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전선: White Out (4)

 

 

 

작전 개시 45시간 49분이 지났습니다.

 

저희들은 눈보라를 뚫고 계속 전진해,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탓에 몸도 마음도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고- 무엇보다도 그 방공호에서

 

겪은 습격 때문에 여러모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기괴한 전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광기...무수히 많은 시체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는...마을? 민간인은 없는 건가.”


북쪽으로 12Km를 걸어와 도착한 곳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참 전에 버려진 것인지 눈으로 덮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인기척이 전혀

 

없어 바람 부는 소리 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변 경계해, 지금부터 정예 소대를 찾는다. 아니면 남긴 흔적이라도.”


“...저기, 네게브. 지금까지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AN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습니다.

 

뭐라고?”


그 방공호에서 식량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모두들 숨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짐을 배분해서 가지고 다니지만- 저희들 중 가장 많은 식량을

 

가지고 있던 것이 AN-94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식량을 잃어버렸다면...

 

그럼 지금 우리에게 남은 식량은?”


나눠먹어도 이틀...아니, 하루 반 정도.”


전술 인형의 신체 능력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그 대가로 에너지 공급에 민감합니다.

 

평범한 인간은 며칠 정도 굶어도 활동할 수 있지만- 저희들은 식량 공급을 하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제기랄, 이런 거지같은 상황에서 하필이면 식량까지...어쩔 수 없지, 현지 조달이다.”


마카로프가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집의 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마카로프! 뭐하는 거야!?”


여긴 민간인 거주 지역이었고, 그럼 식량이 있을 거야. 피난한 모양이지만 전부

 

챙기진 못했겠지...적어도 며칠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식량이 필요해.”

 

지금 민간인의 물자를 약탈-”


임무를 위해서야. 아니면, 여기서 전부 굶어죽을래?”


정적.

 

모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희에겐 임무가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임무가...

 

여기서 저희가 쓰러지면, 정예 소대도 살아남은 민간인들도 구조할 수 없게 됩니다.

 

저희까지 실종되면 지휘관님은 더 이상 인원을 보내지 않고, 눈이 그치는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할 겁니다.

 

네게브, 결정해. 우리는 리더의 명령을 따른다.”


“...좋아, 비상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겠어.”


다들 들었지? 수색 시작해!”


내키지 않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빈 집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식량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나 나오는 것들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 피난할 때 가져간 것인지 전부 모아도

 

양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봤자 며칠을 더 견딜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수색이 끝날 무렵이 되니 밤이 되었고, 저희는 정예 소대의 흔적을 계속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분명 이 마을에 들렸을 텐데...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IWS?”


...”


네게브가 제게 인스턴트 커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정예 소대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서요.”


그러게. 살아있는건지도 모르겠지만...”


살아있어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들이 분명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라고.

 

지휘부 최정예 전술인형들이, 고작 일주일 만에 전멸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무전 통신만 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텐데.”


.”


아아, 진짜 싫다. 왜 내가 리더인 거냐고, 정말이지.”


?”


네게브가 미소를 지으며 제 옆에 앉았습니다.

 

기대 받는 건 좋아, 그에 부응하는 것도 좋아.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지는 건 싫어. 어리광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리더였으면 좋겠어.”

 

잘 해내고 계신데요, .”

 

내가? 그렇지도 않아. 저번에도 망설이는 바람에 위험할 뻔했고...결단을 내리는 건

 

너무 힘들어. 내 판단이 잘못되면, 조금만 실수하면...전부 끝나는 거잖아.”

 

네게브...”

시간이 없어. 얼른 흔적을 찾아서, 정예 소대를 구해야 돼. 그리고 이 이상 현상을

 

해결하고...집으로 돌아가야지. 당분간 영웅처럼 받들어지는 거 아냐?”

 

그거 재미있겠네요.”


저희는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웃었습니다.

 

 

 

 

 

“...여러분?”

 

언제 잠든 거지?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다들 어디로...? 저는 어둠 속을 휘저으며 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


?”


방금 무슨 소리가- 저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

 

뭐라고요? 당신은, 누구시죠?”


제 앞에 문이 있었습니다.

 

언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것을 열었습니다.

 

또 다른 어둠.

 

그러나 좀 더 깊고, 축축하고, 기분 나쁜 어둠.

 

그것은 극장이었습니다.

 

무대 위의 붉은 천, 수없이 많은 의자들- 그 가운데에 서 있는, 한 명의 인형.

 

당신은 누구시죠?”


“------------”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는, 너무나도 혐오스럽고 두려웠습니다.

 

“-------”


...?

 

저는 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명을, 괴성을, 새된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이 없다.

 

목이 없는 시체가, 모두의 시체가, 끝없이 많은 의자에 앉아 있는 시체들이-

 

그것들은 웃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없지만, 웃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었습니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어째서 웃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저는 웃었습니다.

 

웃고, 또 웃다가, 눈물이 날 때까지 웃다가-

 

이윽고 깨달았습니다.

 

저희 모두, 여기서 달아날 수 없다고.

 

 

 

 

 

“...2000! IWS2000!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누가 와서 좀-”


저는 웃었습니다.

 

자는 동안 웃고 있었는지, 귀가 멍하게 울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 무슨- 제가 무슨 짓을 했죠? 방금 그건 뭐였죠?”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왜 자다가 웃는 거야?”


웃었다고요? 제가?”


젠장, 야밤에 이게 무슨-”


타아아아앙-

 

강렬한 소리,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지 못할 그 소리.

 

저희 모두, 그 소리에 반응해 몸을 낮추고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창문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왔습니다.

 

제기랄! 또 그 녀석들인가!? 전투 준비!”


기다려! 이건...설마...?”


AA-12가 경악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슬쩍 보았습니다.

 

“...민간인이다.”

?”


지금 우리한테 발포하고 있는 건, 민간인들이야.”


민간인들이? 저 멀리서 사람들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습니다.

 

“...위해! 전술 인형이다! 나오지 못하게 계속 퍼부어!”


저 멍청이들이! 우리른 아군이라고, 왜 이러는 거야!?”


네게브! 명령을 내려! 이제 어떻게 해!?”


저는 이 집의 구조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뒷문이 없는 단독 주택, 나갈 수 있는 건 정문뿐- 창문은 너무 작아 저희가 나갈 수

 

없었습니다. , 저 총알 세례 속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항복할까? 어쩌면 공격하지 않을지도 몰라.”


안 통하면 다 죽는 거야, 잘 생각해. 민간인들을...쏠 거야?”


전술 인형이 사람을 죽인다.

 

저희들은 사람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습니다.

 

가능한 경우는 지휘관이 사격을 허락했을 때-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야만 할 때뿐. 거기에 무장했다지만 민간인을 살해하는 건 그리폰에서 가장

 

철저하게 금지시킨 일. 외부로 이 일이 드러났다간 해체당하는 걸론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하지?”


너는 리더잖아! 리더면 결단을 내리라고! 지금 당장 쏴야 돼!”

 

AA-12.

 

시끄러워! ,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잘못했다간 우리 전부 해체당할 거야!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항복하자, 민간인을 쏠 수는 없어.”

 

마카로프.

 

나는 반대야. 지금 저 사람들이 항복을 받아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밖으로 나갔다간 바로 벌집이 될 거야. 네게브, 사격 지시를.”

 

AN-94.

 

그리고 네게브와, .

 

“IWS...너는 어떻게 생각해? 항복할까? 아니면...”


“...저는 항복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민간인을 상대로 사격할 수는 없어요.”


그래. 네 말이 옳아...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건 안 되겠지.”

 

항복하자, 네게브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 같았습니다.

 

쏴야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들도 쏘고 싶진 않을 겁니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나갈게. 혹시 사격당해도 나는 샷건이니까, 괜찮을 거야.”


나머진 여기서 대기하자. 최악의 경우를...대비해서.”


AA가 먼저 양손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쏘지 마! 우리는 그리폰의 전술 인형이다! 너희들을 구조하러 왔어!”


개소리! 너희들이 우릴 버렸잖아! 그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드르르르륵- 피이잉-

 

AA, 뒤로 쓰러졌습니다.

 

“AA!”


이런 미친 새끼들이...! 전부 나를 엄호해! ! 저것들은 적이야!!”


마카로프의 외침에, 모두들 마구잡이로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마카로프가 밖으로 나가, 쓰러진 AA를 질질 끌고 돌아왔습니다.

 

학살.

 

이런 어두컴컴한 밤에, 야간투시경과 고화력 병기를 지닌 전술 인형과 기껏 해봤자

 

산탄총과 권총, 단발식 소총으로 무장한 민간인들이 싸우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심장이 뛰는 인간을, 가족과 애인이 있는 사람을, 그 긴 인생을 끝냈습니다.

 

단 한 발로,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위력을 가진 총알로.

 

내장이 흩뿌려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 하얀 바닥을 적십니다.

 

일방적인 살육이 끝났을 무렵, 저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41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날이 밝자 그 시체들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대체 뭘 위해서 죽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참하게 찢어발겨진 시체들은 봄까지 썩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겁니다.

 

저희가 죽였습니다.

 

저희들은,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임무는, 정예 소대와 민간인의 구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