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전선: White Out (5)

 

 

 

 

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는 사자나 코끼리,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동물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온 사자는 도망치는 얼룩말을 단숨에 제압해 목을 물어뜯어 죽였다.

 

그걸 보면서 다른 아이들은 얼룩말이 불쌍하다, 너무 잔인하다고 말했지만

 

그 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물은 다른 생물을 죽임으로서 살아간다, 풀이든 고기든 결국엔 다른 생명을

 

먹어치움으로써 생명을 보존한다. 그렇다, 이 세상엔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렇게 해야만 했는지, 나는 몇 번이고 되묻는다.

 

 

 

 

작전 개시 57시간 32.

 

우리들은 죽인 민간인들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불을 질렀다.

 

이런다고 우리의 범죄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선공했고, 항복을 받아들이진 않았다고 하나 그들은 민간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쐈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구역질이 나와, 견딜 수 없이 기분 나빴다.

 

단 게 먹고 싶다, 뭐든 좋다. 사탕이든 캐러멜이든 초콜릿이든 뭐든, 당분으로

 

스트레스를 녹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유통기한이

 

한참 전에 지난 군용 식량뿐. 그마저도 얼마 없어 아껴먹어야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구조 소대와 민간인의 구출, 그리고 이상 현상의 조사.

 

단어만으로는 정말 간단한 일인데- 이렇게 일이 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체를 태운 후,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을을 계속 조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예 소대의 흔적을 발견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탑, 아마 시계탑이나 그에 준하는 일을 하던 것으로 보였다.

 

탑에 오르니 작은 방이 있었다.

 

비좁은 내부엔 일전의 그곳처럼 지도며 먹다 남긴 식량, 탄피 따위가 있었다.

 

칩을 찾아, 분명 NTW가 흔적을 남겼을 거야.”

 

네게브의 명령대로, 우리는 말없이 칩을 찾아다녔다.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태연하게 임무를 계속한다.

 

이번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어떤 처분을 받을까, 해체? 차라리 깔끔하게 해체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폰에선 절대로 우리를 용서해주지 않겠지.

 

그런데도 이 임무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찾았다, 바로 작동시켜.”

 

칩을 찾은 건 마카로프였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통신용 PDA에 칩을 넣었다.

 

본래라면 이런 칩을 쓸 필요도 없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통신과 관련된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별 수 없었다. 비상용으로 이걸 가져오지 않았다면 녹음을

 

듣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정말이지, 짜증난다.

 

‘...이걸 듣고 있는 게, 우리를 구조하러 온 그리폰의 아군이라고 판단하고

 

녹음하겠다. 우리는 실패했다, 반복한다. 우리는 실패했다,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방공호로 대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적이 너무 많았다...우리는 그들을 버렸다.’

 

침묵.

 

모두들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비통함에, NTW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짓눌려

 

말을 잃었다. 그들은 실패했다. 지금의 우리처럼...

 

민간인들은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쫓겨나듯 여기에

 

숨어있다. 살아남은 민간인들은...피아 구별 없이 전술 인형을 모조리 쏘고 있다.

 

그들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 우린 떠날 것이다. 몰래, 아주 조용히.

 

그리고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노이즈.

 

짧은 노이즈였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불길한 소리로 들렸다.

 

마리오네트.’

 

“...마리오네트? 인형이란 뜻인가?”

 

네게브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NTW의 녹음에 노이즈가 생겼다.

 

마리오네트를 조심해라. 우리는 지금부터 지휘부로 복귀할 루트를 찾아

 

좀 더 북쪽으로 향하겠다. 거기라면 통신 방해의 영향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만약에- 이 일의 원흉을 찾아내면, 주저하지 말고 제거하라.

 

지금 우리 지휘부 최대의 위협은 그것이 분명하다.’

 

뚜욱.

 

그것으로 녹음이 끝났다, 우리는 한참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이제 어쩔 거지, 네게브?”


AN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야겠지. 임무가 있잖아.”


임무?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임무를 계속 할 생각인가?”

 

당연하죠. 저희의 임무는 구조 소대와 민간인의 구조-”

 

구조하기로 한 민간인들을 모조리 쏴죽였다만.”

 

너는 안 한 것처럼 말하네? 네 총알은 다 빗나간 모양이야?”


마카로프가 빈정대자, AN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나를 쐈다고. 죽진 않았지만...”


다행히 위력이 강하지 않아 관통되진 않았지만, 만약 눈이나 섬세한 기관에

 

맞았다면 꽤 위험했을 것이다. 샷건이라 튼튼한 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임무는 속행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저지른 일은 분명 외부로 드러나겠지.”

 

그 처벌은 절대로 가볍지 않을 것이고.”

 

“...왜 밖으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게브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라고?”

 

지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우리 다섯뿐, 목격자는 없어. 시체는 철혈이나 이상해진

 

전술 인형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볼 거야. 그래,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마카로프가 외쳤지만, 모두들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

 

입을 다물면, 조용히 넘어가면 우리는 처벌받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공격했고, 항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무를 위해서였다, 모두를 위해서. 그렇다, 정예 소대와 다른 민간인들을 위해서.

 

그럴 수는 없어. 임무는 포기하자, 이 상황에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대로 돌아가자고? 무슨 낯짝으로? 임무를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민간인까지 학살했다?


최악이잖아. 있을 수 없어, 나 같은 스페셜리스트가...전문가가 그런 비참한 꼴로

 

돌아가라는 거야? 임무는 성공시킨다, 그리고 이번 일은 덮어버린다...그걸로 되는 거야.”

 

적당히 해! 지금 상황을 봐, 식량도 탄약도 넉넉지 않고 가진 정보라곤 이 칩이 전부다!

 

무슨 임무를...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정신 차려, 리더인 네가 이러면-”


별 수 없잖아! 그럼 이대로 돌아가자고? 이런 꼴로? 그럴 수는 없어! 지휘관이, 모두가

 

얼마나 실망할지 생각해봤어!? 그럴 수는 없어, 임무는 속행한다. 그게 리더인 내 명령이고

 

너는 거기에 따르면 되는 거야! 그게 내가 내린 결단이라고!”

 

“...”


나는 네게브의 말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임무가 있다.

 

이대로 포기하면, 돌아오는 건 경멸과 죽음뿐.

 

투표로 결정하죠. 임무를 속행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갈지...저는 포기하겠습니다.”

 

나도 포기에 걸겠다.”


IWS, AN은 포기에 투표했다.

 

임무를 포기할 순 없어, 우리가 저지른 짓은...덮을 수 없겠지만...그래도 임무는 중요해.”


“AA, 네 차례야. 포기야, 찬성이야?”


반대 2, 찬성 2.

 

이 임무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다.

 

이대로 돌아가면 범죄의 추궁을 당한 뒤, 죽임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임무만 성공하면- 그리고 어떻게든 숨기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역시...할 수 밖에 없어, 우리에겐...우리가 살 길은 이것뿐이야...”

 

찬성 셋, 반대 둘. 임무는 속행한다. 우린 이제부터 북쪽으로 갈 거야, 정예 소대를 찾아서.”


네게브.”


AN이 나지막이 말했다.

 

책임은 져야 할 거다.”

 

알고 있어.”

 

 

 

북쪽으로.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화이트아웃(White Out)- 기상 악화 때문에, 하늘도 바닥도 새하얗게 변해 지평선을

 

구별할 수 없었다. 눈을 밟는 소리, 바람 소리, 가끔 낮게 울리는 음산한 소리.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다른 인형들과 지휘관이, 우리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당장 즉결처분하려 들지도 모른다.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다니, 최악이다.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거기에 이 일을 덮어서 내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나의 이기심에 더더욱 혐오가 깊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나는 을 보았다.

 

빛이 번쩍였고, 시야가 흐려졌고, 곧 나는 뒤로 쓰러졌다.

 

이어서 들리는 소리는-

 

커다란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