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게임즈가 불을 지폈던 PC 게임 시장의 수수료와 밸브-스팀의 독점 논란. 사그라든 불씨가 더 크게 타오를 장작에 불이 붙었다. 단순히 독점 문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게임 시장의 가격 책정 문제가 수면 위로 대두하리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시작은 밸브를 대상으로 한 집단 소송이다.


지난 28일 밸브가 게임플랫폼 스팀의 PC 게임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 게임의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다른 플랫폼의 시장 진입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게이머로부터 집단 소송을 당했다. 밸브 외에도 CD프로젝트, 유비소프트, k챔프 게임즈, 러스트, 디볼버 디지털 등 총 6개 기업이 피고로 지정됐다.

미국의 대형 로펌 보리스, 세이터, 시모어 앤 피즈(Vorys, Sater, Seymour and Pease LLP)는 션 콜빈, 에버럿 스티븐스, 라이언 랠리, 수잔 데이비스, 호프 마케다 등 게이머 대표로 나선 5명을 대신해 캘리포니아 중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소송을 진행한 소송대리인단 대표 토마스 맥코믹은 밸브 코퍼레이션이 스팀의 지배적인 플랫폼 지위를 통해 경쟁 플랫폼들이 더 나은 가격을 통한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특히 그는 밸브가 흔히 최혜국 대우로 알려진 MFN(Most favoured nation) 계약을 통해 가격 경쟁을 원천 차단했다고 주장했다.

송장에 따르면 게임사는 스팀과의 MFN 계약에 따라 다른 게임 플랫폼의 가격과 스팀 판매 가격을 동일하게 유지해야 했다. 또한, 게임사가 다른 플랫폼과 스팀에 동일한 가격으로 게임을 출시할 경우 시장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가진 스팀이 우위를 가지는 반독점 행위라고 지적했다.

주장에 따르면 스팀의 경쟁 플랫폼 외에도 게이머 역시 불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게임사가 모든 플랫폼에 같은 가격으로 게임 판매가를 책정할 경우 낮게 판매할 수 있는 경쟁플랫폼 가격이 아니라 수수료 30%를 내야 하는 스팀 기준 가격으로 판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게이머는 기업 간의 경쟁을 통한 가격이 아니라 경쟁 시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격 이상의 비용(Supracompetitive Prices)를 지불해야 한다.


밸브는 게임 판매 금액의 30%를 기본 수수료로 받는다. 2018년 10월 1일을 기준으로 대형 개발사를 품기 위해 시행된 새 기준을 통해 1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게임에는 25%, 5천만 달러 이상 수익 게임은 20%의 인하된 수수료율이 새로 적용됐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하는 MS 스토어는 직접 URL을 통해 다운로드 된 게임에는 5%, 다른 판매 방식이 적용된 게임은 15%의 수수료를 매긴다. 에픽게임즈의 게임 플랫폼 에픽게임즈 스토어의 경우 12%의 수수료율이 책정되어 있다.

맥코믹 변호사는 스팀에서 10달러에 게임을 판매하면 개발자가 7달러의 수익을 올리지만, 에픽게임즈 스토어에서는 8달러에 판매해도 7.04달러의 더 높은 수익을 올린다고 주장했다. MFN이 없다면 개발사가 유저 친화적인 가격 경쟁을 시도할 수 있고 개발자 역시 더 높은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하지만 MFN을 통해 스팀과 함께 제공되는 게임의 경우 수수료율과 관계없이 스팀 가격에 맞춰 게임을 출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맥코믹 변호사는 밸브가 개발사에 MFN의 계약에 동의하도록 요구했고 이를 비밀로 하도록 체결했다고도 주장했다.

간단히 설명해 밸브가 게임사와 다른 플랫폼을 통한 가격 경쟁이 이루어질 기회 자체를 없애버렸다는 의미다. 또한, 유저들이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게임을 구매할 가능성도 주지 않는 시장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소송대리인단은 밸브의 이런 행위가 셔먼법 제1조와 제2조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소송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셔먼법은 오늘날 미국의 반독점법 핵심 법률 중 하나로 시장의 독점과 독점 기도, 독점 공모를 금지한다. 또한, 별다른 시정 조치가 없을 경우 반 경쟁적 계약을 맺도록 한 밸브와 이에 동의한 개발사들이 이런 행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다른 가격으로 게임이 판매될 때의 기대 수익

▲ 실제 마켓 가격

비밀 계약에 의해 공개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앞선 2019년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는 스팀이 가격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거부권 행사는 가격 경쟁을 방지하도록 만든다며 스팀이 아닌 에픽게임즈를 이용해야 하는 주장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낮은 수수료가 항상 게임의 가격 인하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유비소프트는 '디비전2'부터 스팀과의 관계를 정리했지만, 이후 출시된 게임들은 수수료가 낮은 에픽게임즈 스토어와 자가 게임 플랫폼 유비소프트 커넥트에서도 비슷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최근 스팀 없이 에픽게임즈로 출시된 '히트맨3' 역시 60달러(한화 64,900원)에 판매되며 낮은 수수료가 개발사 잇속만 챙길 뿐 게이머들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집단 소송에 따라 업계 분위기의 변화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미국 반독점법은 미국 3배 손해배상에 의거, 피해액의 최대 세 배를 보상해줘야 한다. 실제 소송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고 5인이 스팀을 이용하는 게임 이용자와 게임 이용자의 학부모를 대표해 소송을 제기한 만큼 거대 규모로 확산할 여지도 있다.

이들 소송인단이 대리로 내세운 보리스, 세이터, 시모어 앤 피즈가 로펌 순위 사이트 볼트에서 미 중서부 지역 로펌 10위 권 내에 꼽히는 곳인 만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루어지리란 예측도 있다.

단, 이들이 유비소프트, CD프로젝트와 함께 MFN 계약에 동의한 수많은 개발사 중 왜 k챔프 게임즈와 러스트라는 2개의 인디 게임 개발사를 피고로 지정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피고로 지정된 디볼버 디지털은 소송을 통한 법적 공방을 예고했다.

▲ 낮은 수수료가 항상 낮은 게임 가격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진은 흔히 풀프라이스라고 불리는 가격에 에픽게임즈 스토어에서 판매되는 '히트맨3'

한편 연이은 잡음이 터져 나오며 오랜 기간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 ESD) 자리를 지켜온 스팀의 문제점이 드디어 대두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앞서 에픽게임즈 스토어 출범 당시 팀 스위니 대표가 12% 수수료를 앞세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며 스팀 운영에 대한 비판이 불거졌다. 독점적 점유율을 바탕으로 과도한 수수료 비율을 매기면서도 게임사들의 이익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에픽 게임즈 스토어를 포함한 경쟁 플랫폼들이 스팀의 압도적인 편의성을 충분히 대체하지 못하고 서비스 품질 역시 밸브의 오랜 노하우를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리며 대체 스토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 또한, 독점 게임을 핵심 선전에 이용해 유저들의 비판을 사며 스팀의 아성을 따라잡을 뒷심 부족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락과 지오 블로킹 등 단일 시장을 추구하는 EU의 정책에 위반하는 서비스로 벌금을 내기도 하고 환불과 중고 거래 등 각 지역에 맞는 시스템 미구축. 그리고 꾸준히 제기되는 독점법 이슈 등이 연이어 불거지며 그간 간과됐던 스팀의 허술한 제반 시스템에 의구심 역시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외 지역의 벌금이나 행정 명령에 무대응 입장을 고수한 밸브. MFN 계약과 관련한 소송으로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될지 모를 처지에 놓였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게이브 뉴웰의 리더쉽에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