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통장을 내밀었다. 천 만원 이었다. 갈비집에서 2년 꼬박 일하며 모은 돈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게임 공부를 하겠다는 아들의 선언. 강한 생활력으로 가족을 이끌며 가장 역할을 도맡았던 어머니는 아들의 이른 퇴직 선언에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그런데 안진용 씨는 뻔뻔했다. "천 만원을 드렸으니, 7백을 투자해주십시오." 게임 공부를 하는데 필요한 학비 명목이었다. 남은 300만원은 또 공부하는 동안 쓸 생활비 조로 못박아두었다. 결국 어머니께 드린 돈은 없는 셈이었다.


식당일은 고되었다. 그래도 계속 할 생각은 있었다. 단조로운 생활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안진용씨의 일과는 조금 달랐다. 아침 일찍 식당에 출근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한다. 밤 늦게 일을 끝낸다. 그 후가 달랐다. 수면 시간이 하루 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남들이 잠을 잘 때 그는 게임을 했다.


하나에 몰입하는 끈질긴 성격은 가끔 다른 생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주경야겜(晝耕夜Game)의 생활을 2년 동안 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이렇게 게임을 좋아하는데, 내가 직접 게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때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그 길로 식당을 나와 2년 동안 모은 돈이 든 통장을 어머니께 드리며 게임 공부를 하겠다 선언한 것이다.




개발자이야기를 시작하며


오늘도 새로운 게임이 하나 세상에 나온다. 게이머인 우리에게는 게임이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가 관심사다. 또는 어느 게임사가 게임을 만들었냐를 두고 이야기를 한다. 엔씨소프트가 만든 게임이라면 어떨 것이라며 한층 더 기대해보기도 한다.


서비스사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한게임이 서비스 하기 때문에 어떨 것이라고. 유명 개발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본다. 송재경 씨 정도 되는 사람이 개발하는 것이니까, 하고 운을 떼기도 한다. 그래서 신작 인터뷰를 할 때 PD, PM, 대표분들과 만나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기자로 많은 개발사를 찾아다니며 느낀 점은, 게임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멋진 그래픽과 화려한 간판이 조명받는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나눠주고 싶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표나 스타개발자보다는 우리 주변의, 우리의 모습과 가까운 이들. 우리와 마찬가지로 게임을 좋아하고 게임을 즐겨 플레이하는 이들. 다만 하나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게임을 즐기지만 이들은 게임을 만든다는 것.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조금씩 하려고 한다.


이번에 만난 개발자는 신생 개발사 엔비어스에서 일하고 있는 안진용 콘텐츠 파트장. Gump 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 그를 만난 것은 엔비어스 사무실 근처 양꼬치 집에서였다.



▲ 너무 맛난 집이었다.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사진은 구글 검색으로 대체




"10년 전 천만 원이면 작은 돈은 아니죠."

"다른 것보다 그만큼 각오를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돈을 그냥 드린 것은 아니잖아요. 공부하는 비용이랑 생활비조로 드린 거니까요."

"그 돈은 나중에 어뗗게 되었어요?"

"어머니들의 마음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몇 년 있다가 결혼하는데, 슬그머니 그 때 드린 통장을 꺼내주시더라고요. 손 하나 안대고 갖고만 계셨던 거죠."


부모님의 허락은 받았지만, 게임 개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진용씨가 갑자기 게임을 만들 수는 없었다. 우선은 어떻게 게임을 만드는 지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 마침 당시에는 막 KGCA라는 게임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때였다. 진용씨는 KGCA 1기로 게임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몰입했어요."

"식당 일 할 때 잠도 참고 게임하실 정도니 원래 한 번 파고들면 몰입하는 성격이신가 보네요."

"네 사실 좀 그런 게 있어요. 게임을 많이 하지는 않거든요. 대신 한 번 손에 잡은 게임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려요. MMORPG를 해도 내가 최고의 위치에 올라야 직성이 풀리고. 흔히 지존이라고 하잖아요."

"최근에는 어떤 게임을 하셨어요?"

"일이 바빠지고 나서는 그렇게 게임을 많이 하지는 못하게 되더라고요. 와우도 지난 번 확장팩때는 레이드 올킬까지 하고 했는데, 이번 대격변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고 해서 레벨업만 하다 말았고요. 아! 최근에 인피니티 블레이드는 끝판 왕을 두 번 죽였어요. 모든 무기 다 사고, 무한의 검 휘두르면서, 이제는 두 방에 죽일 수 있네? 하면서 좋아하고 그랬죠."


이런 성격의 도움이 컸는지, 결과도 좋았다. 2002년 1회가 열린 한게임 창작 게임 공모전에서 그의 팀이 대상을 수상한 것.



▲ KGCA 출강을 하고 블로그에 올린 사진 중에서...



그는 오늘을 있게 만들어 준 KGCA에 감사하는 마음이 아직 있다고 했다. KGCA 원장님을 존경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게임 아카데미에 강의를 나간다고. 연차를 써서라도 강의 시간을 낸다. 1기 선배의 책임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제가 굉장히 잘 하는 줄 알았어요."


300개 가까이 되는 출품작 중에서 1등을 하고 나니 게임사 입사의 길이 열렸다. 당시는 아직 우리나라에 패키지 시장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던 시절. 조이맥스에 들어간 진용씨는 이후 3개의 신작 패키지 게임을 더 개발하게 된다.


이후 조이맥스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실크로드 개발팀에 투입되면서 온라인 게임 개발에 발을 담그게 된다. 굉장히 잘 하는 줄 알았던 생각이 깨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 2003년, 실크로드의 개발초기부터 몸을 담았던 그는 실크로드 서비스가 시작되고도 한참 동안을 함께 했다. 결과적으로는 흔히 얻기 힘든 MMORPG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개발과 런칭 그리고 이후의 라이브 서비스까지의 경험을 얻게 되었다.


"작년에 블로그에 올리신 실크로드 개발후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보통은 그렇게 게임의 개발과정이나 라이브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지는 않거든요."

"일종의 포스트모템이었죠. 게임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써 이런 내용들을 정리해서 뒤에 온 분들과 공유하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 게임사들은 이런 경험들에 대한 공유를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사내에서 포스트모템을 만든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요. 그래서 지금 개발하고 있는 게임은 포스트모템을 위한 내용을 개발단계에서부터 정리하고 있어요."



▲ 어떻게 보면 민감한 속사정이지만 하나 하나가 소중한 노하우다.



"어떻게 보면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회사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는 것이니까요."

"그렇게까지 민감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어떤 부분을 블로그에 쓸 건데 나가면 안될 것 같은 내용이 있으면 미리 여쭤봐요. 그래서 자체적으로 거르기도 하죠."

"그래도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굉장히 편하게 회사 이야기를 하시는 느낌이었거든요.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거나 좋은 개발자를 소개시켜주는 일들도 하는 것 같고요."

"그냥 제가 아는 분들이 조금 있어서 그런 거죠."




농구를 좋아한다는 키 큰 진용씨는 스스로의 성격을 낙천적이라고 설명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뭐 어떻게 되지 않겠어?'하는 편이라고. 블로그를 통해 보여지는 그의 모습들을 스스로는 '그런 척, 뭔가 있어보이는 척'하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과 함께 요즘 그의 블로그에 자주 오르는 진솔한 이야기는 '척'으로만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요즘에는 새로 몸 담은 신생 개발사 엔비어스에 대한 이야기가 블로그를 채워나가고 있는데, 거의 엔비어스 공식 홍보블로그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저는 워낙 예전부터 블로그를 해왔고, 제 삶을 블로그에 담아왔던 것 뿐이에요. 지금은 엔비어스에 있으니까 그냥 회사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뿐이죠."


엔비어스는 '노아'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알려진 신생 개발사.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2 프로그램 팀장, 서버 팀장을 역임한 이찬 기술이사 등 엔씨 출신 개발자들이 포진되어 있으며, 넥슨에서 유무선 연동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김준성 씨가 대표로 있어 신생업체임에도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진용씨는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종이를 하나 꺼내보였다. 혹시 기자가 신작 게임에 물어볼까 싶어 적어왔단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프로젝트 노아는 언리얼 엔진으로 만들고 있는 Full 3D MMORPG로 현재 45명 정도가 개발하고 있으며 알파 버전의 개발이 완료되었다. 나중에는 PC와 모바일을 넘나드는 게임 연동도 고려하고 있다. 일단은 그렇단다.



▲ 엔비어스가 개발하고 있는 신작 MMO, 프로젝트 노아





"새로운 회사에서 일하는 건 어떠세요?"

라고 으레 하는 질문을 하자, 얼굴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회사 자랑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사내 세미나를 하는데 예전에 다른 회사에 계셨던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로웠대요. 점심시간에 뭘 먹어도 과감하게 지원해주고 그랬는데 사람이 늘어나면서 식권을 주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구내 식당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게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회사가 나에 대해 관심을 덜 가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회사는 그런데 먹을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해줘서 좋아요."


"최근의 고민은 리소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거든요. 맵이나 퀘스트에서 적은 리소스를 어떻게 대량으로 활용하면서도, 유저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팀장님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것도 좋고요. 다들 말로만 횡적이라고 하는데 정말 지금 회사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낼 수 있는 회사예요."


수평적인 회사 의사소통 구조와 게임을 개발할 때 어떻게 동시에 프로젝트를 진행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느냐에 대한 공감. 그리고 먹거리는 든든하게 챙겨주는 분위기. 무엇보다 회식을 해도 게임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즐겁게 이어지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알파 버전 개발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규모 작업에 들어가는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 노아. 콘텐츠 파트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진용씨와의 자리를 마무리해야 했던 것은 계속 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팀원들의 작업을 체크해줘야 하는데, 붙잡아두면 사무실의 다른 팀원들이 퇴근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모두 퇴근하고 몇 명 남지 않은 엔비어스 사무실로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다음을 기약했다. 만나보면 좋을 다른 개발자 분들을 추천해달라고 졸라 몇 분의 이름을 얻었다. '와우 같은 게임 만들기'였나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고 하나 해주기로 약속도 했다.


흔히 개발자들은 기자를 만나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혹시 잘못 꺼낸 한 마디가 기사화되어 회사의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줄까봐, 아니면 비밀리에 개발중인 신작 게임의 정보가 새어나갈까봐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차마 기사에 담기 힘든 이야기들도 술술 흘러나왔다. 오랜 기간 블로그를 운영하며 제 나름의 적절한 공개수위를 감지해 낸 진용씨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건 기사로 안 써요" 하며 손사레를 친 기자의 순진한 표현이 먹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을 기울이는 공간에서는 어디서든 그런 마법이 부려지는 때문일지도.


하지만 마법에는 기억상실이라는 작은 부작용이 있다. 이 날 나눴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여기 다 옮기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한 때는 갈비집 점원. 지금은 두 딸의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 행복하냐는 질문에 기꺼이 "그럼요."라는 대답이 따라나왔다. 기자가 기억하는 모습은 바로 그 대답을 듣기 직전이다. 진용씨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이미 너무도 해맑게 웃어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