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까지만 해도 CDPR의 카드 게임 '궨트'의 한글화가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3월 공식 트위터를 통해 한글 버전 테스터를 모집하고 있었고, 4월 13일 팬미팅을 통해 한글판 궨트의 상세한 정보가 밝혀질 예정이었다. 국내의 궨트 팬들도 한글화에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CDPR은 별안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향(홈커밍)'을 발표했다. 6개월의 개발기간 동안에는 패치와 밸런스 조정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궨트는 '완벽하진 못해도 썩 잘 만든 카드 게임'이었다. 그대로 한글판을 발매해도 문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CDPR은 과감하게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홈커밍' 궨트는 완성도를 떠나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뜯어 고쳤다'. CDPR은 왜 그럭저럭 굴러가던 궨트를 처음부터 재설계한 것일까?


궨트의 시작 : 보드 게임 콘도티에르


▲ 위쳐 3의 미니게임 궨트

궨트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쳐3'의 미니게임 궨트를 생각할 것이다. 궨트의 시작을 '위쳐 시리즈'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재는 1995년 발매된 보드게임인 '콘도티에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궨트와 콘도티에르는 여러모로 유사점이 많다. 궨트와 콘도티에르 모두 라운드 방식으로 게임이 진행되고 카드의 숫자를 비교해 높은 쪽이 승리한다. 단판이 아니라 여러판을 걸쳐 승점을 가져간 플레이어가 승리하기 때문에, '전략적인 패배'가 중요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반면 위쳐의 궨트는 PVE 게임으로 1:1로 이뤄지며 전투가 더 복잡하다. 팩션별로 개성 있는 카드와 팩션만의 능력이 따로 존재하며 리더의 능력을 이용해 게임에서 변수를 만들 수도 있다. 자신만의 덱으로 상대와 1:1 대결을 펼친다는 점에서, 궨트는 보드게임인 콘도티에르를 카드 게임인 TCG로 치환했다고 볼 수 있다.

위쳐 3의 미니게임으로 시작한 궨트는 예상외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위쳐 3의 DLC '블러드 앤 와인'에서 궨트 카드가 없냐는 질문이 쇄도할 정도였다. 미니게임이었지만 나름의 게임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 보드 게임 콘도티에르의 최근 판본(출처 : Z-Man Games)


"저 독립할께요" 자체 타이틀을 선언한 '궨트'



미니게임 궨트의 인기에 힘입어 2016년 6월 14일 E3에서 궨트 개별 작품 출시가 공식화됐다. 위쳐와 한식구였던 궨트가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2017년 5월 24일부로 자체 타이틀 궨트의 오픈 베타가 시작되었다.

위쳐3의 부가 요소였던 PvE 미니게임 궨트는 '하스스톤'이나 '매직 더 게더링'처럼 1:1 온라인 대전 CCG로 탈바꿈 하게 된다. 초기 궨트는 미니게임을 기반으로 기본적인 덱 구성과 일러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깊이 있는 플레이를 위한 조치가 있었다. 미니게임의 팩션에 특징을 부여하고 변화를 주어 전략성을 강화했다. 미니게임의 '괴물' 진영과 자체 타이틀의 '괴물' 진영은 비슷한 듯 다른 운영이 필요했다. '굴리는 맛'이 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했다. 미니게임에서는 밸런스를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미니게임 궨트와 그 모티브가 된 보드게임 '콘도티에르'에서 카드 승부는 공정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승패에 따라 보상이 갈리는 1:1 대전에서는 다르다.

온라인 대전 게임으로 궨트의 룰을 살펴보자. 초기 궨트는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이 없는 게임이었다. 내 턴에 카드 한 장을 내는 것이 플레이의 전부다. 상대 플레이에 개입할 수단이 많지 않고 무조건 선공과 후공이 번갈아 카드를 내기 때문에 마지막에 카드를 내는 후공이 카드 1장만큼 이득을 가져가게 된다.

예를 들어 상대 열의 전력을 모두 1로 만드는 미니게임 궨트의 '살을 에는 서리' 카드를 후공 플레이어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다가 사용한다면 선공이 어떤 플레이를 해도 패배할 수 있다. 선공부터 카드를 내기에 같은 매수의 패를 가지고 있다면 마지막에 카드를 내는 사람은 언제나 후공이다. 선공은 상대가 서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3열에 카드를 나눠 배치하는 정도밖에 못한다.

극단적인 예시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 때문에 궨트의 오픈베타 기간 동안 선공과 후공의 카드 어드벤티지(CA)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전략이 연구되었다. 리더 능력을 이용해 1턴에 높은 전력을 맞춰놓고 턴을 패스해버리는 스윙 패스 전략, 아예 1턴 게임을 그대로 포기해서 선공의 카드 손해를 회수하는 드라이 패스 전략이 그 예다. 하지만 이런 전략들에도 근본적인 선/후공의 불리함은 해결하지 못했다.


▲ 선공이라는 이유로 1라운드를 패스(패배)해버리기도 한다


CDPR은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기 위해 1년 가까운 오픈 베타 기간동안 카드 자체를 갈아엎는 패치를 여러 번 단행하며 효과를 싹 교체하는 등 많은 시도를 한다. 카드 한두장을 바꾸는 단순한 밸런스 패치가 아니라, 팩션에 관련된 카드를 싹 바꿔버리는 대규모 패치였다. 어제까지 사용하던 스코이아텔 주문 덱이 하루아침에 '멀리건' 덱으로 바뀌는 식이다.

카드 두 장의 효과가 서로 바뀌거나 리더 능력이 전면 개편되었고, UI도 새롭게 만들었다. 잠복 후 상대 유닛에게 피해를 주는 효과를 가진 실버카드 '모렌'은 7번이나 효과와 능력치가 수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궨트의 문제는 해결됐을까? 아니다. 선공은 여전히 불리하고 상호작용 없는 자기 플레이만 하는 소위 '벽 덱'이 유행했으며 일부 매치에서는 아예 시작부터 승패가 정해지기도 했다.


▲ 리워크 과정에서 서로 효과가 뒤바뀐 카드도 있다(출처 : 궨트 DB)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홈커밍 '궨트'



CDPR은 전면 개편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CDPR이 내건 홈커밍의 모토는 '궨트로의 귀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궨트의 귀향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콘도티에르와 미니게임 궨트에서벗어나는 과정이었다.

CDPR이 미니게임 궨트를 온라인으로 바꾸며 해왔던 시도는 결국 PVP 게임이 될 수 있는 '공평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베타 기간 동안 대규모 패치를 몇번이나 반복한 이유다. 이후 6개월이 지나 2018년 10월 23일, 우리가 아는 '쓰론브레이커'와 '홈커밍 궨트'가 발매되게 된다.

홈커밍 궨트는 어떤 모습일까? 홈커밍 패치의 큰 골자는 미니게임 궨트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라 봐도 무방했다. 미니게임 궨트의 큰 요소였던 팩션별 능력, 3개의 라인, 보드를 제압하는 날씨, 각종 카드에 내성을 가진 골드 카드 등의 모든 요소는 베타에서 수정을 거쳐 홈커밍 궨트에서 완전히 삭제 된다.


▲ 바둑의 '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궨트의 '전술적 우위' 카드


또한 항상 궨트의 발목을 잡아왔던 선/후공의 문제를 해결 하고자 선공에게 각종 이점을 주게 된다. 하스스톤의 '동전 한닢'처럼 선공에게 특수한 카드인 '전술적 우위'를 주게 되었다. 또, 선공이 1라운드를 승리하고 2라운드를 내주는 '드라이패스'나 를 금지하고자 손패 제한을 만들고 남는 카드를 태워버리도록 했다.

특히 라운드 드로우를 늘려 유저가 1라운드에 강한 전력을 만들고 패스하더라도 2라운드와 3라운드를 거쳐 최대 6장을 드로할 수 있기 때문에 적은 손패로 빠르게 힘을 높이고 패스하는 '스윙 패스' 전략도 어려워졌다. 기존 궨트에서 초반 카드 어드벤티지 2장의 차이는 절망적으로, 초반에 차이가 벌어지면 이후로는 어떤 플레이를 해도 게임에서 지곤 했다. 하지만 현재는 후반 게임까지 해봐야 승부를 알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외에도 덱에서 카드를 가져오는 서치 카드와 카드 어드벤티지를 주는 스파이카드 삭제, 보드게임판 수정, 게임에 너무 큰 영향을 주던 리더 카드의 개선 등 많은 변경이 이뤄졌다. 현재의 홈커밍 궨트는 위쳐 시절 궨트와는 다른 게임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 초창기에는 카드 제작과 덱만들기가 분리되어 있어 불편했다(궨트 유투브 캡처)

▲ 홈커밍에서 개선된 인터페이스의 모습


보드게임에서 CCG 게임으로… 궨트의 미래는?

6개월의 재정비 기간을 가지고 '귀향'을 선언해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온 궨트. 새롭게 돌아온 홈커밍 궨트는 미니게임 궨트처럼 자기할것만 하면 끝나는 일방적인 솔리테어류 게임이 아니라, 양쪽 플레이어가 자신의 덱과 보드를 가지고 싸움을 펼치는 대전 게임으로 돌아왔다.

궨트는 근본적으로는 보드게임 콘도티에르의 영향을 받은 게임이었다. 미니게임 시절 콘도티에르의 카드를 그대로 가져오는 등 콘도티에르의 기본 게임 요소들을 많이 흡수했다. 하지만 궨트와 콘도티에르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다수의 사람과 둘러앉아 게임하는 보드게임과, 온라인으로 상대와 1:1대결을 펼치는 CCG라는 차이다.

홈커밍에서는 '명령' 효과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상대 보드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고,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진 리더 효과로 게임에 변수를 만들어 냈다. 또, 손패 제한을 설정해 1, 2라운드에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 높은 전력을 만들고 패스하거나 2라운드를 그대로 넘겨버리는 전략을 방지했다. 좀 더 수를 주고 받는 상호작용이 가능해진 셈이다.

현재 궨트의 대전환경은 과거 날씨를 기반으로한 '주문 스코이아텔'처럼 보드를 관리하는 컨트롤 류 덱이 등장하는 등 전력과 템포 중심의 메타에서 수를 주고 받는 중후반 메타로 흘러가고 있다. 선/ 후공의 격차에서는 선공이 유리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과거 궨트보다 나아졌다는 분위기다.

아직 모든 문제점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궨트 특유의 정해진 '정석' 대로 플레이하는 고착화 문제는 여전하다. 첫 손패가 많고 '운보다 실력'을 강조하는 궨트에서는 무작위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매판이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어렵다.

홈커밍으로 재단장을 마친 궨트. 궨트가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궨트와 CDPR이 바라는 '초심으로의 귀향'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 초창기 궨트부터 현재의 궨트까지 '에레딘' 카드의 변화(사진 출처 : 궨트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