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도 SKT T1 K와 S가 합쳐지며, '뱅' 배준식의 기량은 만개했다. 당연히 커리어도 그 실력만큼 쌓였다. '벵기' 배성웅, '페이커' 이상혁을 제외하고 최고의 커리어다. 어떤 프로게이머라도 그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배준식의 선수 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12년도 데뷔한 그는 kt 롤스터 연습생에서 트레이드로 나진 화이트 실드에 들어갔다. 17살 소년이 자신보다 11살이 많은 형과 지내는 것에 불편함이 없을 순 없었을 거다. 성적도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이후, 제닉스 블라스트로 들어가서도 그는 유망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SKT T1 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몇 번의 큰 실수로 추락했다. 유망주에서 한계가 정해진 선수가 돼버린 것이다.



하지만 SKT T1 K와 S가 합쳐지며 그는 날개를 폈다. 2015년 LCK 스프링 우승, MSI 준우승, LCK 서머 우승, 롤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뒀다. 3년간 지지부진했던 그의 커리어가 단박에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다. 더군다나 2016년에서도 비슷한 성과를 냈다. 프로게이머로서 나갈 수 있는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프로게이머로서 이보다 더욱 만족스럽고, 기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와 인터뷰를 나눈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하는 내내 나의 예상과는 다른 답이 많이 나왔다. 엄청난 성적 뒤에 가려진 그의 노력. 프로게이머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너무나도 당연시 여겼던 것은 아닐까. 가볍게 시작해 무겁게 끝난 배준식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12월이라고 해도 믿을 날씨, 일산의 한 카페에서 '뱅' 배준식을 만났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 후, 인터뷰가 진행됐다.

"안녕하십니까. SKT T1의 원거리 딜러를 맡은 '뱅' 배준식입니다. 반갑습니다."

롤드컵 우승 이후, KeSPA컵 진행 다음 날 만나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활기찼다. 첫 질문에도 막힘 없이 대답을 잘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롤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제가 많이 잘하더라고요.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됐을 때, 랭킹 10위권에 진입했어요. 상위권에 들어서 게임단에서 연락이 왔고, 테스트를 본 후에 합격했어요. 빠르게 상경을 했죠. 그때는 롤이 정말 재밌었어요."

"일반적인 고등학생처럼 야간 자율 학습까지 끝내고, 밤늦게 롤을 키고 새벽까지 했었는데 너무 피곤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게임만 하고 싶다는 어린 마음에 프로게이머를 시작하게 됐죠(웃음). 이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요."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뭔가 창대한 목표를 가지고 프로 생활을 시작하진 않았다고 한다. 많은 프로게이머가 같은 이유로 입문하는 편이다. 그러나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선수 생활이 달라진다. 하지만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한 것일까.

"당시에 기업팀이 몇 개 없었어요. 그런데 kt라는 대기업에서 팀을 만들고, 거기에 합격했으니까 그 부분도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저의 부모님은 자유 방임주의세요. 사고가 개방적이신 편이고, 어렸을 때부터 저의 의견을 존중해주셨어요. 테스트부터 입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그의 부모님이 반대하고, 그가 프로게이머로 활동하지 못했다면, 큰 스노우 볼이 굴러갔을 거다.

그는 SKT T1 이전에 많은 팀을 옮겨 다녔다. 어린 마음에 프로게이머를 시작한 배준식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프로게이머 생활을 했을지도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서 kt 롤스터부터 SKT T1 S 시절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 없이 게임만 했어요. 게임이 그냥 너무 재밌었어요. 저에겐 연습이 아니었어요. 그냥 즐겼던 거죠. kt 롤스터에서는 워낙 짧은 기간 동안 있어서 뭘 배웠다고 할 수가 없어요. 아, 홍천에 맥도날드가 없었는데 kt 롤스터에 가서 맥도날드의 맛을 배웠어요. 또 삼성동 근처에 숙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삼성역의 지리도 배웠죠."


"나진에서는 재밌게 생활했어요. 팀원들과 나이 차이가 정말 많이 났어요. 4살, 7살 11살 차이였는데요. 형들이 굉장히 잘해주셨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상상이 안 돼요. 어떻게 11살 차이 나는 동생이랑 그렇게 잘 지냈을까. 형들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기본적인 예절에 대해서 나진 시절에 많이 배웠어요. 제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연습실에서 연습 시간에 제가 컵라면을 컴퓨터 앞에서 끓여 먹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박정석 감독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 그게 잘못된 건 줄 몰랐어요. 효율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큐를 돌리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니까, 라면을 먹으면서 시간을 아끼려고 했는데, 프로게이머가 자신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연습실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이제는 알죠(웃음)."

"제닉스에서도 예의에 대한 것과 멘탈 관리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저는 홍진호 감독님이 아니라, 김갑용 감독님이 계실 때 들어갔는데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직접 말해주시고, 친근하게 잘 대해주셔서 기억에 많이 남는 고마운 감독님이에요. 당시 팀원에 형들도 많았는데, 그때도 나진 시절처럼 철이 없었던 거 같은데 잘 받아준 것 같아요. 형들에게 고마워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걸 배웠어요. 형들의 행동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일단 저부터 문제가 많았거든요(웃음).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정말 재밌게 지냈던 거 같아요. 성적을 떠나서 그때 많은 사람과 코치, 감독님을 만난 게 득이 된 거 같아요."

"그 시절에는 힘든 게 없었어요. 모든 걸 떠나서 그 생활을 즐겼거든요. 성적에 대한 불안함? 없었어요. 재밌는 팀원들과 지내는 재미에 빠졌고, 그 생활에 너무나도 만족했어요. 지금처럼 경기에 대한 부담감, 플레이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던 시절이에요. 성적은 안 나왔지만,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것 같아요. 지금도 행복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행복했던 시절은 아무래도 SKT T1 S까지예요. 부담감, 압박감, 스트레스가 없었거든요."


과거 팀들에 대한 질문에 그는 밝게 웃으며 막힘 없이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저 게임이 즐겁고, 좋아서 하던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SKT T1에 들어가서도 크게 배웠던 게 없어요. 당시 저희가 S팀이었는데, 김정균 코치님이 K팀을 담당해서 S팀은 자생하는 구조였어요. 스크림과 피드백을 우리끼리하고, S에서는 이전 팀들과 똑같은 생활이었어요. 그런데, 팀이 SKT T1으로 합쳐지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지금까지 내가 게임을 잘못해오고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내가 가지고 있던 롤에 대한 견해가 완벽히 뒤바뀌었어요. 김정균 코치님의 도움이 컸죠. 피드백하는 데도 막힘 없이 했고, 코치진이 잘 중재해주셔서 의견 충돌에도 감정이 상하지 않고 잘 수긍하게 됐어요."

프로게이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피드백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은 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실수를 지적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팀은 좋은 성적을 거둘 수가 없다. SKT T1의 코치진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았고, 피드백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사전에 잘 차단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SKT T1이 있다.


SKT T1 S에서 SKT T1이 됐을 때, 부담감은 없었을까. 상대적으로 S의 인지도는 크게 떨어졌고, SKT T1 K의 팬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었다.

"연습 환경이 바뀐 후부터 실력이 느는 것이 나날이 느껴졌어요. 다음 대회도 얼마 남지 않아서 경기력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부담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걸 원동력 삼아 더 열심히 했죠. 사실 저희 팀은 외부 평가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아요. 내부 평가에 집중하는 편인데, 그때 김정균 코치님이 저의 실력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주셨죠. '몇 번의 큰 실수 때문에 과소평가가 됐지만 너는 잘한다. 다듬기만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실수들은 다 저의 실력 부족으로 발생했던 거에요. 부담감, 긴장감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아요. 인간 배준식이 문제였어요(웃음)."

"15년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어요. 올해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할 수밖에 없다고 다들 생각했거든요. 모두 자신감이 넘쳤어요. 어느 팀, 어떤 선수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지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 모든 선수에게 생겼던 거 같아요. 100판을 하면 80판 정도 승리를 했어요. 그런데 20판을 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연습 경기에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어요.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에서 패배를 겪으면, 타격이 커요. 15년도에 모든 대회 경기를 통틀어 6패 정도 했던 거 같은데, 성적은 좋았지만, 자괴감과 부담감은 항상 저를 따라다녔어요. 이때부터 속이 조금씩 썩어갔던 거 같아요. 팬들이 당연히 SKT T1이 우승할 거라는 기대도 부담이 됐었어요."


그래도 그는 생애 첫 우승을 해냈다. 성과를 보상받은 기쁨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우승 소감은 뭔가 달랐다. 그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첫 우승을 하고 제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 '다행이다'였어요. 정말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라고... 저희 팀은 경기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타입이거든요. 연습 경기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단련을 하고, 힘들었던 걸 경기의 승리로 풀자는 마인드로 했어요. 대회는 오히려 부담 없이 하는 편인데, 연습 경기는 더 부담을 가지고 해요.

내 실수가 나오는 게 너무 힘든 거죠. 팀원들의 실수도 있지만, 내가 실수를 하는 건 용납이 안 됐어요. 다섯 명 모두가 100% 완벽할 수가 없잖아요. 실수가 안 나오게 하려고, 피드백하는 게 1년 내내 이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힘들죠."


첫 우승을 하고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니. 생애 첫 우승에도 순수히 기뻐하지 못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짠했다. 당시 20살이었던 배준식의 부담감이 전해졌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정도로 열심히 했기에 SKT T1이 우승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MSI에서 패배했다.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몇 주 사이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일각에서는 MSI에서의 패배가 약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SKT T1은 당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팬들의 비판보다 다른 게 힘들었어요. 저희가 준비를 못 했어요. 준비 기간이 짧은 걸 떠나서 MSI에 도착해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촉박한 일정은 일정이지만, 그 상황에서 저희가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가 없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롤챔스를 하던 것처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게... 항상 저는 그랬던 거 같아요."


"외부의 비판보다는 스스로 받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비판이 쏟아질 때도 저는 항상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프로니까 실력으로 증명하자. 저뿐만 아니라 SKT T1이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니까 실력으로 증명하자고요. 실력으로 증명하기 위해선 더 나아져야 해요. 어떻게 더 잘할까에 대한 고민이 1년 내내 저를 따라다녀요. 팬들의 비판과 전문가들의 비평은 3~4번째 문제에요."

"이런 마음가짐이 멘탈 관리에 큰 도움이 됐어요. MSI 패배 이후, 저희 팀의 생각은 이제 롤챔스 서머에서 다 죽이고, 롤드컵가서 EDG에게 복수 하자였어요. 질문하신 것처럼 MSI의 패배가 약이 됐어요. 스프링 시즌에 잘해왔지만, 잠깐 흐트러지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의 답변에 절로 감탄했다. 프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경기력으로 증명한다는 건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로 쓰기 어려운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핑곗거리가 얼마나 많겠나. 어린 나이에도 배준식은 확실히 프로게이머로서 뛰어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알던 귀엽고, 어리광 많던 동생 배준식이 아니라, 프로게이머 배준식이었다.

2015 서머 시즌에서는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 시즌에서 17승 1패, 결승전에서 3:0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이어진 생애 첫 롤드컵.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때 생각했던 것들이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열심히 하고, 가장 열심히 했으니 이기는 게 당연하다. 우리보다 열심히 한 팀이 없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마음이요. 롤드컵에서도 똑같았어요. 경기할 때는 편했는데, 라이엇 주관 대회가 선수들을 배려해줘서 불편한 점이 없었어요. 하지만 타지에서 준비하고, 큰 대회인 만큼 선수들과 코치진 모두 예민해졌어요. 팬들의 기대도 부담이 됐죠. 그때 모든 전문가와 팬들의 평가가 SKT T1이 무조건 우승한다였죠."

"그런 기대와 평가 때문에 더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주려고 스트레스를 더 받았어요. 당시 스크림 성적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 적이 처음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다 이겼는데, 외국팀과 하니까 MSI때처럼 지는 거예요. 모든 선수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죠. 예선 2주간 정말 힘들었어요. 보인 결과는 압도적인 우승이었지만, 저희는 발버둥을 치며 연습을 했어요."


모든 단어에서 그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가장 열심히 했으니 이기는 게 당연하다. 멋진 말이다. 우리는 SKT T1의 우승을 어쩌면 당연히 여겨, 그들의 노력에는 무심했던 것 같다. 백조의 소리 없는 발버둥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롤드컵 우승. 프로게이머로서의 정점을 찍었다. 동기부여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2015 롤드컵이 끝나고, 되게 행복하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해서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요. 이제 조금 쉬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자란 생각을 했죠. 당시에 매일 연습이 힘들어서 '오늘 힘드네, 내일도 당연히 힘들겠지 그래도 해야지'란 생각을 항상 했어요. 그런데 막상 닥치니까. 힘들었어요. 올해 그걸 더 심하게 느꼈어요. 이 생활이 2년째 반복이 됐잖아요. 모든 대회를 우승해도 같은 생활이 반복된다는 게 힘들어요. 스트레스를 받는 연습은 계속되고, 팬들도 계속 기대하고 우리는 또 이겨야 한다는 것이 바뀌지 않아요."


"이 매너리즘에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심리 상담을 받게 됐어요. 작년에도 우승하고, 올해는 MSI와 롤드컵 모두 우승해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아... 이걸 또 해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죠. 배부른 소리라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프로게이머로서 좋은 경기를 보여줘야 하니까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습에 집중해야 하는구나 정말 지치는 게 뭔지 느꼈어요."

"그 와중에도 우리가 열심히 발버둥 치는 걸 몰라주듯이 비난이 쏟아지고, 저희가 대충 경기를 한다느니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루머들이 떠올랐어요. 저는 어떻게든 승리하려고 발버둥 치는데, 질책은 계속되고, 있지도 않은 루머가 계속 생기니까 모든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열심히 해도 부질없다. 내가 뭘 위해서 이러고 있나... 2015년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서 이기려고, 지기 싫어서 올해도 지옥 같은 연습을 하는데, 알아주는 사람을 결국 내부 사람들과 주변인들밖에 없다고 느껴졌어요. 스프링 시즌 부진을 딛고 결승전에 진출했을 때도 이게 의미가 있나, 우승해도 나아질 건 없을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가 느낀 부담감과 고뇌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자신은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걸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까. 많은 것을 이뤘지만,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다. 최고라는 자리는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지 그의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지금도 굉장히 힘든 상태일까?

"다행히 심리 상담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를 담당하는 분이 테니스, 골프 선수의 심리 상담도 하시는데,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적용해도 효과가 발휘되는 거예요. 사소한 것이지만 이걸 통해서 우리가 진짜 프로 선수라는 걸 느꼈어요. 이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연습하고, 비판에 힘들어해 모든 것에 환멸감을 느낄 게 아니라, 좋게 생각해보려고요. 지금의 노력이 내 미래의 꿈과 이어질 수도 있다 등등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올해는 2015년도와 다르게 프로게이머 배준식이 아닌, 인간 배준식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게임을 그만두더라도, 어딜 가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을 버팀목을 얻었죠."

그는 이제는 괜찮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이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사실, 그가 심리 상담을 받는 와중에도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던 터다.

"정말 힘들었어요.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이것저것 생각을 고치려고 하는데, 루머가 계속 생기니까요. 저는 루머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멀리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루머를 듣고, 저에게 직접 물어보니까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거에요. 하나를 해명해도, 또 다른 루머가 생기고... 그 와중에도 강행군은 계속됐으니까요. 이 시기에 가장 많이 든 생각이... 프로게이머로서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내가 미운 걸까. 왜 나를 싫어하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였어요."

"이런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주위 사람에게도 사람들이 나를 너무 미워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할 정도였어요. 확인해보지도 않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거짓 루머로 나를 싫어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어요. 제가 실수한 사건도 있어요. 그건 정말 제가 철이 없었죠. 깊이 반성했고, 그 이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이 시기에 난 프로니까 무슨 말이 나와도 실력으로 증명하자는 모토를 다시 곱씹으며 노력했어요."


착하고 유순한 사람도 억울하게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는 법이다.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배준식은 프로라는 두 글자를 버팀목 삼아 쓰러지지 않았다.



올해 서머 시즌에서는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리그제 개편 이후 최초였고, SKT T1이 합쳐진 후 처음 있는 일이라 충격이 컸을 것이다. 당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블랭크' 강선구의 부진이었다. 해설진들조차 날이 선 비판을 할 정도였다. 같은 팀원으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선구가 잘 한건 아닌데, 그보다 몇 배 이상의 비판을 받았어요. 저, 혹은 다른 사람의 실수도 선구에게 묻힌 감도 있어요. 정글탓을 하기엔 정글과 별개로 실수한 것이 많아요. 선구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우리가 모두 부족했던 거죠. 우리가 승리할 만큼 열심히 했던 게 아니었던 거죠. 이 정도로 부족해? 그럼 더해. 이게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진짜 답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열심히 안하는 선수는 없는데, 다른 팀보다 잘하려면 더 해야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이해가 안됐던 대목이다. 팀원이 3의 실수를 하고, 자신이 1의 실수를 하면 보통 사람이라면 핑계를 대거나, 자기 합리화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완벽했다면 누군가 실수를 했어도 이겼을 거라는 이야기는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 배준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롤드컵도 정말 쉽지 않았다. 4강부터 결승까지 모두 풀세트 접전이었다. 어느 때보다 부담감이 심했을 것 그였다. 아무리 SKT T1이라지만,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을까.

"팀원들의 생각은 모르겠는데, 저는 자신 있었어요. 어떤 봇 듀오를 만나도 이길 자신이 있었어요. 스스로 확신을 하고 게임을 하다 보니, 연습과 대회에서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풀세트지만 저는 편하게 게임을 했어요. 우리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해서요. 서머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했지만, 롤드컵은 아예 다른 대회라고 생각하거든요."

"저희가 경기 도중에 냉정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에요. 어떻게 더 잘할지만 생각을 해요. 어떤 실수를 고치고, 다음 판에 뭘 보완해야 할까 생각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아요. 멘탈도 당연히 흔들리지 않아요. 오히려, 풀세트까지 가면 편안해요. 이것만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이길 거란 확신이 점점 구체화 되거든요. 항상 저희는 5세트까지 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경기에 임해요. 저와 재완이가 하는 구호가 있는데, '긴장하고, 방심하지 말고, 첫 판처럼 열심히 하자 파이팅!'이라는 구호에요. SKT T1 S 시절부터 풀세트를 워낙 많이 해봐서 그 때 경험이 도움되는 것 같아요."


정석적인 이야기지만, 이를 지키는 건 힘들다. 누가 풀세트까지 생각하면서 게임을 하겠나. 그것도 2:0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말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속으로는 방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매번 우승을 하고, 풀세트에서 이기는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는 데 믿을 수 밖에 없다. 역시 SKT T1은 다르다.

SKT T1이 강력한 이유로 코치진을 꼽기도 한다. 팬들은 SKT T1의 코치진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짧게 말해서 우리 팀의 중심이죠. 더 말할 것이 없어요. 두 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선수가 있어도 이렇게까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을 거에요. 코치님이 멘탈을 잡아주는 게 없으면, 이만큼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것 같아요. 제 실력을 발휘 못 하는 것도 당연하겠죠. 그만큼 감독 코치님의 역할이 커요. 경기는 선수가 하지만, 연습에서 선수를 만드는 게 코치진이거든요. 연습 과정에서 대회의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이 연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요."

미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은 NFL(National Football League)-NBA의 헤드 코치다. 스포츠의 중심이자 꽃은 선수인데, 왜 선수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까란 의문엔, SKT T1이 이룩한 성과와 선수들의 평가를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뱅' 배준식은 데뷔연도도 빨랐고, 단기간에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지만 이제 21살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데 시간이 없다. 그가 과연 선수 생활을 언제까지 하고 싶은지도 궁금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롤을 즐기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재밌어요. 저는 자신 있어요. 롤이 망하지만 않는다면 30살이건 40살이건...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요?(웃음). 최대한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프로게이머라고 생각해요. 다른 일을 했을 때, 이만큼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쉽고, 힘든 점도 많지만 내가 잘하고, 재밌어하는 일을 하는 지금이 좋아요. 비록, 연습 과정이 고되고, 내가 기계 부품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다른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어떤 직업이든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겠죠. 그래도 현재의 일정은 너무한 것 같아요. 분할 중계로 일정이 늘어난 것도 힘들고, KeSPA컵도 휴식기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게 힘들어요."


"때로는 일상이 그리울 때도 있어요. 제가 홍천에서 자랐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가 많아요. 초중고를 같이 다녔고, 형제나 마찬가지예요. 그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고, 자유롭게 생활하는 걸 보면 부럽죠. 제가 21살인데,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 아니겠어요(웃음). 지금은 친구들이 군대에 가서 좀 괜찮아졌는데, 한때는 정말 놀고 싶었어요. 제가 프로게이머지만 충분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일찍 취업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 틈틈이 친구들을 만나고, 팬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면서 활력소를 찾으려고 해요. 그래야 내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인 것 같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걱정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스타들에게도 애로사항이 있을 터다. 그걸 배준식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평소 배준식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저는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21살 청년 배준식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너무 기계처럼 살았던 거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만, 팬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요. 이전에는 나는 프로게이머니까 게임만 잘하면 된다였는데, 그런 마인드가 좀 많이 변했어요. SNS를 자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하지만 원체 낯을 가리다 보니 쉽게 바뀌진 않아요."

"팬들이 저를 너무 우상처럼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지금까지 제가 이룬 것들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요. 그거와는 별개로 편한 친구처럼 대해줬으면 좋겠네요. 때로는 엄격한 잣대에 힘들지만, 그게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리다는 핑계로 넘어가고 싶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상상 이상으로 영광스러워요. 대회에서 우승하고, 관심을 받게 되고 팬들이 응원해주는 모든 것들이 영광이에요. 솔직히 아직도 저를 아이돌처럼 대하는 게 적응이 안 돼요. 제 솔직한 마음인데, 게임 대회 몇 개 우승했다고, 고귀한 존재처럼 저를 대하는 팬들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요.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사진 : 박채림(tti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