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다이남코 스튜디오 효도 타케후미 부장

흔히 유저들에게 박제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아카이브는 개인 및 단체가 활동하며 남기는 수많은 기록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여 보관하는 장소, 또는 그 기록물 자체를 이르는 일컫는 말이다. 각종 관공서, 방송국, 회사, 병원 등의 기록물 보관실이 대표적인 사례다.

비디오 게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게임의 역사는 30년에서 40년 정도로 다른 미디어나 매체, 전통적인 놀이들에 비해서 상당히 짧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왔다. 아주 간단한 2차원 도형과 룰로 구성된 '퐁' 같은 게임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한 그래픽과 효과, 음향을 갖춘 데다가 심지어 현실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은 VR에도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 내에 이런 것을 담아내는 것이 가능해졌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게임 안에 넣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 시장 초창기에 개발자들은 게임은 어떻게 만들었으며, 또 앞으로 어떤 게임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왔을까? 반다이남코의 효도 타케후미 미래디자인 부장은 83년 남코 입사 이후로 약 25년 간 기획, 로컬라이제이션, 해외사업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일을 해왔고, 지금은 그 이전의 기록부터 당시의 기록,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로 합병된 이후 현재까지의 기록까지 아카이브로 보관하는 일을 도맡고 있다. 효도 부장은 이번 CEDEC 2018에서 남코 시절의 초창기 기획안과 아카이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개했다.




▲ 2006년에 반다이와 합병되기 전의 남코의 역사

효도 부장은 2006년 반다이와 합병되기 전의 남코에 대해서 짤막하게 짚고 넘어갔다. 1950년대 설립된 남코는 초기엔 백화점 옥상 유원지에 들여놓을 시설과 설비를 개발하고, 이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그러던 중 1972년 아타리의 '퐁'이 출시되고 인기를 끌게 되자 남코는 아타리의 일본 지사인 아타리 재팬의 지주회사가 되는 대신 아타리의 일본 진출을 돕기로 협약을 맺으면서 게임 업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이후에 팩맨을 개발하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에 진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후 1980년 '팩맨'을 출시하면서 남코는 본격적으로 비디오 게임 시장에 진출했다. 단순하면서 귀여운 캐릭터들과, 스테이지에 있는 장애물과 적을 피해서 모든 걸 먹어 치운다는 간단한 컨셉은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효도 부장은 '팩맨'의 비화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소개했다. 원래 하키 퍽에서 따왔기 때문에 퍽맨(Puckman)이었지만, 미국에 이 게임을 소개할 때 이름이 이상하게 쓰일까 우려를 했던 것이다. 하키 퍽에서 따왔다는 걸 그들이 더 잘 알 수도 있지만, 한 글자를 바꾸면 욕이 되는 모호함 때문에 결국 영문 이름을 '팩맨'으로 바꾼 것이 현재 알고 있는 팩맨이라고 설명했다.

▲ 초기 기획엔 '퍽맨'이었지만, 해외에도 팔기 위해서 이름을 '팩맨'으로 수정했다

'팩맨'을 만든 이후 남코는 본격적으로 비디오 게임을 출시한다. 여기에 1980년대 닌텐도에서 만든 패미콤이 등장하면서 가정용 비디오 게임에도 진출하기 시작했고, 당시 리얼타임 3차원 CG 시스템인 '위닝그램'을 발표하기도 했다. 기술적인 한계로 실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의 3D에 대한 시도와 실패가 90년대 이후부터 등장하는 3D 게임 제작에 도움이 됐다고 효도 부장은 회고했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출시된 '릿지 레이서'가 그 사례였다. 이후 2006년에는 반다이와 합병해 반다이남코로 사명이 바뀌게 됐으며, 현재까지 이르게 됐다.

그렇다면 남코가 게임에 관한 기록을 남겼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첫 작품인 '팩맨'을 만들었던 1980년 전후로, 지금은 도쿄공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와타니 토오루가 당시 만들었던 '팩맨'의 기획서와 '팩맨'의 게임 방식에 대한 소개서가 그 첫 문서였다. 당시에는 컴퓨터 외에도 수기나 타자기를 활용해서 문서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흔적을 '팩맨'의 기획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팩맨의 맵이나, 맵에 대한 설명 양식은 이와타니의 수기 메모를 바탕으로 직원들이 용지에 직접 그려나가면서 기획안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도 V-10 같은 초기 작품이나, 옛날에 만들었던 아케이드용 마작 게임, 기획에만 그쳤던 다양한 게임들의 문서들이 70년대 후반부터 계속 만들어져 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임은 극히 일부였지만, 남코에서는 그때의 모든 기록들을 모아서 카와사키에 있는 아케이드 기기 개발 공장의 창고에다가 차곡차곡 보관해왔다.

▲ 개발자료뿐만 아니라 당시 참고했던 레퍼런스, 그리고 회사의 행사자료도 보관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여러 차례 소실될 위기에 처했었다. 창고 자체의 유지비도 유지비지만, 80년대 이후 아케이드 게임 뿐만 아니라 가정용 게임기까지 등장하면서 게임 개발 부서가 여러 곳으로 나뉘게 됐다. 각 플랫폼마다 대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인력을 끌어모았던 만큼 조직은 더 광범위해졌고, 문서의 양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부서가 필요했다. 최초의 게임은 간단했기 때문에 기획, 프로그램 정도에서 그쳤지만 이후에는 프로그램, 사운드 개발, 비주얼 아트, 게임디자인, 프로듀스 부서 등 부서가 세부화됐고, 그만큼 생산된 문서 자료도 많았다.

여기에 개발 거점도 자주 옮긴 것도 문서를 정리하고, 보관하기 어려운 점 중 하나였다. 최초에 남코의 연구부는 오타구에 있었지만, 오타구 안에서도 3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 뒤에는 요코하마 카나가와구에 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1994년 고호쿠 구에 요코하마 크리에이티브센터를 만들면서 두 곳에서 이러한 일을 담당했다. 반다이와 합병한 이후에 2007년에 미래연구소로 합쳐졌고, 시나가와구로 이전하는 등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과정에서 이전의 개발 문서들에 대한 견해도 각각 달랐다고 효도 부장은 회고했다. 게임 개발 관련 부서에서는 게임 개발은 항상 최첨단을 추구해나가는 것인 만큼, 과거의 개발 문서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업부나 경영부에서는 기업은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과거의 유물에서 가치와 생산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효도 부장은 여러 부서 간의 회의 끝에 2015년부터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남코의 옛날 자료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이 났으며, 여러 곳에서 분할 관리하고 방치해둔 탓에 시일이 지나면 훼손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두 가지 목표는 과거 전세계의 비디오 개발을 견인해온 남코의 개발자료 보존과 활용, 그리고 지금도 콘텐츠 개발을 견인하는 반다이남코의 이모셔널 액티비티, 즉 감성적 자산을 증대하자는 것에 있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 과거의 자료를 개발, 보존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만들어지는 자료 역시도 이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얻은 노하우와 기술을 적용해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해나가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있는 인력들에게도 동기부여를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고 효도 부장은 설명했다. 개발자들은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만, 그가 직접 게임을 개발하기도 하고 또 개발자들을 관리하면서 지켜본 결과 게임 개발에는 돈 이상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요소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개발자들은 자신이 만들어간 것을 남들에게 언제라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그 모든 노력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남들이 보면서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아카이브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주도하게 된 반다이남코 스튜디오 산하의 미래연구소에서는 4대 방침을 세웠다. 첫 번째는 반영구적으로 보존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데이터베이스화, 액세스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었다. 기껏 만들고 활용이 안 되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사내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회사 외부에도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미래연구소가 제창한 방침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아카이브화의 과정은 우선 자료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남코의 개발 부서는 자주 이전했으며, 반다이와 합병되는 과정에서 소실되거나 한 자료들도 있었다. 또한 문서자료 뿐만 아니라 사진 등 다양한 자료들이 존재했다. 이를 먼저 파악하고, 분류하는 기준을 정해야했다. 이렇게 기준을 정해야만 전문 업체에서도 원활하게 아카이브화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던 만큼, 처음 약 한 달 간은 이 작업에만 매진했다.

그 뒤에는 2016년 3월 2일에 출판문화사에 발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4일까지 약 3개월 이상 걸린 이 작업에는 약 350만 엔(한화 약 3,500만 원)이 들었으며, 기존의 목록을 재정리한 것이 178상자 분량에 3,477건, 신규 목록으로 작성한 것이 188상자에 3,340건에 달했다.

아카이브화는 단순히 예전 자료를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부 중복된 자료들이나, 혹은 너무 훼손된 탓에 자료로서 가치가 없어진 것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 자료들은 폐기하고, 나머지 자료들은 정리해서 라벨링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은 약 8개월 정도 소요됐으며. 비용은 약 370만 엔(한화 약 3,700만 원) 정도였다. 라벨링한 건은 6,928건에 최종으로 보존 결정된 자료의 분량은 309 상자 분량이었다. 이렇게 라벨링 작업한 것은 액셀에 저장, 사내에서도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소유권은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에서 반다이남코 스튜디오로 이관했으며, 자료 관리 업무 또한 반다이남코 스튜디오에서 맡게 됐다.

▲ 모아서 분류한 자료들은 라벨을 붙이고, 엑셀로 리스트화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효도 부장은 사토 히데하루 프로듀서가 기획하고, 1983년 출시된 '마피(Mappy)'라는 게임이 어떤 식으로 기획이 이루어지고, 어떻게 발전하게 됐는지 설명했다. 예시를 든 이유는 효도 부장이 처음 입사했을 때 이 팀으로 들어갔던 것도 있지만, 기획서가 여러 차례 변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잘 보관되어있어서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기획이 이루어지고, 또 변경점을 반영했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효도 부장이 신입사원 시절 제작된 남코의 아케이드 게임, '마피'

마피는 생쥐 경찰관 '마피'가 주택가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뒤, 고양이 도둑 '냠코'와 그 수하들이 훔친 물건들을 되찾아가는 게임이다. 도둑과 경찰이라는 오랜 클리셰를 담았지만, 여기에 고양이와 쥐라는 관계를 도입해서 클리셰를 약간 비틀었다. 마피는 고양이들을 체포하거나 공격할 수 없고, 오히려 고양이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주택 안에 도둑들이 숨겨든 물건을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남코의 고전 게임을 망라한 타이틀 '남코 뮤지엄'에서도 수록되어있는 이 게임은 그럼 어떤 식으로 기획이 이루어졌을까? 효도 부장은 그 전에 아카이브의 분류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나는 오피셜 문서인 A군으로, 기획서와 사양서, 최종사양서, 취급설명서나 자료 등이다. V라고 붙은 것이 이에 해당하며, '마피'에는 총 7개의 문서가 존재했다. 그 중에 결재를 끝내 받지 못한 문서도 존재하고, 채택받지 못하고 수정된 문서도 존재한다. 채택받은 문서는 마피의 코드넘버에 해당하는 14가 붙어서 V14로, 채택받지 못하고 나중에 수정할 때 참고가 된 자료들은 KV27 코드로 구분해서 따로 분류했다.

▲ 문서는 총 7개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최종 채택된 것은 4개였다

사토 프로듀서가 작성한 기획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에도 컴퓨터는 있었고, 프로그래밍 작업도 진행은 했지만 대체로 문서는 앞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나, 특정 양식이 필요할 때만 제외하고 수기로 작성이 됐다. '마피'의 기획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기획자들은 일일이 펜과 자, 혹은 컴퍼스를 들고 게임 컨셉과 초안에 대해서 문서를 작성해나갔다. 물론 각 파트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 캐릭터 디자인은 어떤 식이어야 하는지도 수기로 적었다.

최초의 '마피'의 맵은 가운데에 엘리베이터를 두고, 양쪽 끝에 각 층으로 이동이 가능한 계단을 두는 식으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적용하기에 앞서서 가상으로 진행해본 결과, 게임 속도가 예상한 것만큼 다이나믹하지 않았다. 사토 디렉터가 기획안에 그린 구현한 설계도 위에서 직원들이 모의게임을 했는데, 그 모의게임에서 이동 동선이 너무 길다는 단점이 발견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엘리베이터와 계단의 간격을 좁혔지만,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단점이 발견됐다. 여러 층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방법이 엘리베이터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 '마피'의 초기 기획안, 모의 게임 결과가 좋지 않아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돌리는 것이 아닌, 수기로 작성한 것을 토대로 모의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 분석이 정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모의게임에서 '재미가 없다'라고 말했을 때는 대체로 실제 게임에서 동일하게 느꼈던 만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주일에 걸쳐 기획서를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때 기획서에서 지금 '마피'에 적용된 트램펄린이 등장했다. 원하는 층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트램펄린 때문에 게임의 페이즈는 좀 더 다양해졌으며, 속도감이 붙었다. 직원들의 모의게임에서도 합격점을 받자 사토 프로듀서는 기획안을 상부에 보고하고, 정식 채택이 돼서 현재 아카이브상에서 V코드로 등록이 된다.


▲ 1주일 간 수정을 거친 '마피'의 기획안은 결재까지 무사히 마쳤다

기획안이 등록이 되면, 다음에는 사양서를 작성을 한다. 실제 아케이드 게임기용으로 만들 때 레이아웃이 어떤 식으로 나오고, UI가 어떻게 되는지, 아케이드 게임기는 어떤 사양이 필요한지 적어가는 것이다. 레이아웃을 잡을 때는 설계 프로그램을 활용했지만 캐릭터 그래픽을 스케치할 때는 미리 만들어둔 사이즈의 모눈종이 위에 한 차례 그림을 그리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활용해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어느 스테이지에 어떤 오브젝트를 배치하는가, 어떤 것이 출현하는가를 일일이 표로 만들어서 체크하고, 사양서에 첨부했다.


아카이브의 B군은 개발자들과 사원들의 메모로 구성이 되어있다. 효도 부장은 여기에는 단순히 개발에 관련된 메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당시 효도 부장은 기획부의 신입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개발보다는 잡다한 심부름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가정용보다 아케이드가 더 주력이었던 그때는 회사에서 아케이드 기기의 현황과 오락실의 반응이 주요 체크거리였고, 이 업무는 영업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의 신입들도 맡았었다. 당연히 기획부의 신입이었던 효도 부장도 여기에 동원, 각지의 게임센터를 방문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피'를 즐기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때 남긴 메모와 보고서도 아카이브에 저장이 되어있다.

▲ 게임센터를 방문해서 모니터링한 것을 적어서 보고하는 것도 업무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개발자들이 게임센터를 방문하면서 직접 모니터링한 기록도 수기로 남아있으며, 돌아와서 다음 시리즈에는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메모한 것도 존재한다. 이러한 메모들은 개발자들의 수첩이나 노트에 적혀있었고, 회의 때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 따로 회의 노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때 삽입된 게임 음악 같은 경우에는 악보의 형태로 저장이 되어있다. 그 외에도 사용되지 않은 채, 사운드 담당자가 작곡만 해둔 악보도 회사에 있었고 이것들은 따로 보관이 되어있다가 아카이브화 됐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결과물 중 일부는 소실되기도 했지만, 작곡가가 남긴 메모 등은 대체로 보관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그 외에도 프로그래머들의 메모, 기획자들의 메모 등 다양한 메모들이 B군의 아카이브로 보관이 되어있다.



C군은 제품 개발에 관련된 주변 자료들로, 개발에 직접 사용되지 않았지만 연관성이 어느 정도 있는 문서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이디어 모집안과, 그렇게 해서 회사의 각 부서 사람들이 만들어 올린 아이디어들이었다.

효도 부장이 사례로 든 것은 90년 초여름에 진행한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이었다. 제공된 A4 용지에 제안한 게임의 대략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별도의 제안서를 다른 용지에 작성, 첨부해서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게임에 직접 관련이 없는 영업부, 심지어 경비들도 참가가 가능했던 만큼, 효도 부장도 참가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디어는 결국 예선에서 막혀버렸고, 그 외에 예선에서 막힌 아이디어 중 일부가 소실돼서 복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본선까지 올라온 안 건 중 일부를 효도 부장은 소개했다. 80년대에는 2D로 만들어진 게임이, 90년대에는 어떤 모습을 갖춰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답은 3D였다. 그때 당시 나온 아이디어들을 보면 다수가 3D를 상정하는 게임이었다. 슈팅, 어드벤처 등 당시에 2D로 만들어졌던 것들이 폴리곤을 입혀서 3D로 나올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재미있게 만들 것인가'에 주력했다.

당시에는 3D 인터페이스가 실제로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3D 인터페이스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할까, 처음부터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용어 없이, 자기식대로 이를 표현했다. 뒤에서 보는 각도, 혹은 위쪽 어느 정도 시점에서 보는 식, 이런 식으로 말하는 식이었다. 다만 그때에도 지금의 3D 게임에 적용되는 것들은 출현했다. 백뷰나 쿼터뷰 방식의 인터페이스나 컷씬의 삽입 등을 통한 씬의 전환 등, 2D 게임에서 없었던 것을 3D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 사내 직원들이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낸 아이디어들

최종적으로 선발된 것은 당시 개발부 직원이었던 츠바사 코이치가 낸 안이었다. 그가 낸 아이디어 제안서는 홀로그램을 활용해 마치 직접 그런 비행기를 조종한다고 느끼는 게임으로, 지금의 VR의 개념을 담아낸 게임이었다. 그 시도가 바로 몇 년 안에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가정용으로는 적용이 불가능한 기기들을 아케이드에서는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케이드용으로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츠바사 코이치의 이런 아이디어는 그로부터 20년쯤 후부터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가 아이디어로 냈을 때의 예측처럼 큰 호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VR 테마파크 등 VR 게임 콘텐츠를 활용한 사업은 계속해서 늘고 있다.

온고지신, 효도 부장은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게임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최신의 기술과 최신의 생각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창기부터 쌓인 경험들이 어느 순간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러한 것들이 최근에 발전한 기술과 만나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낸다고 효도 부장은 견해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아카이브는 교육자료로도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다고 효도 부장은 평가했다. 초창기에 아무 것도 없을 때 기획안을 만들어낸 기획자들은, 지금 맨손으로 개발이라는 것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지금이야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터라 처음 단계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기획안을 만들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기획이 이런 것까지 다 해야 하는 구나'라고 겁먹게 하고, 포기하게 한다. 혹은 그런 것이 아예 안 되면,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아이들에게 "처음에는 이렇게 손으로 그려나갔다"라는 것과, 차츰차츰 발전해나갔다는 것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효도 부장은 역설했다.


반다이남코에서는 최초의 게임부터 앞으로 출시되는 모든 자료들을 아카이브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 작품에 관련된 아카이브를 공개하는 박물관도 만들 계획이기도 하다. 효도 부장은 그것이 단순히 역사적 가치가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후대에 대한 개발자의 의무라고 견해를 밝혔다. 게임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배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해, 후배들이 더 발전된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도 반다이남코의 아카이브 작업은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8월 22일 개최된 일본 개발자 컨퍼런스 CEDEC 2018의 강연 정보와 뉴스를 현지에 나가 있는 박광석, 윤서호 기자가 생생하게 전달해드립니다 ▶ 인벤 뉴스센터: https://goo.gl/ha5v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