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콘텐츠를 접하는 것은, 외국에 나갔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먹을까 말까 고민부터 시작해서, 처음 보는 음식인데 맛이 이상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익숙한 음식들을 먼저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맛에 실패할 확률이 적고 일단 먹어봤으니 거부감도 덜하니까요.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로 무장한 게임이 재미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을 치겠지만, 최악의 맛으로 기억되는 생소한 음식처럼 실패한 게임이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비슷한 상황이라면 익숙한 콘텐츠에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춘 게임들을 먼저 찾게 됩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최신 게임이라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로 무장한 게임은 흔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콘텐츠로 모험을 시도하다 대중에게 외면받기보다는 이미 재미가 검증되고 성공한 요소들을 재가공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게다가 게임의 역사도 오래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는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성공한 요소들을 잘 조합해서 완성도까지 갖춘 게임들은 맛있는 비빔밥과 비슷합니다. 독특하거나 새로운 재미는 없지만 언제나 평균치 이상의 재미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도는 물론 익숙한 콘텐츠들을 조합하는 것 역시 뛰어난 게임사가 있습니다. 최근 골판지 전기를 출시한 일본의 레벨 5(LEVEL5) 입니다.

레벨5는 퍼즐과 퀴즈를 결합한 '레이튼 교수' 시리즈나 이나즈마 일레븐(국내명 썬더 일레븐)과 같은 특이한 장르의 게임은 물론,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요소를 잘 조합해 완성도 높은 게임들까지 제작하면서 인기를 모았으며, 최근에는 건담 AGE의 제작까지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회사입니다.


게임 하나를 내 놓을 때마다 다양한 연령층에 사랑을 받아 높은 판매고를 올려서 레벨5는 현재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해마다 레벨5 자체적으로 대규모 신작 발표회를 개최하면 수 많은 관계자들이 몰려오며, 동경게임쇼에도 남부럽지 않은 대형 부스를 한복판에 설치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 골판지 전기 플레이 영상



레벨5의 PSP용 신작 골판지 전기가 인기 몰이중


그런 레벨5에서 여러 번의 발매 연기 끝에 지난 6월 16일 PSP용 신작 골판지 전기(ダンボール戦機)를 출시하였습니다. 골판지로 된 상자 안에서 LBX(Little Battler eXperience)라고 불리는 소형 로봇들이 각종 무기를 장비하고 승부를 겨룬다는 내용의 액션 RPG입니다.


LBX는 코어 스켈레톤이라는 기계 로봇 뼈대 위에 팔다리와 몸통을 붙이고 무기를 쥐어 주면 완성되며, 전투를 거듭할 수록 경험을 쌓아 성능이 상승합니다. 각 부품이나 무기는 상점에서 구입하거나 전투 보상 또는 퀘스트를 통해 입수하게 되죠. 이런 것들을 조합하여 입맛대로 자신만의 LBX를 꾸밀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대전을 하거나 LBX와 장비품 수집의 재미를 맛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프론트 미션 시리즈나 아머드 코어 시리즈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로봇의 부품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로봇을 만드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한 능력치나 스킬 등의 배분 문제로 머리를 쥐어짜야 했는데, 골판지 전기에서는 그런 어려운 부분을 최대한 간소화하여 적당히 머리/몸통/팔/다리의 조합으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전투를 강화하여 일본식 RPG처럼 공격이나 방어와 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LBX를 조작하여 필드 위에서 달리면서 쏘고 베는 액션이 뛰어납니다. 전투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연출 기법과 스피드감, 경쾌한 타격음으로 손맛이 쏠쏠하면서도 조작이 간편합니다. 전투가 어렵다면 PSP의 무선 통신 기능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친구를 불러서 같이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골판지 전기는 세계관과 캐릭터를 빼면 새로운 콘텐츠나 도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판지 전기는 현재 일본에서 속칭 '잘 나가는' 게임 중 하나입니다. 발매 첫 주에 16만 장 정도가 판매되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초회 물량 30만장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기자도 겨우겨우 패키지 하나를 손에 넣었을 정도입니다.



▲ 프라모델이 들어 있는 골판지 전기 게임 패키지



골판지 전기의 성공 비결은 잘 버무려진 콘텐츠


레이튼 교수나 이나즈마 일레븐 등 DS를 주력으로 삼아 왔던 레벨5가 PSP로 처음 도전한 골판지 전기가 이렇게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검증된 콘텐츠를 충분한 완성도로 조합한, 맛있는 비빔밥같이 편안하고 익숙한 재미를 주는 게임성과 2차 산업, 그리고 2차 산업이 자라날 수 있는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골판지 전기는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을 잘 버무린 게임입니다. 골판지 전기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라이벌을 만나고 각종 고난을 겪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일명 소년 만화 스토리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적이 아군이 되고 믿었던 아군이 적이 되는 반전이나 중요한 인물의 희생 등 전형적인 틀에 딱 맞아 식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친숙함을 주기도 합니다.


기존 게임들의 시스템 재활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미니카의 조립과 개조를 로봇의 조립과 개조로 바꾸고, 상점에서 부품이나 트레이딩 카드를 사고 팝니다. 배경이 미래라는 점만 빼면 과거와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이 역시 새로운 게임에 대한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줄여줍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복잡한 아머드 코어 시리즈와는 달리 조작도 매우 간편하고 LBX의 파츠 조합도 조금만 생각하면 됩니다. 복잡한 점이 있다면 LBX 내부의 모터와 전지 등을 연결하는 심시티 형식의 코어 파츠 조합 정도겠지요. 그러니 저연령층이라도 어렵지 않게 게임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2차 사업과 함께 하는 골판지 전기 프로젝트


한편으로 골판지 전기는 2차 캐릭터 산업에도 충실합니다. 게임 외에도 원작과 같이 LBX의 프라모델과 TCG도 판매하며, TV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방영하고 또 이것을 DVD로 출시합니다. 애니메이션이 나왔으니 당연히 코믹스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주제가나 배경음악도 따로 판매됩니다.



말 그대로 골판지 전기를 둘러싼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성공의 공식을 이용하여 누구나 친숙하게 접할 수 있고, 다양한 대중 매체를 통해서 홍보하면서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상호 발전합니다. 여기에 반다이와 같은 프라모델 전문 기업이 참가하여 LBX에 외장과 무기만 바꾸는 것이 현실로 구현되는, 하나의 프로젝트 덩어리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 프라모델로 구현된 파츠 커스텀(출처 : 반다이 공식 홈페이지)



게임과 프라모델 사업이 손을 잡았을 때


골판지 전기의 여러 협력 사업 분야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프라모델 사업입니다. PSP로 발매된 골판지 전기의 모든 패키지에는 반다이에서 제작한 주인공의 첫 LBX 프라모델이 포함되었습니다. 골판지 전기의 최초 출하량은 30만개 정도였고 모든 패키지에 프라모델이 포함되었으며, 현재 물량이 부족할 정도라고 한다면 적어도 20만개 이상의 패키지(=프라모델)가 팔린 셈입니다. 상당한 판매량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같은 기체라고 해도 NG(normal grade)/HG(high grade)/MG(master grade)로 등급을 나누어 성능이 변합니다. 이 등급은 반다이 프라모델의 등급 분류와 사실상 같습니다. 실제로 이미 몇몇 LBX는 프라모델 판매가 시작되었고 여기에 각 등급마다 다른 컬러의 모델을 출시한다고 가정하면 프라모델 금형 하나로 속칭 색놀이라 불리는 색깔만 바꾼 다른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프라모델 패키지 안에 들어 있는 패스워드를 게임 내에서 입력하면 구입한 기체를 게임 내에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SD건담 캡슐파이터에서도 일부 채용된 판매 방식입니다. 즉 처음부터 게임과 프라모델 사업의 동시 전개를 깔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 PSP로 구현된 비교적 깔끔한 3D 그래픽



게임에서 시작된 2차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과거에는 게임이나 코믹스가 성공하면 그것과 관련된 2차 사업이 하나둘 등장하는 일이 많았지만 골판지 전기는 아예 처음부터 다방면 사업 전개를 목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2차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의 시행착오나 시간 소비 없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갑니다.



이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회문화 분야에서 이것을 흡수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된 소비자층이 필요합니다. 일본의 경우 수 십년에 걸처 서브컬쳐 문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다방면에서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인구도 일정 이상 확보한, 즉 충실한 소비자층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시장 규모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물론 한꺼번에 여러 사업을 동시에 진행할 때는 위험부담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참가하는 만큼 기업간 업무 조율이라던가 파워 게임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소비자의 취향과 예상 판매량의 순익 및 출시 후 사업 전개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 다양한 분야로 사업이 전개중인 골판지 전기



그렇지만 골판지 전기 프로젝트에서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전작 이나즈마 일레븐의 경험을 살려 상당 부분 해소한 것이 보입니다. 이나즈나 일레븐에 등장인물이 많아 팬들이 분산된다는 지적을 수용하여 주인공급의 숫자를 줄인 대신 개성을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성공한 타이틀의 후속편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세계관이 너무 방대해지거나 수습하기 어려워지는 경우에 대비해서 속편 제작을 가정하고 설정이나 게임 규모들을 조정해 놓은 것을 게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요소를 잘 활용한 게임의 성공과 국내 시장의 발전 가능성


이렇듯 골판지 전기는 구매자의 심리 기호 파악부터 2차 사업 확대 및 프랜차이즈 지속까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제작된 상품입니다. 위험을 감수한 새로운 시도는 비교적 적고 안정성이 높은 콘텐츠로 구성된 프로젝트입니다. 무조건 새로운 것, 지금까지 없었던 것만을 무리하게 시도하는 것보다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드는 반면 성공 가능성은 훨씬 높습니다.



▲ 게임 내 영상은 애니메이션판보다 품질이 높습니다


한국도 이처럼 활발한 시장이 생겼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2차 사업이 활발하거나 구매자층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나즈마 일레븐이나 포켓 몬스터 혹은 메탈 베이 블레이드의 성공적인 정착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시장 가능성이 있으니 프로젝트형 연계 사업을 시작해 보는 것도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시도일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게임 제작 산업이 내리막길로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튼실한 내수 시장과 협력 프로젝트로 하나씩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몇년 전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 프로젝트 역시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골판지 전기와 같은 협력 사업이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도 메탈 베이블레이드같이 애니메이션과 완구산업이 협력을 하는 모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보다 내수 시장이 적다고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게임 자체만의 사업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연계를 통해 상호 발전하고 사회적인 시선도 바꿀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