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 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SKT T1이지만, 사실 SKT T1은 후발 주자였다. 롤 초기를 주름잡았던 MIG, 나진 e-엠파이어, 스타테일, 제닉스 스톰, MVP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아예 틀조차 없었다. 그러나 SKT T1은 혜성같이 등장해 모두를 경악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2013년 데뷔 시즌에 아주부 프로스트를 3:0으로 제압하고 3위를 기록했고, 섬머 시즌에서는 우승컵을 들어 올리더니 이어서 kt 롤스터 불릿츠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꺾고 시즌3 롤드컵에 진출해 세계 정상에 LCK의 이름을 올려놨다.

지금이야 SKT T1 K 선수들의 아이디만 봐도 우승 전력이라는 것에 공감하겠으나, 당시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었다. 프로 경력 없이 솔로 랭크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던 선수 세 명과 베테랑 두 명을 조합했을 때, 당연히 팀워크 면과 팀 게임 이해도에서 크게 떨어질 게 분명하다는 것이 그 당시의 '상식'이었다. 지금도 팀 게임과 솔로 랭크의 차이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예 다른 게임이라고 할 정도로 격차가 컸었다. 실제로 솔로 랭크 최상위권임에도 대회에 적응하지 못한 선수가 많았다.

그러나 SKT T1 K는 해냈다. 모든 선수가 라인전을 잘했지만, 운영과 호흡 면에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만든 지 일 년도 안된 팀이 어떻게 그런 탄탄한 호흡과 조직력을 자랑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감독-코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김정균 코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아 최병훈 감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SKT T1이 우승하거나, 좋은 경기력을 보이면 자연스레 김정균 코치가 주목을 받는다.

나조차도 SKT T1의 승리에서 최병훈 감독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SKT T1 출신 선수와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최병훈 감독은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모든 팀의 감독과 비슷한 역할이지만 잘 수행해내기에 SKT T1이 세계 최고의 팀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나?


사실, 현재 롤 팀의 감독 중 같은 종목의 프로게이머 출신 감독은 ROX 타이거즈의 정노철 감독 하나다. 프로팀의 코치진은 대부분 이전에 롤 프로게이머로 활동했거나, 마스터-챌린저와 같은 상위 티어 출신이다. 당연히 게임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기에 밴픽과 전략 전술에서 코치의 역할이 큰 것이 더 효율적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e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력과 성적인 것도 맞다. '그럼 감독이 미치는 영향이 적은 것이 아니냐?'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감독의 노력에 대해 알 수 있다. 선수들의 실력은 연습 경기에서 대부분 갖춰진다. 그리고 감독은 연습 경기에서 선수가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흐트러지는 모습이 보이면 마음을 다잡아준다.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전략-전술에 집중해야 하는 코치가 하는 것은 어렵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선수들이 경기력을 쌓아가는 연습 과정에서나, 패배했을 경우 감독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뭄에 작물이 자랄 수 없듯이 안정적인 환경 없이는 훌륭한 경기력이 나올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모든 팀이 패배를 겪을 때 비판을 받지만, 그중에서도 SKT T1은 대부분의 대회에서 정상을 지켰었기에 한 번의 패배에 유독 많은 비판이 쏟아진다. 선수들의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패배했을 때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밴픽인 경우도 많기에 코치진 또한 부동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때 나서는 것이 바로 감독이다. 감독(監督) : 어떤 일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잘못이 없도록 보살펴 다잡는 것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영화나 무대 행사 등을 종합적으로 지도하고 지휘하는 일. 스포츠팀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책임자. 그렇다. 감독은 책임자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가 없다. 팀이 패배했을 때, 코치진과 선수들은 감독에게 기댈 수 있어도 감독은 그래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다음 경기까지 팀 구성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멘탈을 잡아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바로 감독의 임무다. 모든 감독이 이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SKT T1의 감독직이라는 무게는 남다르다. 두 번의 롤드컵 우승, LCK 16시즌 스프링 우승을 했음에도 SKT T1이 섬머 시즌에서 삐끗함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1위의 자리란 그런 것이다. 최고이기에 패배해서는 안 되는 무거운 자리. 그곳에서도 가장 무거운 직책이 감독이다.


최병훈 감독이 하는 일은 감독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코치진과 상의해서 다음 엔트리에 어떤 선수를 내보낼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선수들이 불편한 점이 있으면 프론트와 연락해 빠르게 협의점을 찾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론트의 요구라고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컨디션을 우선으로 두고 타협점을 도모한다. 인사권자라고 볼 수도 있는 프론트의 제안보다 선수 의사와 스케쥴을 먼저 생각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번 롤드컵 4강 전을 끝마치고, 최병훈 감독의 인터뷰는 평소와 달랐다. 항상 인터뷰에서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던 최병훈 감독이 뼈 있는 말을 내뱉었다. 선수들과 코치진에게 좋은 연습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순간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SKT T1 팀 책임자로서의 압박감을 격한 인터뷰로 떨쳐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SKT T1은 지난 시즌 세계의 왕이었다. 이번 시즌도 대기록의 역사를 새로 쓰며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 유력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헨리 4세의 구절 중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있다. SKT T1은 그 최고라는 프레임에 걸맞은 팀이 되기 위해 압박감을 견디고 있다. 그 무게는 쉬이 짐작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베테랑 중 베테랑인 김정균 코치가 밴픽에서 실수를 범하겠나.

SKT T1이 왕관을 쓴 왕이라면, 최병훈 감독은 왕이 앉는 왕좌다. 왕관의 무게와 왕의 무게를 모두 견뎌내고 있음에도 왕좌의 노고를 알아주는 이는 거의 없다. 왕좌가 없는 왕은 온전할 수 없다. 비단, 최병훈 감독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e스포츠 관계자가 오늘도 화려한 조명 밖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