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골을 내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많은 게임에서 이길 것이다.”
- 바비 무어


현재 잉국 스케대표를 운영중인 감독으로써 바비무어의 출시는 진짜 "레전드"의 등장에 대한 희열과 돈을 써야한다는 암담함이 겹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팀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죠! 허허..

그런데! 인벤에서 무어를 검색하던 도중 "바비 무어가 도대체 왜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나?" 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한거라고는 1966월드컵 우승, 1964 fa컵 우승, 65년 위너스컵 우승 말고는 없는데 왜 역대 최고 수준으로 불리는거죠?"

저 또한 그때 축구를 보던 사람이 아니라서 증인이라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략적인 답변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바비무어의 업적을 알아보기 전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라는 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웨스트햄은 시드 킹 감독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2부리그 참여 4년만에 1부로 승격하게 됩니다. 허나 그 후 10년동안 겨우 강등을 피하던 웨스트 햄은 1932년에는 기여코 강등을 당하게 되고 30년을 함께한 감독 시드 킹은 경질당하게 됩니다. 이때 부터 시작된 웨스트햄의 암흑기는 26년 후인 1958년이 되서야 테드 펜톤 감독의 뛰어난 유스팀 육성과 말콤 알리슨의 결핵 투혼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 뛰어난 유스 시스템의 일원으로 발굴된 무어는 결핵으로 인해 승격과 동시에 은퇴를 하게 된 '영웅' 말콤 알리슨의 등번호 6번을 이어 받으며 레전드의 탄생을 알립니다.


"내가 프로가 된 후의 2달 반동안 말콤은 나에게 모든것을 가르쳐주었다. 말콤이 유스팀을 가르칠때는,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았던 나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난 그를 존경했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 바비 무어 (게이?)

바비 무어는 1958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데뷔를 한 이후, 팀의 주축 수비수로 성장하고,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수비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21살에 성인 대표팀 데뷔를 하게 되며 1962년 월드컵에 주전 수비수로 10년 선배들과 발을 맞춘다. 8강에서 펠레가 빠진 브라질을 만나 3:1 패배와 함께 아쉽게 우승을 놓치지만, 바비 무어는 눈에 띄는 플레이로 월드클래스 수비수로 주목 받게 됩니다. 이듬 해 최연소로 주장 완장을 차본 무어는, 1964년 부터는 삼사자 군단의 붙박이 캡틴이 됩니다. 그 때 무어는 소속팀에서도 FA컵을 들어올리면서 FWA 올해의 선수에 선정이 되고, 이듬해는 UEFA위너스 컵에도 우승하면서 웨스트햄의 돌풍을 이끄는 영국 축구의 핵으로 거듭납니다.


"웨스트햄을 떠나고 싶다."
-바비 무어

그의 커리어의 정점은 뭐니뭐니해도 1966년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 이전에는 뒤숭숭한 일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중 뭐니뭐니해도 큰 논란은 그가 무심코 뱉은 저 발언 때문에 일어난 '이적 논란' 이였습니다. 무어가 혹여나 잉글랜드 밖으로 이적하게 되면 '국가적 손실'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알프 램지 영국 국가대표팀 감독은 중매자(...)를 자처하며 그린우드 웨스트햄 감독과 무어 사이를 왔다 갔다하며 재계약을 권유하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재계약을 한 바비 무어는 월드컵에서 또 다른 바비, 바비 찰튼과 함께 잉글랜드를 이끌게 됩니다. 특히 그는 포르투갈과의 4강전에서 그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흑표범' 에우제비우를 말 그대로 '말끔히' 지워냅니다. (에우제비우가 그경기에서 기록한 골은 잭 찰튼의 핸드볼로 인한 PK로 인한 득점). 그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한 바비 찰튼에 비해 묻혔지만, 에우제비우를 지워버린 활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근데 더 놀라운 것은, 에우제비우의 그 PK를 제외하면, 잉글랜드는 준결승전까지 실점하지 않았단 것이였습니다. 물론, 무어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File:Bobby Moore 1969.jpg

알프 램지 감독은 무어를 결승전에 출전시킬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무어는 '피지컬 빼고' 다 완벽한 선수였기 때문에 떡대로 무장한 전차군단 독일을 상대로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때문이였습니다. 결국 주장을 뺄 수 없다 판단, 결승전에 출전한 무어는 12분만에 실점을 하는 둥 초반에 고전하지만 무어는 센스 있는 즉시프리킥을 허스트의 머리로 배달하면서 동점을 만들게 됩니다. 추가골을 기록한 잉글랜드는 2-1로 앞서가다 후반 23분즈음 베버에게 골을 내주면서 다시 동률을 이룹니다. 이 실점 장면에서 무어는 핸드볼 어필을 했으나 곧바로 묵살 당했습니다. 이 장면도 논란이 될법 했으나... 후에 이어질 장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File:Champions statue.jpg

"야 그거 솔직히 골 아니였잖아..! 띄발!"
-영국 월드컵에 대한 얘기를 나누시고 계신 독일-영국의 할아버지들 (2016년 시점)

그대로 연장전으로 이어진 경기는, 결국 허스트의 골로 인해 영국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 허스트의 강력한 슛은 윗 골대를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이게 골이 아니였다고 한다). 이 골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영국-독일인 할아버지들이 만나면 나오는 단골 떡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전의를 상실한 독일의 맹공은 약해졌고, 마지막 몇초를 남기고 무어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로 허스트의 헤트트릭을 완성시킵니다. 참고로 결승전의 모든 영국의 골은 웨스트햄 선수들의 작품이였습니다 (무어 2AS, 피터스 1골, 허스트 3골 1AS).


아, 결승전에 찰튼의 이야기는 왜 없을까요? 무어가 포르투갈전에서 에우제비우를 지웠듯, 결승전에서 찰튼을 지운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우어입니다. 훗날 무어에게서 '세계 최고의 수비수' 타이틀을 이어 받을 베켄바워의 데뷔 무대가 바로 이 월드컵이였는데, 이때 벌써 두각을 보인 베켄바워는 준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것도 모잘라 결승전에선 무려 그 바비 찰튼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어쨋든 결국 우승은 영국, 그리고 무어의 것이였습니다.


"적어도 우린 이겼잖아"
- 바비 무어

이때부터 무어는 전국구 아이콘이 되면서 기사 작위(OBE)도 수여받게 되고, 그해 말에는 BBC올해의 스포츠 인사로 뽑힌 첫 축구선수이자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스타로 선정됩니다. 1970년 월드컵에서도 무어는 주장으로써 잉글랜드를 이끌게 되는데, 펠레의 정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아쉽게 1-0으로 브라질 한테 지게되지만, 무어는 4년이 지난 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경기에서 무어가 자이르지뉴에게 한 슬라이딩 태클은 '태클의 정석', '역대 최고의 태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당시 최고의 수비수 였던 무어, 그리고 최고의 공격수였던 펠레는 서로 찬사를 나누며 유니폼을 교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매우 영리하게 플레이를 하며, 또한 용감한 플레이를 펼친다. 그와 대전했을 때는 마치 고도의 체스 경기를 하는것 같았다."
-펠레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었다. 뛰어난 양발 마술같은 공중에서의 능력, 민첩함, 강력함까지. 그는 기술로도 스피드로도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173cm밖에 되지 않았지만 피치 위에서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완벽한 균형과 비현실적인 시야도 지녔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장 위대했다. 브라질 기자가 살다냐 (前 브라질 감독) 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

하지만, 너무 어린나이에 스타덤에 오른 탓인지,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70년에 무어는 찰튼과 함께 찰튼의 아내 선물을 보러 갔다가 난데 없이 팔찌 도난 혐의에 연루되기도 하며 (무죄로 풀려났으나 구속까지 당함), 월드컵 직후에는 무어의 아내를 상대로 인질극을 당하는 등,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 해에도 역시 최고의 퍼포먼스를 유지하며 유럽 올해의 선수 2등으로 투표된됩니다. (1위는 게르트 뮐러).


그는 이때 부터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1971년엔 블랙풀과의 FA경기를 앞두고 동료들과 나이트클럽에서 유흥을 즐긴것으로 드러나 벌금을 내게 됩니다. 특히 그때는 웨스트햄이 강등권에 있을때였기 때문에 더 많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 해 웨스트햄은 겨우 강등을 면하게 됩니다. 그후에도 최고의 폼을 유지하면서 웨스트햄을 캐리하는 그였지만, 팀의 에이스 타이틀은 훗날 팀의 올타임 레전드로 꼽힐 미드필더 빌리 본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향력과 함께 그에 대한 신망도 줄어 들고 있었고,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그는, 73년 월드컵 최종 예선 폴란드 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서 알프 램지 감독의 신임을 잃기 시작합니다. 총 108경기에서 90경기를 주장으로 뛴 그의 화려한 국가대표 커리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의 국가대표 출장경기 기록은 실튼, 제라드, 베컴에 인해서 깨졌으나, 주장 출전 경기수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듬해 그는 최다 출장 기록과 함께 웨스트햄에서의 16년 생활을 마무리하였고, 다른 영국 팀들과 미국을 전전긍긍하던 그의 커리어는 1978년이 되서야 마무리 됩니다. 은퇴 후 그는 감독과 평론가 생활을 하다가, 1993년 암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무어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고 평가를 받는 말디니, 카푸, 바레시, 베켄바우어와 달리 화려한 커리어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허나, 그의 클럽레코드를 보면서, "어? 얘가 왜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실수입니다. 애초에 저기 명시된 선수들이 뛴 AC밀란과 뮌헨은 각국리그를 대표하는 전통적 명가인데, 웨스트햄이라는 영국 중위권 팀에서 뛰면서 최고의 수비수라고 불린 것 그 자체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BOBBY MOORE 6"

"나의 주장, 나의 리더, 나의 오른팔. 그는 우리 팀의 기운이자, 우리팀의 심장이였다. 내 인생을 걸어도 괜찮을 멋지고 계산적인 축구선수이다. 그는 내가 일해본 사람중에서 완벽한 프로였다.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는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프 램지, 1966년 영국 대표팀 감독

"그는 나의 친구이자 내가 상대해본 최고의 수비수였다."
-펠레

"바비 무어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무어는 내가 평생 살면서 본 최고의 수비수다"
-알렉스 퍼거슨

"나한테 바비무어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난 며칠 동안 얘기할 수 있다. 나한테 인류에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난 1분만에 말이 없어질 것이다."
-론 그린우드, 웨스트햄에서 영광의 시절을 함께한 감독

"무결점 축구선수. 황족 수비수. 잊혀지지 않을 1966년의 영웅. 월드컵을 들어본 첫 영국인. 동런던의 아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최고의 레전드.국보. 웸블리의 마스터. 축구의 주인. 상상이상의 주장. 역대최고의 신사."
-웸블리에 새겨진 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