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명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위험요소로 인식했고, 내부의 신흥 세력의 성장이나 유목민과 해적의 약탈을 통제하는 걸 늘 힘들어 했습니다. 또 내수로 충분히 먹고 살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진출하는 것과 교역을 최소화하거나 막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북방 유목민도 그랬지만 일본도 중국의 선진적이고 풍부했던 교역품과 문물을 늘 갈망했습니다. 직접 이용을 하든 중간 교역을 하든 그 자체로 큰 이득이 되었죠. 이런 반대되는 입장은 중국과 주변 국가가 싸움이 벌어지는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북방 유목민의 경우 기호품으로나 영양적으로나 녹차가 필수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것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유럽에서 한때 중국 문물들이 최고의 명품으로 인식 되었죠. 그러나 중국의 내부 혼란과 함께 쇄국적 정책으로 나중에 그 대체제를 일본의 물건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런 현상이 꽤 지속 되면서 서구에 현대까지도 일본문화 예찬자가 꽤 많은 원인이 됩니다. 이런 일본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유럽에 여러 모로 많은 영향을 줘서 인상파 같은 예술의 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했죠. (터키의 군악대가 유럽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것도 비슷한 사례)

임란 당시 일본의 유지들은 조선의 문물에도 눈독을 들였고, 조선을 통한 중국 및 여진족 등과 간접 교역도 원했죠.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교역을 제한해서 일본은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명 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교역에도 큰 관심을 가졌죠. 조선에서는 싸구려 자기로 인식되던 저질이 일본에서는 그 부조화의 멋과 자연적인 미감을 재발견하고 엄청난 미학적 가치를 창출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본에는 백제의 뿌리였다고 자부하던 여러 가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영향력이 작은 가문들이 아니었고 센고쿠 시대를 좌우하던 큰 가문들이었죠. 가령 시마즈 가문, 모리 가문, 초소카베 가문부터 초기의 상당한 명문가였던 오우치 가문 등이 있습니다. 백제의 후손인지 그 사실 관계는 불분명 합니다만 (최소한 피는 꽤 섞였을 겁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런 족보를 자부하거나 혹은 조선과 교역에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경우 그런 자신의 뿌리를 엮어서 임란 이후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제사도 지냈죠. 이런 상황이라 일본에는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나 건물 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메이지 유신 이후 다 사라집니다만. 

그런데 웃기게도 이들 가문들이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메이지 이후 정한론이 대세가 되었을 때 앞장서서 조선을 침략한 가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현대화된 일본의 군조직들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 해군은 시마즈 가문에서 또 일본 육군은 모리 가문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죠. 

이렇게 교역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도 백제의 후손이 극우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도 모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