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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1:03
조회: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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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후면 조선열리네요^^.1절 기념.. ㅋ 제생각엔 초4 정도부터 아래 내용을 달달 외우게 해야된다구 생각함..
그리고 인증제라고해서 중1~고3 까지 6년동안 시험봐서 내신에 들어갔으면 함니닼ㅋㅋ 자격증 이라구해서 ㅋ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 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나라의 영토이며, 독도에 대한 우리 나라의 영유권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 영토주권확립의 핵심요건인 "실효적 지배"에 의하여 확고부동합니다. 독도는 우리나라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우리의 영토로 외교적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독도의 영유권을 공고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도에 대한 평온하고 실효적인 지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며, 이러한 실효적지배가 장기간 계속될 경우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이의제기는 사라질 것입니다. 국제법상 전쟁 등의 방법을 통한 현상변경이 없는 한 "실효적 지배"여부가 영토주권의 핵심요건입니다. 실효적 지배는 "국가권력의 계속적이며 평화적인 행사(continuos and peaceful display of sovereignty)"가 주요관건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정부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가 대외적으로 분쟁지역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가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명백히 우리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일본과 공공연한 마찰을 야기하는 것은 국제사회 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인식을 주게 되어 결과적으로 우리의 독도 영유권을 공고화하는 데에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일본정부가 독도의 영유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우리정부의 확고한 입장을 일본측에 전달하고 있 습니다. 우리의 주장 및 논거 종래 정부는 독도문제에 관해 「무대응」이 최선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현재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일본 측의「시비」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우리측 입장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지정학적 근거 우리 영토인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48해리인데, 일본 은기도에서는 이 거리의 약 2배인 82해리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 역사적 근거 1.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에 귀속하여 왔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관리 하에 있다. 2.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근거 1.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한다. 2.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 3.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 카이로 선언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을 보면 폭력과 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으며,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카이로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겼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예가 '고종강제퇴위'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그들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회복을 위해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한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궁궐밖에 대포를 배치한 채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켰다. 국제사회 상황과 우리의 입장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정부의 입장은 확고 하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올 경우 우리도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맞대응 하면 국제적으로 독도가 분쟁 수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고 하는 일본 측의 의도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따라서 소리 나지 않게 독도에 대한 실질적 점유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문제제기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기록용」인 셈이다. 「무대응」 전략에도 한계는 있다. 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전세계가 바다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작업(EEZ)에 들어갔고 한, 일양국도 그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 Exclusive Economic Zone)은 그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그 수역 안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배타적(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수역을 가리킨다. 이 수역은 영해와 공해의 중간에 자리 잡는 '제3의 수역' 이다. 이 수역의 성격은 경제 활동 면에서는 영해와 같고, 선박이나 비행기의 통과와 국제 통신 등에 있어서는 공해와 같다. 이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다음과 같다. 생물, 비생물 자원의 탐사와 개발 및 보존과 관리 수력, 조력, 풍력 발전을 비롯한 경제적 탐사와 개발 인공섬 시설 및 구조물을 설치 운영 하는 권리 해양 환경의 보호 보존에 대한 관할권 해양에 대한 과학적 조사권 이상과 같은 특성 때문에 이 수역을 '자원 영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수역에서 다른 나라들의 모든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 수역에서 선박 항해 및 비행기상공 비행의 자유와 해저 전선 파이프라인 부설 등의 자유를 지닌다. 앞으로의 협상추이에 따라서는 독도문제가 국제해양법재판소등의 심판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정부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정부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일본 측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각종 역사적 자료와 지도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일본의 주장과 그 허구성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 그로부터 4주 뒤인 2월22일 시마네 현(縣)은 현(縣)고시40호로 우리의 독도를 「다케시마」 죽도(竹島)로 명명,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했다.그 후 독도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규정하는 해양 경계선은 한, 일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평화선(Peace Line)'을 규정하였고, 그 뒤 51∼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두 나라간의 외교문제로 논쟁대상이되었으나 그 해결이 뒤로 미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선거공약과 정책지침에까지 공공연히 독도 영유권주장을 포함시키는 등 독도문제를 수면 하의 영토문제」에서 「수면 위의 영토분쟁」 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일본이 독도 영토편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첫 번째로, 근세초기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고 영토편입 직전까지 오랫동안 일본이 실효적 경영」을 했으며 두 번째로, 영토편입 당시 독도는 주인 없는 돌섬이었으므로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을 한 것이라는 두 가지 논리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대일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실려있는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그리고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의 세 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큰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 세 섬의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세 섬은 한국 영토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곽선을 표시하는 섬들이며, 따라서 독도는 한국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무성 관료 출신의 관변학자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를 중심으로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고유영토=실효. 메이지(明治)시대에 와서도 오키 도민(島民)들은 울릉도로 가는 길에 죽도(竹島)에서 전복등 해산물채취에 종사했다. 1898년께부터는 오로지 강치(물개 비슷한 바다동물)잡이에 전념하게 됐다. 그러자「강치적 경영론」은 1966년 가와카미가 펴낸 「다케시마(竹島)의 역사 지리학적 연구」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저자가 외무성조사관이었을 때 쓴 이 책은 일본측이 독도영유권을 정당화하는데 인용되는 가장 유력한 문건 이다. 독도의 실효적 경영에 관한 가와카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죽도(竹島)의 개발, 경영에 관해서는 1618년에 오타니(大谷), 무라카와(村川) 양인이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로 가는 도항권을 얻어 이 섬의 개발에 종사했고 울릉도를 오가는 길에 지금의 竹島에 들러 어획을 했다. 이에 관한 고문서는 많다. 또한 이 섬의 경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1696년 작성 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지도」도있다. 강치잡이에 나서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 강치가 절멸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에 1904년 9월 나카이(中井 養三郞)가 독도의 영토편입, 임대를 요청하게 됐다』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제9권 「죽도(竹島)」항; 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 1988년간) 이는 그 자신이 집필한 독도 연구서의 핵심적 내용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일본 측은 울릉도가 조선조의「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4백50년 동안 무인화해 있는 사이에 오타니(大谷)등이 울릉도를 「발견」그곳에서 벌목에 종사하면서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을 중시한다. 가와카미와 같은 「실효적 경영론자」 들은 수백 년 동안 비어있던 울릉도로 본토의 한국인들이 직접 나가서 개발에 손을 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더 멀리 떨어진 독도로 나가는 일은 더 더욱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이상이 일본측 독도영유권주장의 주요핵심이다. 이를 철저하게 논박하고 제압 하기 위해서는 현재 확보하고 있는 우리측의 자료와 사료를 한층 더 보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토문제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띄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측에서 제기될 때 감정폭발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감정을 진정시키면서 일본을 침묵케 하는 길을 찾는 것은 미래지향적 한, 일 관계를 위해 한국인이 발휘해야할 지혜다. 일본 주장의 허구성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일관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유 영토설과 편입설을 모두 주장하였다. 이에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면 어떻게 편입이 가능하겠냐는 한국의 반박에 그 후에는 편입설만을 주장하였다가 이제는 고유영토설과 편입설을 섞어 그럴듯한 논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즉, 일본의 고유영토였던 독도를 1905년 공식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은 1430년부터 약 300년간 울릉도까지 공도정책으로 영유권을 방기하였고 일본이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독점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300여 년간 시행하였던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영유권 방기의 의사표시와 실효적 지배의 단절로 해석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공도정책이란 주민의 안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이용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목적으로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변방지역에 흔히 실시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공도정책은 그 자체가 곧 영유권의 실현행위이며, 국가주권의 발현인 실효적 지배의 한 형태일 뿐, 영유권 방기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도정책하에서도 정기적으로 관직자를 파견하여 통치권을 행사하였음은 그 단적인 증거로서 실효적 지배가 결코 방기, 단절된 적은 없었다는 것을 증명 하여 줍니다. 1905년 정식 영토편입조처로서 원시적 권원을 확정적 권원으로 대체하였다는것입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를 표명한 최초의 행위는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로서, 일본은 이 편입조처를 실정 국제법이 요청하는 권원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은 고유의 영토를 국제법의 변천에 따라 계속 확인하도록 요구 하고 있지 않습니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독도 이외의 다른 영토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예가 전혀 없습니다. 1905년 일본내각의 결정과 시마네현 고시로서 독도를 일본영토에 정식 편입 하였고 이 조처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로서 이미 사실상 존재하던 원시적 권원을 실정 국제법이 요청하는 정식권원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률행위였다 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의 불법 도벌이 늘어나자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 25일자 칙령 제41호로써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한 건" 을 반포하고 관보에 게재한 후 울릉도에 대한 총제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칙령 제41호 제2조에 울도군의 구역이 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 獨島)까지 관할하는 것으로 명시하여 독도에 대한 관할권을 근대법상의 행정 조치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한 시마네현 고시보다 최소한 5년전에 독도는 분명히 한국의 영토였고, 일본의 고유영토도 무주지도 아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906년 4월 울도군수 심흥택의 '본군 소속 독도가 외양 백 여리 밖에 있는데...'라는 보고에서도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울릉군에 소속된 관할 구역이었음이 확인됩니다. 그들은 무주지, 즉 주인없는 섬인 독도를 선점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선점이라는 것은, 즉 주인없는 땅을 먼저 발견하여 소유한 국가가 그 영토의 주인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1905년 독도를 편입하였다는 일본의 '편입설'에 따른 내용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 일본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은 주인없는 땅인 독도를 1905년 자신의 영토 시마네현 다케시마라 는 이름으로 선점을 하였기 때문에 독도는 그 이후로 자신들의 소유 영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논리가 얼마나 어이없는 억지 주장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독도가 그들의 설명대로 임자 없는 땅이었냐 부터가 문제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독도는 512년부터 우리의 영토로서 함께 살아 숨쉬어 왔습니다. 우선 그들이 주장하는 1905년의 시기 이전까지 우리 한국영토에서 독도의 역사가 어떠했느냐를 증명하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분명히 일본의 자료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 일본인 실학자 임자평이 1785년 경에 쓴 '삼국 도현도설'의 부속지도에서 이 지도는 조선은 황색, 일본은 녹색등 나라별로 색깔을 다르게 영토를 구분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는 황색으로 칠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것으로'라고 기록하여 독도와 울릉도 모두 조선 영토임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으며. 18세기 일본이의 '총회도'의 이 지도는 조선-일본-중국의 영토를 색깔로 구분 했는데 조선은 황색, 일본은 적색으로 칠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조선의 색인 황색으로 칠했고 그 위에다 다시 '조선의 것으로'라고 문자를 써넣어서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영토임을 표시하였다. 905년에 발견된 지도 이외에도 1905년 이후에 만들어진 지도에서도 독도가 한국령 임을 표기해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1) 1905년 7월 31일자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의 '울릉도 현황' 보고서 2) 1910년에 박애관에서 발간한 '조선전도' 3) 일본 해군성 수로부에서 발간한 '일본수로지' 제6권 4)1920년에 발간한 동 수로지 제10권 상 5) 동 수로부에서 1923년과 1933년에 각각 발간한 '조선연안 수로지' 6) '역사지리' 제55권 6호(1930)에 수록된 오께바따세꼬의 논문인 일본해에 있는 죽도의 일선 관계에 대하여" 7) 1933년에 발간된 시바구즈모리의 '신편일본사도' 색인 8) 1935년에 발 간된 샤꾸오?나이의 '조선과 만주 안내' 9) 1936년에 일본육군참모 본부 육지 측량부에서 v발간한 '지도구역일람도'등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서적 : 김병렬, '독도냐 다께시마냐'. 다다미디어) 이러한 증거들을 제쳐 두고라도 , 만일 진정 그들이 독도를 선점하였더라고 한다면 선점후의 그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당하게 그들이 주인없는 섬을 차지했더라고 한다면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공고가 있 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중요한 편입처리가 은밀하고 암암리에 일 개 현 과청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에 더해서 국제적으로 가장 큰 효력을 가지는 부분인 '실효적 지배'도 전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05년 시마네현 고시 공포 이후,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관유지로 토지 대장에 등재하였을 뿐 아니라, 독도 주변 지역에 대해서 어업을 허가하고, 1940년에는 이를 해군군용지로 사용한 사실 등,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만 한 제반의 증거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독도에 대한 영토편입과 한국에 대한 합방의 합법성을 전제로해서 시행된 부수적 조처들에 불과합니다.따라서, 한일합방이 무효가 된 현재의 상황에서 이것이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독도의 일본영토편입은 1905년에 완성된 것이며, 1910년에 합방된 한국 영토들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1905년 독도 편입조처는 시기적으로 한반도 침략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므로, 일본은 1945년의 '포츠담 선언''카이로 선언'의 의무를 수행하여 협박과 강요로 약취한 영토를 침략 이전의 상태로 환원할 법적 의무를 지고 있으며, 강점한 독도는 당연히 한국에 환원되어야 합니다.따라서 당시에 주권이 회복된 모든 영토와 함께 독도는 한국이 주권을 가진 영토로서 복귀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 해양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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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도요다 다이쥬 親日을 밝힌다 김대중(金大中) 1925. 12.3 生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金大中은 親日인가. 집권 후 측근 간신모리배들과 쓰레기언론을 총동원해 원수보다 더 싫은 故박정희 前 대통령을 끊임없이 친일파로 음해한 金大中은 과연 친일사상과 전력에 흠이 없는 깨끗한 者인가. '센세이 아노 도요다 다이쥬 데스요' 만고역적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 후 목포상고 왜놈 스승 무쿠모토 이시부로에게 달려가 저처럼 정중하게 인사말을 올렸다. 왜놈 스승 이시부로는 조선총독부 교육청 훈도담임선생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에게 황국신민조선을 교육시켜 민족얼 말살에 나섰던 전형적 제국주의자다. 김대중은 중. 고 교육 모두를 일제교육청소속 학교에서 받아 日語가 자유로웠다. 졸업 후 왜놈이 경영하는 목포해운회사에 들어가 뛰어난 일본어를 앞세워 사주를 구워삶은 덕에 징용. 입대 모두 피할 수 있었고 종내는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게 된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시절 민족원흉 히로히토가 저 세상으로 갔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前대통령은 일왕 조문을 꺼려했으나 매국노 金大中은 일본대사관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가 90도로 깍듯이 조문을 했다. 그 누구의 조문강요도 없었고 일본정부의 공식조문 요청도 없었으나 김대중은 끝내 조문을 갔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포착되어 1989. 1.9일 사진과 함께 특종보도 됐다. 민족수탈 수괴에다 전범 총책임자에 대한 조문행위는 국민정서에 반하는 명백한 친일행위다. 이런 천하의 반민족행위자 김대중이 1998년 정권을 잡은 후 공식적인 일본방문을 앞두고 아키히토 일왕의 정부공식호칭을 천황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 국내의 반대여론과 논란이 많았으나 김대중이 강력히 밀어붙여 1998.10월 방일을 앞두고 천황으로 공식 명명하게 됐다. 김대중은 일본 공식방문 중 왜놈들과 입을 맞춰 독도해역 반을 즉시 일본에 넘겨준다. 신한일어업협정 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독도를 포함 울릉도 33해리까지 한국.일본이 공동 관리하는 수역을 확정해 우리영해의 주권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스스로 포기했다. 일본에게 독도 침탈 빌미를 제공한 이 굴욕적 협정은 친일부역(親日附逆) 행위나 다름없다.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어선 700여척이 헐값에 강제 폐선 처리됐으며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랫말은 금지곡으로 독도주권과 대한민국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라졌다. 민족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를 일본과 뒷거래한 돈으로 건설한다 하여 공사 현장에 달려가 자빠져 누워 시위에 가담했던 金大中. 여기서 대한해협을 일본에 팔아넘겼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대한해협은 물론 독도에 관한 자주권에도 완고해 일본외교부장이 2억을 들고 찾아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헛소리하는 것을 박대통령이 무례한 외교관이라 소리쳤다. 이어 대통령은 차라리 독도를 부숴버리겠다며 호통을 쳐서 쫓아냈고 결국 독도는 우리 영토로 온전히 보존되면서 오히려 태평양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수탈한 보상금 8억을 따로 또 받아냈다. 2002년 6.29일 제2 연평해전 발발 당시 북방한계선(NLL)에 무력도발 징후가 있어 함대사령관의 선제사격 요청이 있었으나 김대중은 북한이 공격할시 반격하라는 어이없는 교전수칙을 하달했다. 국군통수권자로서 본분을 망각한 김대중의 교전수칙에 손발 묶여 싸운 우리 장병들은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교전 중 손발이 잘려나가는 처참한 공격을 당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 우리 軍을 버린 김대중은 장례식 참석을 외면한 채 검은 리본은커녕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 아키히토 내외와 함께 월드컵 결승전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장병들 영결식에 정부관계자 단 한명도 참석치 않았고 5일장을 3일장으로 축소한 후 대통령장이 아닌 해군장으로 결정 장병들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서해교전을 제2 연평해전으로 명명하고 매년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을 주관하는 정부주관행사로 격상시켜 비통한 눈물로 살아온 유족들의 상처를 뒤늦게나마 어루만졌다. 김대중 집권 중인 2002. 9.7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남북통일축구경기. 주최측은 방임된 공권력 속에 입장하는 관객들로부터 태극기를 압수하고 대신 한반도기(북한 깃발)를 손에 쥐어주면서 조국의 태극기가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구석으로 쌓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래서 전쟁광 김일성이 뒈지기 전 의형제와 다름없는 김대중을 확실히 믿은 나머지 '남한은 한 세기가 지나기 전 총 한방 안 쏴도 공산화 할 수 있다' 라며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으리으리한 동교동 아방궁부터 김대중광장. 김대중도로. 김대중광주홀. 김대중역. 김대중백화점. 김대중박물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미술관. 김대중기념관, 김대중컨벤션센터. 그리고 나라곳곳에 수없이 세워져 있는 만고역적 김대중의 동상과 흉상들. 확인된 진성 親日 金大中에 비해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바보 대통령 두 사람.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은 故이승만 건국대통령.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일괄하며 김일성에게 무조건적 사과를 받아낸 故박정희 대통령. 글을 마치는 이 순간 너무나 그립다. - 2012 정권재창출 ※종북행위는 너무 많아서 나열불가 노무현어록
"다케시마에 관해서는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하고..." "87년 이후 북한은 테러를 자행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다" "여자 잡으려면 밥상을 엎어야 한다" "여자는 뺑뺑이 용과 오솔길 용은 있어야 한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지나가는 여성에게 오줌을 갈기며 희롱했다" "군대가서 썩지 마라" "인공기와 김일성 위원장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은 유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을 길게하니 맛있게 먹은 밥도 소화가 안 되더라" "종부세 낼 돈이 없으면 이사 가면 될 거 아냐"
박정희 후대 평가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한국경제 발전의 유공자이다"
"박정희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 창출이 되고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롤모델"
"20세기의 위대한 아시아 지도자 20명중에 한 명" "박정희는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민주화란 것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앨빈 토플러, 미래학자/뉴욕대학 명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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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