모든 이들의 공감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리라.

기사의 서두에서, '예술가를 요리사로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물론 모든 예술가를 요리사에 빗대는 것은 억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임 원화가는 달랐다. 문화라는 방대한 세계에서 재료를 모아, 모든 이들의 입맛에 맞게 감성을 만들어내는 일. 김범이 말한 대로 '원화가'라는 직업이 모두의 공감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이들을 요리사라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