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과 유리의 도시, 자운 출신 챔피언 잔나, 자크, 에코의 새 배경 스토리를 유니버스에서 만나보세요.



환영합니다. 자운.

필트오버 스토리 페이지가 업데이트되었으며, 이제 자운으로 내려갈 수 있게됩니다!


자운은 필트오버를 관통하는 깊은 계곡과 골짜기 밑에 자리잡은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그나마 이 밑까지 닿는 희미한 빛도 얼기설기 녹슨 배관에서 나오는 매연에 흐려지고 공업 시설물을 덮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사되어 색색으로 물든다. 자운과 필트오버는 원래 한 도시였고, 갈라선 지금도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운은 번성하는 도시로, 언제나 스모그 가득한 어스름에 덮여있지만 주민들은 활기차며 문화는 융성하다. 필트오버의 풍족함 덕분에 자운도 마치 땅 위에 있는 도시의 어두운 거울상처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필트오버로 들어오는 상품들의 상당 부분이 자운의 암시장으로 흘러들며, 필트오버의 규제가 너무 갑갑하다고 생각하는 마법공학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운으로 와 위험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불안정한 기술과 탐욕에 찬 산업을 제한 없이 개발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자운 전역은 공해에 찌든 위험한 지역이 되었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독성 물질이 가득 흘러 괴어 있다. 인간이란 이런 곳에서조차 살아남아 번성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자운으로 내려가기
필트오버에서 자운으로 내려가면, 그 배경에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왈츠의 다리
자운과 필트오버의 시민들은 지하도시 자운의 위대함을 경험하기 위해 왈츠의 다리로 몰려든다. 이곳에서는 매일 밤 최고의 음악과 음식, 화학공학으로 만든 장인의 공예품을 만날 수 있다.



마법 압력식으로 강화된 운반장치
자운에서 필트오버로 올라가려면 보통 오랜 시간 힘든 등산을 해야 하지만 높이 솟아오른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



수정 온실
자운의 부자들은 외딴곳에 수정 온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온실에 있는 나무와 식물은 권력의 상징이자 맑은 공기의 원천이다.



통기관
‘잿빛 대기’는 자운 전역으로 확산된 화학공학 산업의 부산물로, 많은 자운인들이 앓고 있는 폐병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운 : 강철과 유리의 도시



빨리 좀 와, 윈!” 잰키가 외쳤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곧 온단 말이야!”

“알아!” 윈이 소리 질렀다. “말 안 해도 안다고!”

윈의 귀에는 기름칠한 쇠의 끼릭대는 소리가 들리고, 입과 치아에서는 금속의 맛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마법 압력식 엘리베이터인 솟아오르는 포효가 접근함에 따라 윈이 오르고 있는 배기관의 내부가 진동하고 있었다.

윈은 쥐가 나려고 하는 다리를 반대쪽 면에 지탱한 채 철제 경사면에 등을 바짝 붙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배기관의 끝에 보이는 사각형의 빛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였다. 윈의 위로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형 니코였다.

“거의 다 왔어, 꼬마야.” 니코가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서 도와줄까?”

윈은 고개를 젓고는 등을 다시 꼿꼿이 편 채 발에 힘을 주어 밀었다. 다리 근육이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형의 손을 잡았다.

윈의 손목을 잡은 니코는 배기관 밖으로 힘겹게 윈을 끌어냈다. 윈은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그대로 엎어졌다. 자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곳은 절벽 면에서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동굴이었다. 이 공간의 높이와 넓이는 그들이 겨우 나란히 서 있을 정도로, 가장자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가장자리에서 10여 야드 떨어진 곳에는 솟아오르는 포효를 지탱하는 2야드짜리 철 기둥 세 개가 서 있었다.

핀은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의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조각조각 기운 핀의 옷이 펄럭거리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케즈는 흥분으로 볼이 상기된 채 니코 옆에 서 있었다. 잰키는 초조하게 손바닥으로 자기 다리를 두드리며 윈을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놓칠 뻔했잖아.”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놓치긴 뭘 놓쳐.” 윈이 쏘아붙였다.

잰키는 윈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니코가 있었으므로 감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고아를 위한 희망의 집에서 잰키는 불량한 깡패 같은 아이였지만, 질 나쁜 화공 남작들의 패거리가 주먹을 쓰며 돌아다닐 때면 주변에 그런 아이가 하나쯤 있는 것이 유용했다.

케즈가 윈을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별말을.” 케즈가 시끄러운 주변 소리 때문에 몸을 앞으로 기울여 큰 소리로 말했다.

윈은 케즈가 아침에 씻을 때 쓴 산성의 비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화학 레몬주스 같은 향이었다. 이번 모험의 특성을 고려해 케즈는 옷에도 신경을 썼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작아진 옷이나 나이가 들어 고아원을 떠나면서 두고 가는 옷을 모으는 옷 보관함에서 낡은 옷을 찾아 입은 것이다. 윈도 자기 옷에서 먼지가 타고 더러움이 심한 부분을 털어낸 후 입고 왔지만, 케즈 옆에 서 있으니 갑자기 자신이 너무 꾀죄죄한 기분이 들었다.

“난 포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 케즈가 윈의 손을 꽉 잡은 채 말했다. “너는?”

끼릭대는 굉음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동굴의 이끼 덮인 녹색 벽에 엘리베이터의 기계장치에서 덜커덕거리며 나는 소리가 메아리쳐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핀은 뒤로 윈을 쳐다보고 있었고, 잰키는 만면에 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윈은 멍청하게 보이기 싫은 마음에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나? 엄청 많이 타 봤지!” 윈은 말하는 순간 실수했음을 알았다. 그는 어깨너머로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바람에 맞서 다리에 힘을 단단히 준 채 가장자리에 모여 있었다.

윈은 케즈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미안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어. 나도 포효를 타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래서 겁나.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케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어서.”



솟아오르는 포효 타기는 자운 아이들의 수많은 통과 의례 중 하나였다. 팔다리에 다친 자국 하나 없이 올드 헝그리 꼭대기에 오르기, 남작의 부하에게서 소매치기하기, 죽마를 탄 지하동굴 채집꾼 넘어뜨리고 도망가기 등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리의 소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위험한 시험을 끝없이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절벽 끝의 바위 선반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모으고 있는 지금, 윈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미친 시험인 것처럼 여겨졌다. 다가오는 엘리베이터의 비명 같은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금속의 끼릭대는 마찰음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기어의 쿵쿵 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니코는 선 채로 밖으로 몸을 기울여 아래를 바라보더니, 뒤로 돌아 입을 비틀며 씩 웃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굽힌 후 벼랑에서 몸을 날렸다.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잰키가 그 뒤를 따라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뛰어내렸다. 뒤이어 핀이 광인처럼 웃으며 친구의 뒤를 따랐다.

“준비됐어?” 윈이 소리 질렀지만 그의 말소리는 솟아오르는 포효의 소음에 묻혔다.

케즈는 들리지는 않았지만 윈의 의도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윈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녀와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윈의 심장은 입에서 뛰는 듯했고, 망치처럼 갈비뼈를 때려대고 있었다. 발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제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벼랑 끝에 다다라 공포와 허세가 섞인 도전적인 소리를 지르며 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윈 아래의 땅이 사라졌다. 그와 수백 야드 아래의 자운 사이에는 공허한 공기가 있을 뿐이었다. 윈은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는 그를 대장장이의 바이스에 조이듯 숨 막히게 조여왔다. 다음 순간 윈은 땅을 향해 떨어지며 새처럼 나는 법을 갑자기 배우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바람개비처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아래를 보았다. 타원형의 유리와 철로 된 솟아오르는 포효가 아래에서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니코, 잰키, 핀은 벌써 포효의 위에 올라 바로크 양식의 격자 세공 무늬나 뼈대에 매달려 있었다. 윈의 몸은 두꺼운 유리에 세게 부딪혀 굴렀다. 그는 유리창 바깥의 곡면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며 필사적으로 잡을 것을 찾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발은 지지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낙하 속도를 줄여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데.

아무것도 없다.

“안 돼, 안 돼, 안 돼…” 윈은 꼭대기의 곡면에서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며 숨이 턱 막혔다. “잔나 님, 제발!”

바람의 상승기류가 윈의 앞면을 치며 지나갔다. 윈은 이 거대한 엘리베이터의 옆에 위풍당당하게 달려 있는 청동 갈고리를 보았다. 윈은 갈고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침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이 갈고리에 다가가기에 적당하게 그를 밀어주었다. 윈의 손가락이 금속에 단단히 걸리고, 끝없는 하강도 멈추었다.

긴 낙하가 끝나고 위험을 피하자 윈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케즈를 찾았다. 그는 위쪽에서 케즈가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며 히스테리 상태로 웃어대는 것을 보았다. 윈도 웃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경사가 완만한 솟아오르는 포효의 위쪽 표면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윈은 입꼬리가 미치광이처럼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니코가 윈을 보고 환성을 지르며 잰키를 팔로 찔렀다.

“봐! 윈이 해낼 거라고 말했잖아!”

윈은 형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의 다리는 밤샘파티 후의 시머 중독자의 다리처럼 고무 같이 느껴졌다. 윈은 깨끗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질감이 느껴지는 저 아래 지하동굴 지역의 공기와 달리 위쪽의 공기는 청명하고 깨끗해 머리가 기분 좋게 가벼워졌다.

“나쁘지 않았어, 꼬마. 나쁘지 않아.” 니코가 말하며 윈의 등을 탁 쳤다. 니코는 기침을 하고 유리에 잿빛 가래를 뱉었다. 니코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았는데, 윈은 그 손에 거무스름한 자국이 남은 것을 보았다.

“별거 아니네, 뭘.” 윈이 말했다.

니코는 윈의 허세에 웃음을 터뜨렸다. “해볼 만하지, 응?”

“너무나 아름다워.” 케즈가 말했다.

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아래, 자운이 계곡의 바위 바닥 너머로 반짝이는 암녹색의 불빛과 색채를 띠고 펼쳐져 있었다. 팩토리우드 위로 안개 속에 무지개가 걸쳐 있고 화학공학 공장단지 위로는 연기가 굽이치며 올라가고 있었다. 위쪽에서 보니 지하동굴 연못은 에메랄드빛 신기루처럼 일렁였고 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은 희망의 집에서 드문드문 보았던 별처럼 어둠 속에 빛나고 있었다.

윈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매서운 바람 때문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 멀리 위쪽에는 상아, 청동, 구리, 금으로 만든 여러 탑에 둘러싸인 필트오버가 보였다. 이 역시 아름다웠지만, 자운의 아름다움은 삶 자체에 있었다. 자운의 거리에는 생명력과 활기가 가득했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인간미가 가득했다. 윈은 자운을 사랑했다. 결점이 많은 도시이지만, 예측 불가능함과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자운에는 필트오버에서 찾기 힘든 활기가 있었다.

윈의 발아래 유리 너머의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포효의 승객들은 엘리베이터의 히치하이커들을 보는 것이 익숙했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그들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승객 중에는 자운 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유한 필트오버인들로서, 자운의 가스등이 켜진 상업지구 아케이드나 유리 천장이 있는 음식점, 쿵쿵 울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연장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오는 사람들이었다.

“망할 필트오버인들.” 잰키가 말했다. “형편없는 조건을 감수하고 기꺼이 자운에까지 오시다니. 자기들이 위험을 꽤 즐기며 사는 줄 착각하나 본데. 밤이 되면 필트오버로 급히 돌아가면서.”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자운에 도는 돈이 훨씬 적었을 거야.” 케즈가 말했다. “필트오버인은 자운에서 이득을 얻고 우리는 필트오버인에게서 이득을 얻는 거지. 그리고 필트오버에서 우리가 즐겁게 보낸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번 진보의 날에 태양 관문에서 했던 불꽃놀이 기억나지? 네가 반했던 그 필트오버 여자애는 기억나? 잰키, 너는 큰소리는 뻥뻥 치지만 사실 위로 가자고 하는 건 항상 너잖아.”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 가운데 잰키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저들에게 구경거리를 보여주지!” 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라깽이 핀은 멜빵을 벗더니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유리 천장에 갖다 댔다. “필트오버인들이여, 오늘 밤엔 새 달이 떴다!”

그러더니 핀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즐거운 감상을 위해 땅에 등을 댄 채 끌려가는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유리에 철썩 붙인 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승객들의 충격 받은 표정에 한바탕 웃어댔다. 남자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이 추잡한 자운 인들을 항해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우린 꼭대기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니코가 호흡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바베트는 자운 중간층에 있어.”
“마마 엘로디가 거기 있을지 확실하지 않잖아.” 잰키가 말했다.

“거기 있을 거야.” 윈이 말했다. “엘로디의 책상에서 극장 전단을 봤는데, 엘로디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잿빛 대기가 끝나면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확실해. 그렇지만 서둘러야 해. 8시 종이 울리면 무대에 설 텐데 벌써 6시가 지났어!”

마마 엘로디는 희망의 집의 원장으로, 희망의 집은 자운을 산산조각 냈던 참사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고아들의 복지를 위해 세워진 고아원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후에 필트오버의 명문가가 된 가문들이 자금을 제공했으며, 200명이 넘는 고아들이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문을 연 지 1세기 남짓이 지난 지금은 신생도시 필트오버에서 보내는 자금이 끊김에 따라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부유한 윗동네의 가문들은 이 정도면 자신들의 죗값을 금으로 충분히 보상했다고 생각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마마 엘로디는 고아원 자금이 바닥났을 때 끝까지 남은 유일한 교사였다.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그녀는 자신이 아이오니아의 공주였다고 말하곤 했다. 윈은 이 이야기는 화공 남작들로부터 기부를 받기 위해 그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궁전에서 따분하게 사느니 세상을 보기를 택했다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부유한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은 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다른 아이오니아인은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부두에서 선원들의 심부름을 할 때조차도 말이다.

희망의 집의 모든 고아와 부랑아들은 마마 엘로디가 요리하고 청소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특별했고, 아기였던 윈은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윈은 마마 엘로디에게 허브티를 가져다주면서 바베트 극장의 전단이 접힌 채 모서리가 접힌 편지 다발 아래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전단을 잠깐 스쳐보기만 했지만 윈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전단의 인물이 마마 엘로디였다는 것을 황금 기어 상자를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마마 엘로디는 윈의 표정을 보고는 귀를 찰싹 때리고 시끄럽게 군다고 매섭게 꾸짖으며 그를 내보냈다.

윈은 다른 아이들에게 그가 본 것을 얘기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아원을 몰래 빠져나가 마마 엘로디가 노래하는 것을 구경하러 갈 계획을 세웠다.

“저것 봐!” 윈이 니코의 옆구리를 찌르며 외쳤다.

니코는 아래를 보더니 제복을 입은 차장이 통화관을 통해 소리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쪽의 직원한테 무임승차한 자운 인이 있다고 알리는 거야.” 니코가 말했다. “그렇지만 상관없어. 우린 플랫폼까지 가는 게 아니니까.”

“그럼 우린 어디에 내리는 거야?” 핀이 자비롭게도 바지를 다시 입으며 물었다.

“탑승 플랫폼 바로 아래에 오래된 윈치 기계 장치가 하나 있어.” 니코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계에 씌워진 지붕이 넓고 평평해. 그리고 옆에는 배관이 있는데 뚜껑이 빠져 있어.”

“그럼 또 뛰어야 하는 거야?” 윈이 물었다.

니코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윙크했다.

“맞아. 너는 노련한 프로니까 문제없겠지?”



윈은 몸서리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윈치의 녹슨 지붕을 잡았던 손바닥에는 피가 났다. 이번에 허공 속으로 뛰어내릴 때도 역시 속이 뒤틀릴 듯 무서웠지만, 적어도 이제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뛰어서 다행이었다. 솟아오르는 포효는 그대로 위로 올라갔고, 포효가 가 버린 것을 보자 윈은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자운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 쉬울 것이었다. 그들은 가파른 바위 군데군데 깎아 놓은 단에 발을 디디기도 하고 양쪽 절벽에서 대들보로 지탱해 놓은 돌출형 구조물들의 가운데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려가는 어지러운 나선형 계단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면서 내려갔다.

윈치의 지붕 바로 옆의 배관은 니코가 말한 대로 열려 있었다. 내부에는 유출된 유독 물질의 냄새가 났지만 거의 마른 상태였다. 다행히도 배관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이는 엄청난 양의 오물이 이 관을 통해 자운으로 버려졌다는 의미였다.

“이 끝에는 뭐가 있어?” 케즈가 배관의 움푹한 곳에 고인 끈적한 녹색 물질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레 걸으며 물었다.

“아마 본스커트 펌프장 뒤쪽이 나올 거야.” 니코가 대답했다.

“정확히 몰라?” 잰키가 물었다. “전에도 가 본 줄 알았는데?”

“가 봤지만 그건 거의 1년 전이야. 배관의 배치가 그때와 똑같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들은 바위를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구부러지기도 하는 배관을 따라 걸었다. 금속 재질의 배관은 벼랑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벼랑이 또 중얼거리고 있어.” 케즈가 말했다.

“뭐라고 그래?” 윈이 물었다.

“아무도 몰라.” 케즈가 대답했다. “마마 엘로디가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운하를 만들려고 땅을 갈랐을 때 일어난 일 때문에 바위가 아직도 슬픈 거래. 바위가 많이 슬플 때는 한 번씩 우는데, 그래서 지진이 나는 거래.”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배관 끝이 바위벽이나 우그러진 금속 벽으로 막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잰키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니코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닐 거야. 봐.”

니코가 앞쪽의 가느다란 빛줄기를 가리켰다. 먼지와 티끌이 허공에 빙빙 돌고 있었고, 윈은 배관에 사각형으로 뚫린 수로로 올라가는 녹슨 사다리를 볼 수 있었다.

“나갈 길을 찾은 것 같군.” 니코가 말했다.



윈이 자운의 중간층까지 가 본 것은 평생에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갈 때마다 그는 매우 특이하고 생생한 인상을 받았다. 중간층은 유동적인 선 하나에 불과한 필트오버와 자운 사이의 명목상 경계에 있었으며, 국제적인 상업지구 아케이드와 고급 클럽, 연주홀, 사창가 등이 모여 있어 여러 도시 중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중간층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 지역이야말로 자운의 진짜 중요한 일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들은 배관에서 나와 재빨리 위치를 확인한 후, 중간층의 주 도로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필기체로 쓰인 도로의 이정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윈과 케즈 뿐이었다. 케즈가 그들을 이끌고 나간 넓은 도로는 윈이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필트오버와 자운에서 온 남녀들이 색색의 화려한 옷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로 치장하고 즐겁게 한데 어울려 자갈이 깔린 길을 걷고 있었다. 여자들은 목이 둥글게 파이고 밝은색의 허리띠로 장식한 주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긴 프록코트를 입고, 광택을 냈지만 진흙 때문에 하루를 가지 못할 장화를 신은 남자들은 늠름해 보였다.

“사람들이 다 미소를 띠고 있어.” 윈이 그 표정을 흉내 내느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웃고 있네.”

“먹고 살 걱정할 일 없으면 너도 저렇게 웃을걸.” 잰키가 말했다.

윈은 그 말에 대꾸하려고 했지만 니코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고아들보다 희망의 집에 늦게 들어온 잰키는 곧 고아원을 떠나 세상에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처지였다. 저런 까칠한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윈은 그 까칠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미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능하다면 좀 더 나은 곳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세상의 가혹한 현실은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대한 전체의 틀 안에서 자기의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윈은 원할 때면 언제든 아름다운 여자와 손잡고 걷고, 공연을 보고, 달빛 아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열망했다.

충동적으로 윈은 케즈의 손을 잡았다. 케즈는 손을 빼지 않았고, 윈의 심장은 포효를 향해 처음 뛰어내릴 때보다 더 쿵쾅거렸다. 아이들은 니코를 앞세운 채 자기들도 그곳을 다닐 권리가 있다는 듯 거리의 중심부를 거닐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권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때 묻은 옷차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비록 아무도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별로 환영받을 만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윈은 잠시나마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환상을 품었다. 화학공학 조명이 은은히 밝히고 있는 거리를 걸어 다니고, 주위의 사람들이 크림처럼 부드러운 최고의 오리 콩피를 파는 식료품점을 알려주거나 이 연극은 꼭 보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는 그런 환상. 윈은 멋지게 차려입고 동료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곳을 찾은 각 가문의 대표들에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저거 수정 온실이야?” 윈이 벼랑 가장자리 쪽에 격자세공으로 장식된 반투명 유리 돔이 설치된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 케즈가 대답했다. “아래에서만 봤었는데.”

유리 돔은 철교와 팽팽한 케이블로 바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돔 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유리 안쪽에서는 민 머리에 문신을 하고 로브를 입은 정원사가 나뭇가지가 마치 지붕처럼 우거진 키 큰 활엽수 숲을 손질하고 있었다. 붉은색, 금색, 푸른색의 다채로운 꽃들이 녹색 나뭇잎에 대비되어 도드라져 보였다. 윈은 일생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정원사에게 손을 흔들면서, 윈은 꽃향기를 맡고 발아래의 부드러운 잔디를 느끼며 케즈와 저 숲을 거닐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원사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종이 울렸다. 윈은 종소리를 세었다. 총 일곱 번이었다.

“서둘러. 공연이 곧 시작하겠어.” 윈이 급하게 말했다.

잰키는 니코를 돌아보았다. “어디 있는지 진짜 알아?”

“바베트 극장? 응, 알아.” 니코가 또 기침을 하며 입을 가렸다. “알리자를 데리고 한 번 갔었어. 벨준에서 온 그 상인이랑 술 내기를 해서 이겼을 때 딴 돈이 좀 있었거든.”

윈은 그 날 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쿠악시를 연거푸 마시는 것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쿠악시는 독주로, 슈리마에서 온 그 상인의 말에 따르면 염소 젖을 발효시켜 만든다고 했다. 그들이 스무 잔을 마시고서야 상인은 마침내 나가떨어졌다. 니코는 상금을 따고도 그 후 일주일 동안은 숙취 때문에 돈을 쓸 정신이 없었다.

“바로 이 위쪽이야.” 벼랑을 파낸 동굴 같은 광장에 들어서며 니코가 말했다.

개방된 넒은 공간에서 모인 군중이 말하고 협상하며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는 금속 증강체를 갖추고 화공 남작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이들도 몇 있었다. 이들은 수가 적어서 눈에 잘 띄었고, 사람들은 이들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광장의 끝에는 화려한 색과 시끄러운 소리의 웅장한 건물이 서 있었다. 호객꾼들이 들어오라고 외치며 전단을 나눠 주었다. 세로로 길게 홈이 나 있고 가느다란 금맥이 퍼져 있는 검은 대리석 기둥이 거대한 극장 현관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현관 지붕 위에는 야생 동물, 용, 무장한 전사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녹색의 화학 공학 조명이 조각상을 비추었으며, 일렁이는 불꽃 때문에 조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 바베트 극장입니다.” 니코가 허리를 깊이 굽혀 절하며 불이 환하게 밝혀진 건물을 가리켰다.



“입장불가라니 무슨 말이에요?” 니코가 말했다.

두 문지기는 옷은 잘 차려입었지만, 어떤 훌륭한 옷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꿈틀대는 문신이 목과 손목을 덮고 있었고, 둘 중 한 명은 한쪽 팔이 기계 팔이었는데, 동력원이 있어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전기 충격 곤봉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위험한 것? 아니면 그냥 작동이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돈 있어요.” 케즈가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아가씨.” 첫 번째 문지기가 말했다. 윈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화학공학 입 냄새’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케즈가 따졌다.

“복장이 틀렸어.”

“그렇지.” 윙윙대는 기계 팔의 두 번째 문지기가 맞장구를 쳤다. “바베트 부인은 손님들에게 의상 선택에 있어서 어떤 수준 이상의… 위생을 기대하거든. 미안하지만 너희의 의상은 그 기준에 못 미치는구나.”

“그래, 그러니까 너희 동네로 썩 기어들어 가시지.” 첫 번째 문지기가 말했다.

“우리 동네라고?” 케즈가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자운 아니에요? 우리는 다 자운에서 왔다고요, 이 멍청한 아저씨야!”

“꺼져, 꼬맹이들!” 입 냄새가 말했다. “같은 자운이지만 이쪽 지역은 너희 자운과 달라.”

“알았어요.” 니코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

“잠깐만, 뭐라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니코를 쫓아가며 윈이 말했다. “그냥 집에 가는 거야?”

니코는 두 문지기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그리고 입구의 인파 덕분에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후에야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니코가 말했다. “내가 멍청했어. 지하동굴의 첫 번째 규칙을 깜빡했군. 오직 표시가 있는 사람만 앞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10분 동안 광장을 가로질러 마침내 찾던 것을 찾았다. 윈은 극장 문을 계속 확인했다. 사람들이 아직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연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저기.” 핀이 근처의 지붕에서 갑자기 피어오른 에메랄드빛 연기 기둥을 가리켰다. 핀은 그레이 스크레이프 말케브라는 배관설비 관리업자에게 고용되어 일했는데, 그는 통풍관이 심하게 막히면 말라깽이 핀에게 기어 몇 개를 주고는 좁은 배관 속을 들어가 찌꺼기를 청소하도록 시키곤 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자운의 길거리 음식과 필트오버의 고급 음식의 퓨전 요리를 파는 식당이었다. 나른해 보이는 예술가 유형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고, 음식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 코가 맞다면 저건 공용 배관이 틀림없어.” 핀이 말했다. “맡아 봐. 주방의 음식 냄새와 바베트 극장의 수정 버너의 재 냄새가 섞여서 나지.”

“네가 쓸모 있을 줄 알았다니까, 핀.” 니코가 말했다. 그는 식당과 극장 사이의 바위를 잘라 만들어진 골목으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부두에서 수송된 무거운 상자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고, 머리 위로 늘어진 배관들은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기합을 넣으며 상자를 안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무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핀은 배관의 배치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따라가면서 배관의 수를 세고, 배관 속에서 쏴 하고 흐르는 소리나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공기의 냄새를 맡더니 씩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이군.” 그는 바위 표면 속으로 들어가는 가느다란 배관을 가리켰다.

“확실해?” 잰키가 물었다. “네가 잘못 짚어서 우리 모두 물에 쓸려 자운을 돌아다니는 꼴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안 틀렸거든, 멍청아.” 핀이 말했다. “나만큼 검댕이랑 진흙을 뒤집어쓰고 기어 다녀 봐, 그럼 너도 뭐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 수 있는 코를 가지게 될 테니.”



그들은 식당 직원들의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쌓여 있는 상자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핀은 곧 기어 들어갈 수 있는 해치를 찾아내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윈은 해치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거 안전한 거야?” 윈이 물었다.

“지하동굴 출신 고아에겐 충분히 안전해.” 핀이 말했다. “날 믿어. 저 안의 연기를 마시는 것보다 블랙 레인을 걸을 때 폐로 들어가는 돌가루 양이 훨씬 많을 테니.”

윈은 그 말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핀은 어쨌든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그 뒤를 잰키와 케즈가 따랐다. 잰키가 사라지자 니코가 배관을 가리켜 보였다.

“꼬마, 네 차례야.” 니코가 말했다.

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치 안으로 기어 들어가 앞쪽의 무릎이 긁히는 소리, 욕하는 소리, 기침 소리를 따라갔다. 핀의 말에 옳은 점도 있었다. 안의 공기는 고약한 냄새는 났지만 잿빛 대기가 가까워 올 때 매 호흡이 전투처럼 느껴지는 데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니코가 윈의 뒤를 따라왔고, 윈은 팔꿈치와 무릎이 움직이는 리듬에 익숙해졌다. 배관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틈을 통해 빛이 새어 나왔지만, 배관이 절벽을 따라 급격히 경사지자 빛은 사라졌다.

“얼마나 더 가야 돼?” 니코가 뒤에서 외치자 배관 안에서 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대답은 없고 니코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뿐이었다. 윈은 앞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온갖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잰키가 두려워했던 대로 배관 끝이 절벽이어서 모두 떨어져 버린 것인가? 앞쪽에 유독 가스가 모여 있어서 아이들이 기절하거나 질식한 것인가? 아니면 이 주변의 바위도 슬퍼서 그 속으로 기어가는 작은 형체들을 으스러뜨린 것인가?

우울해 하는 벼랑이 모두를 으스러뜨리는 상상이 윈을 공포로 마비시키기 직전, 위에서 손이 내려와 윈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해치를 통해 윈을 끌어올리며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윈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버둥거렸지만 곧 그를 끌어올리는 것이 잰키라는 것을 알았다. 윈은 빛줄기 하나 없는 방의 나무 바닥에 앉혀졌다. 아니, 빛이 없지는 않았다. 가까운 문의 밑에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윈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수없이 많은 공연 소품이 방 안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러 선반에는 가면, 화려한 무대 의상, 배경막, 소품 등이 가득했다.

핀은 말의 앞쪽 반 의상을 머리에 쓰고 방을 돌아다니며 웃고 있었다. 케즈는 가장자리에 인조 보석이 빙 둘러 박혀 있고 눈부신 빨간 보석으로 중앙을 장식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잰키는 검날이 번쩍이는 은빛으로 칠해진 나무 칼을 휘둘렀다.

윈은 니코가 그의 뒤를 이어 배관 밖으로 기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머리가 몽롱했지만, 배관 안의 연기 때문인지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는 환희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잘했어, 핀.” 니코가 먼지를 털어내고 기침을 하면서 회색 가래를 뱉어냈다.

핀은 말 의상을 벗고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활짝 웃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뗐지만, 그 순간 북을 치는 소리와 백파이프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한다.” 케즈가 말했다.



바베트 극장의 내부 장식은 바깥쪽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중앙 홀은 여러 색의 천과 도금된 발코니로 꾸며져 있었고 아치형의 높은 천장에는 넓게 펼쳐진 숲과 높이 솟아오른 산, 그리고 푸르디푸른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반짝이는 크리스털로 장식된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가 천장 중앙에 매달려 공간 전체에 반사광을 보내고 있었다.

이 공간을 채운 수백 명의 사람들은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술에 취해 즐기고 있었고 외투와 자제력을 모두 벗어버린 무용수들도 눈에 띄었다. 한쪽 끝에 설치된 높은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피를 떨리게 하고 발이 절로 춤을 추게 하는 빠른 비트로 쿵쿵 울리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전염력이 있었고, 윈은 케즈가 자신을 이끌고 댄스 플로어로 올라가자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곳이라면 이목을 집중시켰을 다섯 지하동굴 고아의 모습은 여기서는 빙글빙글 도는 무용수들과 가수들 속에 섞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달리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필트오버 보안관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줄 아는 이들의 날렵함으로 움직였다. 핀은 미친 사람처럼 발을 쿵쿵 구르고 팔꿈치와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잰키는 자신만의 음악의 세계에 빠져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흔들어 댔다. 니코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부드럽게 춤추다가 한 번씩 멈춰 예쁜 소녀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윈은 케즈와 함께 댄스 플로어를 누비며 서로의 주위를 돌면서 꿈꾸듯 행복감에 도취되어 춤을 추었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윈은 상관하지 않았다.

화학공학 조명이 샹들리에에 무지갯빛을 던지자 샹들리에는 눈부신 온갖 색채의 빛을 마름모꼴 문양으로 폭발하듯 반사해냈다. 윈은 빛을 잡아보려는 듯 손을 들었다. 케즈도 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빛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는 케즈의 비누와 땀 냄새, 머리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끝이 났다.

육중한 손이 윈의 어깨를 붙잡자 윈은 그 순간을 빼앗겨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크나큰 실망을 느꼈다. 윈은 방해꾼에게 욕을 하고 싶었으나, 그가 쏟아부으려던 욕설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문지기 ‘입 냄새’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내가 지하동굴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나?”

윈은 케즈를 흘깃 바라보고는 그녀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윈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질문에 손을 뻗어 대답했다.

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외쳤다. “뛰어!”

그는 꿈틀대며 입 냄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둘은 댄스 플로어 중간으로 뛰어들어갔다. 케즈는 크게 고함을 질렀고, 그들은 마치 지하동굴에서 갈고리 피하기 놀이를 하듯이 무용수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은 손을 잡고 달렸고, 입 냄새는 그들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입 냄새는 무용수들을 밀어제치며 돌진했지만, 케즈와 윈은 걷는 법을 배운 순간부터 자운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자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보안관, 화학공학 깡패, 괴수단을 늘 따돌렸었다.

뚱뚱한 문지기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입 냄새가 분노에 차 지르는 소리가 심지어 음악을 뚫고 나와, 마치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윈과 케즈는 빙빙 도는 무용수와 가수들 사이에 숨으면서 문지기와 즐거운 추격전을 했다. 케즈는 윈의 손을 꽉 잡았다. 윈은 입 냄새가 가까이 오고 있는데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입 냄새가 드디어 윈의 어깨를 잡으려는 바로 그때, 입 냄새는 핀의 펄럭이는 팔꿈치에 얼굴을 가격당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입 냄새가 땅에 뒹굴도록 두었다. 윈은 이렇게 중독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든 춤추는 발걸음, 뛰는 발걸음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가수들의 합창은 이 순간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음악처럼 들렸다. 그들은 조명과 음악 소리 속에서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때 음악이 멈추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학공학 버너 하나만이 무대를 비추었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무용수들은 한 여자가 무대 중앙에 오르자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마법인지 연출 기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참으로 감명 깊은 입장이었다.

“마마 엘로디야.” 케즈가 말했다.

윈도 마마 엘로디인 줄은 알았지만, 엄격한 중년 부인인 희망의 집의 원장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여신이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우아하게 땋아 올렸고,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자개와 옥으로 만든 구슬은 새로 막 탄생한 별들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입은 빛나는 녹색 드레스는 풍성한 주름이 잡혀 있었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났다.

그녀는 윈이 지금껏 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마마 엘로디가 머리를 들기 시작하자 음악이 천천히 시작되더니 심장 박동을 흥분시키는 템포로 빨라졌다. 그녀의 머리는 음악에 맞춰 들려졌고, 어두운 피부는 다이아몬드 가루로 빛났다. 눈은 혼이 담긴 시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베트 극장에 잡아두려는 듯이 관중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어 놀랐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고, 아몬드 모양의 눈에서 나오는 따스함은 그녀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윈은 마마 엘로디의 선량함이 그를 감싸 안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채 알지도 못하고 지고 다녔던 짐들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듯이 느꼈다.

마마 엘로디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가사는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마치 꿀처럼 반은 말하듯, 반은 노래하듯 윈에게 흘러들어왔다. 모든 음은 따뜻한 여름밤의 나뭇잎처럼 방 안에 소용돌이치듯 흘렀다. 음정이 높아지고 목소리가 커지자, 그 소리에 윈의 피부는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윈은 마마 엘로디의 노래가 자신을 뒤덮고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윈은 자신과 케즈가 연결된 듯한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윈의 눈은 케즈의 눈과 마주쳤고, 그는 그녀도 같은 감정을 느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이상이었다.

윈은 청중 모두와 자신이 연결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는 결코 몰랐던, 가능할 것이라고 꿈꾸지조차 못했던 하나됨과 화합의 느낌이었다. 마마 엘로디의 강력한 목소리가 피부와 뼈를 관통하는 화음으로 방을 채우고 청중의 모든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만듦에 따라 그녀의 손은 공기를 조각하듯 움직였다. 그녀의 피부는 땀에 젖어 빛났고, 푸른 핏줄이 목에 튀어나왔다.

그녀가 이 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일종의 타격을 준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마 엘로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짐에 따라 방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음은 봄에 눈이 녹듯이, 겨울 바다에 해가 지듯이 녹아내렸다. 윈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울면서 마마 엘로디를 향해 팔을 뻗고 노래를 계속하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마마 엘로디는 무대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마마 엘로디는 무대 바닥의 문을 통해 내려가며 사라졌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마지막에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방은 이제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 객석의 조명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하자 윈은 헉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불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였고, 화학공학 조명이 타 버려 매우 낮아진 것을 보았다. 마마 엘로디는 얼마나 오래 노래를 한 걸까? 몇 시간? 몇 분? 알 도리가 없었다. 윈은 완전히 진이 빠졌지만, 동시에 새로 힘을 얻었다. 머리는 가벼워지고 폐는 근래 느낀 것 중 가장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는 케즈를 향해 돌아섰고, 그녀 역시 똑같은 원기회복의 느낌을 받았음을 알았다. 청중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래 친했던 이들, 낯선 이들 가릴 것 없이 방금 함께 경험한 마법을 만끽하고 있었다.
니코, 핀, 잰키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똑같이 깊은 계시를 경험한 상태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윈은 알 수 없었지만, 각자가 모두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형도…?” 윈이 말했다.

“맞아.” 니코가 말했다.

자운의 다섯 고아는 그들이 앞으로 다시는 알지 못할 소속감을 잠시 나누며 서로 얼싸안았다. 안았던 것을 풀었을 때는 두 문지기 입 냄새와 윙윙대는 기계 팔이 주먹을 쥔 채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입 냄새의 코는 비뚤어져 있었다. 보기에 훨씬 나은데, 윈은 생각했다.

“집에 가라고 했을 텐데.” 기계 팔이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 입 냄새가 아직도 피가 나는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한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는 커다란 주먹을 손바닥에 두드렸다.

“여길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아프지 않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군.” 기계 팔이 거의 사과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뒤에서 아름다운 음악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마마 엘로디가 윈의 목 뒤에 손을 얹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따뜻했고, 윈은 그 감촉에 온몸에 진정되는 느낌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과 함께 온 아이들입니까?” 입 냄새가 물었다.

“그렇답니다.” 마마 엘로디가 대답했다.

두 문지기는 이를 좀 더 문제 삼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극장 최고의 가수의 공연에 매혹된 청중 앞에서 그녀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들은 이번에는 맞는 것을 용케 피했지만 바베트 극장에 다시 올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려는 듯 아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러났다.

윈은 마마 엘로디에게 돌아섰으나, 무대에서 그녀를 감쌌던 마법은 그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오니아 공주는 사라지고 자운의 고아원 원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완고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너희한테 교훈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저들한테 때리라고 했어야 하는데.” 마마 엘로디가 그들을 극장 정문으로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녀의 분노를 인정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윈은 재미있어하며 반짝이는 마마 엘로디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윈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잡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마마 엘로디가 그들을 데리고 극장에서 나와 터미널 길로 들어서자 케즈가 말했다. 이곳에 자운으로 내려가는 야간 하강기 역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엘리베이터 위로 뛰거나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내려가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니코, 핀, 잰키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집으로 가도 될 만큼 나이가 들었으므로 손을 흔들고 도망갔다. 윈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케즈와 마마 엘로디와 함께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희망의 집으로 가는 이 여정을 즐겼다.

“그렇게 노래하는 법을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케즈가 물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서 배웠지.” 마마 엘로디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고대 아이오니아 혈통이었는데, 목소리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좋으셨어.”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윈이 말했다.

“바스타야의 노래는 모두 아름다워.”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그렇지만 슬프기도 하지.”

“왜 슬퍼요?” 윈이 물었다.

“진정한 미가 아름다운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지.”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그래서 바스타야의 몇몇 노래는 이제는 부르기에는 너무 슬퍼.”

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부르기에 너무 슬픈 노래가 있을까? 그는 더 묻고 싶었지만, 바베트 극장에서 멀어질수록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윈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절벽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으니 화학공학 조명과 별들이 강철과 유리의 도시 위에 반짝였다. 윈은 구름 뒤에서 달빛 한 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한동안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며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너희는 이번 주 내내 바닥과 냄비를 닦아야 해. 알고 있지?”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케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바닥과 냄비를 닦는 것쯤은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그럼요.” 윈이 대답했다. “좋아요.”


새로운 챔피언 이야기


필트오버 페이지에 자운이 추가되고 함께 합쳐지면서 추후 공개 예정인 내용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챔피언 이야기와 업데이트된 인물 소개 페이지가 공개되었습니다.


챔피언 소개: 시간을 달리는 소년, 에코



자운 뒷골목 출신의 천재 소년 에코는 언제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 그는 직접 발명한 Z 드라이브를 이용해 다양한 시공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험하며 완벽한 순간을 포착한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지만 소중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쓴다. 에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한 번의 시행착오도 없이 매번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에코는 기어 다니기 전부터 간단한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코의 부모인 이나와 와이어스는 아들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들에게만큼은 밝은 미래를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볼 때 오염과 범죄에 찌든 자운은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에코의 부모는 하루 대부분을 공장에서 보냈다. 위험한 여건 속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아들이 필트오버에서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 노동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코의 생각은 달랐다.

에코는 부모님이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며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장은 그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부유한 필트오버인들에게 팔아 어마어마한 이익을 남겼지만 정작 에코의 부모는 탐욕스러운 팩토리우드 감독관과 약삭빠른 필트오버인들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필트오버인들은 적은 돈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최상층을 거닐었고, 어떤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클럽을 즐기고 싶을 땐 중간층으로 내려왔다. 에코의 부모는 에코가 명망 높은 진보의 도시 필트오버에서 훌륭한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에코가 바라는 미래는 아니었다.

에코의 부모에게 자운은 숨 막히는 오염과 어두운 범죄로 점철된 희망 없는 도시였지만 에코의 눈에 비친 자운은 활력 넘치고 잠재력이 무한한 역동적인 도시이자 끊임없이 혁신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는 곳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몰려온 이주민들은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자운을 자운답게 만드는 건 물론 자운의 토박이들이었다. 자운에는 자신의 육체를 기계화한 폭력배들이나 매일같이 못된 짓을 일삼아 수시로 필트오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간쓰레기들도 있었지만 오물 속에서 쓸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지하동굴 채집꾼들, 배관 청소부들, 그리고 수정 온실을 돌보는 원예사들도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자운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다. 이들은 슬기로웠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며 성실했다. 대재앙 속에서도 훌륭한 문화를 영위했고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소멸하고 말았을 자운 같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번영했다. 자운의 정신에 매료된 에코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품으로 자신만의 기계를 만든 뒤 직접 시험해보곤 했다.

자운의 정신에 매료된 건 에코뿐이 아니었다. 에코는 떠돌이 고아들과 호기심 많은 가출 청소년들, 그리고 짜릿한 모험에 대한 열망만큼은 에코에 뒤지지 않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독특한 재능이 있었다. 유달리 높은 곳에 잘 올라가는 아이도 있었고, 조각에 소질이 있는 아이도 있었으며, 그림이나 계획 세우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도 있었다. 많은 자운인들은 정규 교육 과정을 밟는 것보다 견습 과정을 통해 실무를 익히는 방식을 선호했다. 자칭 ‘자운의 잃어버린 아이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뒷골목을 스승으로 삼아 거리를 활보하며 자기들만의 활기차고 영광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자운과 필트오버의 경계에 위치한 경계 구역 시장을 누가 먼저 통과하는지 경주를 벌이기도 했고, 지하동굴에서 중간층, 그리고 최상층까지 이어지는 아찔한 높이의 벽을 타고 올라가 보자고 서로를 부추기기도 했다. 아이들은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자기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에코와 그의 친구들은 스스로를 범죄 조직원이나 화공 펑크족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온전히 보전하기로 했다. 그들은 왜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 자신의 몸을 기계화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나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의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짓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필트오버의 상류층과 육체를 기계화한 폭력배들이 그들의 목표물이 되었다. 아이들은 훔친 물건을 모두 은신처에 가져다 놓았고 은신처의 벽에는 직접 예술 작품을 그려 넣었다. 누구도 자운의 잃어버린 아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에코는 점점 더 기상천외하고 복잡한 발명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러한 발명품을 완성하려면 폐기물 처리장에 ‘숨어있는’ 독특한 부품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에코는 무단 침입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육체를 기계화해서 거대해진 괴수단과 공격적인 보안 요원들은 계속해서 에코와 그의 불량한 친구들을 감시했고, 때로는 그 십대 소년들과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에코는 필트오버의 실험실이나 화공 남작들 소유의 공장에서 폐기물을 도난 당하지 않도록 엄중히 감시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그러한 폐기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코의 손에 들어오면 얘기가 달랐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지면 볼품없는 쓰레기도 어느새 쓸만한 물건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밤, 에코는 최근에 철거된 한 실험실에서 폐기물을 뒤지다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다. 마력을 가진 청록색 보석 조각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에코는 재빨리 그 빛나는 보석의 파편이 좀 더 있는지 찾아보았고, 몇 조각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조각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중간중간 조금씩 끊겼지만 조각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어떻게 해서든 수정의 파편을 모두 찾아내야 했다. 에코는 악취 나는 쓰레기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탑처럼 높게 쌓인 쓰레기 더미 아래 파묻혀 있는 남은 조각들을 찾아냈다. 자운에서 마법공학 수정을 모르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기와 영웅을 더 강력하게 해주는 마법공학 수정은 스스로 에너지를 낼 수 있다고 전해졌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마법공학 수정의 일부가 방금 에코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마법공학 수정 조각을 발견한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에코는 그 폐품처리장에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괴수단이 폐품을 뒤지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에코가 쥐고 있는 수정 조각들이 분명했다. 에코는 가까스로 그들의 눈을 피해 폐기물 처리장을 빠져나왔다.

에코는 마법공학 수정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미약했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정 조각들이 한 데 모이면 각 수정의 모서리에서 치지직 하는 소리가 났고, 곧 공기 중에는 번개 같은 선들이 어지럽게 얽히며 빛을 발했다. 수정 조각들을 떼어 놓으니 자기저항 같은 것이 생겨 에너지가 발산되지 않았다. 수정의 파편들은 한 몸이었던 과거를 기억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에코 또한 불현듯 어떤 순간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듯한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에코의 머릿속은 다양한 아이디어로 가득했지만 마법공학 수정의 실험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정이 폭발하더니 산산이 부서져 먼지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작게 부서진 수정 조각들은 반짝이는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이는 곧 시간 왜곡의 회오리로 변했다. 에코는 잘게 쪼개진 현실의 파편을 목격했다. 그중에는 여러 개의 ‘에코’도 있었다. 에코는 분열된 연속성을 바라보며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 실험은 성공이었다.

에코와 그의 분신들은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힘을 합쳐 에코가 현실 세계를 떠날 때 뚫어놓은 구멍을 복구시켰다.

에코는 산산조각이 난 수정의 시간 에너지를 장치에 담았다. 이론대로라면 이제 이 장비로 시간을 마음껏 조작할 수 있었다. 에코가 새로 만든 기계를 막 시험해보려고 하던 차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은 빨리 올드 헝그리에 올라가 에코의 영명 축일을 축하하자고 졸라댔다. 에코는 장치를 어깨에 메고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아이들은 자운의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오래된 시계탑 올드 헝그리로 열심히 기어올랐고, 중간중간 시계탑의 벽면에 명망 있는 필트오버인들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넣기도 했다.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한 아이가 잡고 있던 나무판자가 뚝 하고 부러졌고, 아이는 미끄러져 첨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에코는 마치 이런 상황을 수천 번 겪어본 사람처럼 방금 전에 수정으로 만든 장치를 즉각 작동시켰다. 에코를 둘러싼 세계는 산산이 부서졌고, 에코의 몸은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입자 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전기로 인한 충격으로 팔에 난 털이 쭈뼛 곤두섰다. 머리가 어지럽고 멍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에코는 그의 친구가 썩은 나무판자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로 두면 방금 전처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터였다. 나무판자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매달려있던 아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판자는 둘로 쪼개졌다. 에코는 얼른 몸을 날려 추락하는 친구의 셔츠 깃을 잡았고 친구를 근처에 있는 바위 위로 던졌다. 그러나 에코가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친구는 쉴새 없이 돌아가는 시계탑의 톱니바퀴 쪽으로 던져졌다. ‘앗, 이게 아닌데.’

에코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고 조정한 뒤에야 겨우 친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코가 친구를 구하는 모습만을 목격한 아이들은 에코의 뛰어난 반사신경에 감탄할 뿐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에코의 지위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에코는 친구들에게 마법공학 수정과 시간 조작에 대해 털어놓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흥분하여 에코가 해낸 일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었고, 심지어는 에코가 구해줄 테니 더 무모한 행위를 저질러보자고 서로를 부추겼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자 에코의 시간 왜곡 장치 Z 드라이브는 꽤 안정적인 성능을 발휘했다. 이 장치만 있으면 폐기물 처리장에서 부품을 빼돌리거나 화학 물질에 찌든 건달들을 두들겨 패주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유혹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 왜곡 장치를 이용하면 매번 멋진 첫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체력만 고갈되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

에코가 마음대로 시간을 조작한다는 소문은 필트오버와 자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자운의 과학자 빅토르는 이 반항적인 천재 소년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에코에게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하기 위해 강력한 기계 장비를 갖춘 자신의 하급 집행자들을 에코에게 보내기도 했다. 한편 필트오버의 저명한 발명가 제이스는 ‘시간을 달리는 소년’이 가진 기술을 면밀히 분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에코는 독립성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누구와도 팀으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에코를 뒤쫓는 사람들이 에코를 잡을 확률은 매우 낮다. 에코는 그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에코는 자운이 높이 솟아올라 진보의 도시 필트오버의 존재를 가려버리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지만 배짱 하나는 두둑한 자운 출신의 소년이 뛰어난 재기와 굳건한 용기를 발휘하면 필트오버의 황금 건물들도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에코에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모든 시간이 그의 손안에 있으니 꿈을 실현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를 바꾸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닐까?


에코 이야기: 자장가
에코의 이야기인 자장가는 유니버스 페이지 오픈과 함께 이미 나왔지만, 자운 페이지에 포함되었습니다.



챔피언 소개: 폭풍의 분노, 잔나



룬테라의 돌풍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그러나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잔나. 그녀는 이제 폐허가 되어버린 자운을 지키는 바람의 정령이다. 그런 그녀를 두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다. 그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설은 바로 수호신으로서의 잔나. 악천후 속에서 폭풍우를 뚫고 나아가며 부디 순항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룬테라 선원들의 간구 속에서 등장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잔나가 남다른 애정으로 자운의 선원들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잔나와 자운, 이 둘의 관계가 결코 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데에는 바로 이러한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잔나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자운 사람들에게 있어 마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미신 한 두 가지쯤 믿지 않는 룬테라 선원들은 거의 없다. 그것도 제법 특이하고 흔치 않은 것이 대부분. 그도 그럴 것이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어떤 선장은 갑판에 소금을 뿌려 놓으면 자신이 탄 배가 해변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바다가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믿는다. 또 바다의 자비를 구하며 가장 먼저 잡은 고기는 그대로 놓아주는 사람도 있다. 모쪼록 온화한 바람과 고요한 바다, 맑은 하늘이 지속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바람의 정령 잔나는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에서 탄생한 존재라고 전해진다.

사실 잔나도 시작부터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새에 불과했다. 출항 후 바람의 세기가 점점 강해질 즈음이면 선원들은 반짝이는 파랑새 한 마리를 발견하곤 했다. 또 돌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경고음이 울리는 것처럼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 곁에서 선원들을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이 같은 전조 현상에 대한 소문이 급속하게 퍼져 나가자 파랑새 목격담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파랑새가 여자의 형상으로 변했다는 소문과 함께 가느다란 귓불과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진 이 신비의 젊은 여성은 바다 위 높은 곳에서 자신의 마법 지팡이로 바람의 길을 안내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전해졌다.

이후 선원들은 죽은 바닷새의 뼈와 굴 껍데기로 허술하게나마 일종의 성전을 만들어 뱃머리 깊숙한 곳에 넣고 다니고는 했다. 더 형편이 좋은 배의 경우 호사스럽게 꾸민 성전을 선수상으로 만들어 돛대에 달고 자신들의 믿음을 과시하면서 바람의 정령이 순풍으로 보답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 후 룬테라의 선원들은 이 바람의 정령에게 ‘잔나’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이는 고대 슈리마 언어로 ‘수호신’이라는 뜻이었다. 점점 더 많은 선원들이 잔나의 존재를 믿고 그녀의 자비를 구했고, 제물도 정성껏 준비해 올렸다. 그럴수록 잔나의 힘은 점점 더 강력해졌다. 초행길을 나서는 선원들의 여정을 늘 함께하는가 하면 암초에 걸린 배를 단숨에 끌어내기도 했다. 또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면 고향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선원들의 어깨를 따스한 바람으로 감싸곤 했다. 그런가 하면 해적이나 침입자 같은 불순한 의도를 지닌 이들은 돌풍과 폭풍우로 완전히 쓸어 버렸다.

잔나는 이런 자신의 역할에 매우 만족해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응징이 필요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도, 잔나는 룬테라의 바다를 지킬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다.

발로란의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는 한 지협에 의해 둘로 갈려있었다. 그래서 서에서 동으로, 다시 동에서 서로 이동하려면 모든 배는 남쪽 대륙의 꼭짓점을 끼고 넘어가는 긴 형태의 극도로 위험한 바닷길을 지나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원은 제법 강한 순풍이 불어와 이 돌덩이로 가득한 해안가를 빨리 지나갈 수 있길 소망하며 잔나에게 제물을 바치곤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지협 연안의 상업 도시 행정관들은 남쪽 대륙 주변의 선박 감시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혹시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는지 늘 주의 깊게 살펴봐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선박 한 대가 항해를 시작하면 몇 달씩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도시 행정관들은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과학자들을 기용해 최근 발견된 풍부한 화학 자원을 이용, 발로란의 주요 바다를 하나로 잇는 거대한 운하 건설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운하 건설에 대한 이야기는 선원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운하가 들어서면 교역 기회가 무수히 많이 생겨남은 물론, 위험천만한 바닷길도 한결 수월하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또 항해 시간도 대폭 줄어 변질되기 쉬운 제품의 운송도 가능해질 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절벽을 무사히 통과하는 데 있어 선원들은 더 이상 잔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정성스러운 제사를 올릴 필요도, 거칠게 일렁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파랑새의 출현을 주시할 필요도 없다. 선박의 안전과 속력은 이제 운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에 좌우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신적 존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터였다. 이 같은 상황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지난 수십 년간 운하 건설이 진전되면서 사람들이 잔나에게 자비를 구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녀를 위한 성전은 바닷새의 먹이로 전락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이 변해버리고 말았다. 물살이 세고 파도가 거칠어지는 겨울 날씨에도 잔나의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잔나 스스로도 자신의 존재는 물론 마법의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마법 지팡이로 돌풍을 소환하려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시들한 바람뿐이었다. 또 바닷새로의 변신 마법을 쓰면 고작해야 몇 분 정도 나는 것에 그쳤다. 그러고는 이내 힘없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불과 몇 년 전과 판이한 현실에 잔나는 너무나도 애통해했다. 안전한 항해를 바라며 그토록 간절하게 자신의 도움을 구했던 사람들. 그들의 변심을 잔나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운하의 완공이 가까워질수록 잔나는 점점 더 무력해졌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잔나의 슬픔은 더욱 깊어갔다. 이제 그녀에겐 남은 건 시들시들 아무 힘없는 바람뿐이었다.

운하의 개통식은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수천 개의 마법공학 장비들이 지협을 가로질러 배치되었다. 도시 행정관들은 물론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참석하여 행사를 지켜보았다. 환한 웃음을 띤 그들의 얼굴에서 상당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바다의 수호신은 필요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개통식과 함께 마법공학 장비들이 작동되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녹아내린 바윗덩이에서 그을음이 피어올랐다. 쾅! 지협 사이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절벽에 금이 가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르르 콰르르 맹렬히 퍼붓는 물소리와 함께 쉬익 쉬익 가스 새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바로 그때,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꺄악!’

행사장은 이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이 재앙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화학 폭탄의 불안정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설계자들의 계산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날의 폭발은 연쇄 지진을 일으켰고 지협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도시 전체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인구의 절반은 동쪽과 서쪽의 충돌하는 해류 속에서 필사적인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순식간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이들은 애걸복걸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 속에서 모두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늘 함께하던 그 이름. 바닷속에서 위험을 만날 때면 여지없이 떠올리던 존재.

잔나였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구원 요청과 마주한 잔나. 그녀는 스스로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수많은 사람이 이미 목숨을 잃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유독성 화학 가스가 도심 거리 곳곳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칫하면 수백 명의 사람이 독가스에 질식할 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잔나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고 잘 있었다. 역시 그녀였다.

잔나는 새어 나오는 가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자욱하게 퍼져있는 매캐한 가스 냄새가 무력한 시민들의 영혼까지 소리 없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대운하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 아무 죄 없는 무고한 시민에 불과했다. 마법 지팡이를 높이 든 잔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강한 바람이 소용돌이치듯 일었다. 돌풍의 위력이 얼마나 거셌던지 잔나의 이름을 소환했던 이들은 자신들마저 강풍에 휩싸여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지 두려움에 떨었다. 잔나의 지팡이는 점점 더 밝은 파란 빛을 띠었다. 지팡이를 꽝! 하고 바닥에 내려놓자 유독 가스는 이내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말끔히 사라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잔나의 도움을 간구했던 이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시는, 다시는 잔나의 존재를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슈욱! 도심 거리 사이로 일어난 강력한 바람과 함께 잔나는 또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졌다. 아주 밝은 파랑새 한 마리가 철과 유리로 된 첨탑 위에 둥지를 틀고는 도시 전체를 관망하고 있다고 말이다.
자운이 재정비되고 그 위에는 빛의 도시 필트오버가 세워졌다. 이후에도 도움이 절실한 순간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바람의 정령 잔나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전해져 내려온다. 자운의 잿빛 대기가 짙어질 때면 사람들은 잔나가 나타나 단숨에 쓸어버리곤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다. 또 화공 남작들의 행실이 극으로 치달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때 갑자기 무시무시한 돌풍이 골목을 휩쓸어버리면 그 역시 잔나가 내민 도움의 손길이라고 생각했다.

잔나는 그저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인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운 사람들이 잔나를 통해서나마 작은 희망을 가져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잔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무리들이 있다. 도시의 좁은 거리를 뚫고 달리는 바람 속에서, 각종 고철과 기계 장비로 만든 잔나의 성전을 바라보며 이들은 잔나의 존재를 느낀다. 또 바람결에 문이 덜컹거리고 줄에 널린 빨래가 휙 날아가는 순간이면 잔나가 다녀간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진보의 날’이 되면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집 안에 있는 모든 문을 활짝 열어 잔나를 맞이한다. 그래서 그녀로 하여금 묵은 공기는 모두 날려버리고 상쾌한 공기를 들여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잔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파랑새가 자운 거리로 날아드는 것을 볼 때면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잔나가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또 과연 나타나기는 할 것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모두가 인정한다. 나를 늘 보호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잔나 이야기: 심호흡



필트오버는 자운을 패배자들의 도시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대놓고 그렇게 말할 자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굳은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자운 없이 필트오버가 어떻게 존재하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을 게 뻔하다. 자운의 성실한 노동자들! 그 생기 넘치는 시장들! 겉으로는 아닌 척, 뒤로는 너도나도 사재기하는 자운의 마법공학 용품들까지! 이런 이야기를 죽 늘어놓으며 자운은 필트오버에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문화의 축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물론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필트오버에서는 자운을 그저 바보들이나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 필트오버의 골든 타워에 들어 갈 수 없는 바보 같은 사람들 말이다.

바로 나 같은 사람들.

지난 몇 달간 오로지 빛을 다루는 일에만 골몰한 끝에 나는 홀로란 가문의 견습생 모집에 지원할 수 있었다. 기계 장치 설비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 열심히 공부했다. 읽고 또 읽으며 책의 모든 내용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손목이 부러졌거나 관절염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동성을 한층 개선한 교정 장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직 필트오버의 견습생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한 단계 한 단계 선발 과정을 통과해 결국 최종 관문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마지막은 간략한 신원 조회 단계로 보스웰 홀로란과의 면접만 통과하면 이제 그토록 고대하던 필트오버에 입성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선발 담당자들 역시 마지막 면접은 그저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하다고 했다. 견습생 최종 선발을 축하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보스웰 홀로란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잿빛으로 얼룩덜룩한 내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우린 하수구 쥐새끼를 뽑으려던 게 아닌데 말이지.”

그는 심지어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당연히 난, 자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명의 바보가 추가된 셈이다.

잿빛 거리는 다시금 나를 환영해 주었다. 평상시의 잿빛 대기는 그다지 짙게 깔려있지 않아서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피를 토해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가 ‘잿빛 천지’라고 부르는 그런 날이다. 숨을 쉴 때마다 질식할 것 같은 스모그. 가슴은 꽉 조이는 듯 답답하고 내 눈앞의 손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 잿빛 도시 전체가 나를 에워싼 채 점점 내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다.

이럴 때면 나는 잔나에게 기도를 한다.

자운의 모든 이들이 잔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만큼은 잔나의 독실한 신자였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창밖을 서성이던 파랑새가 한 마리 있었노라며 나의 앞날이 평탄할 것임을 전해준 이가 바로 잔나라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의 믿음은 아주 강했다.

물론 나에 대한 잔나의 예견은 맞지 않았다. 너무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말이다. 몇 해 전, 어머니는 지하동굴 채집 중에 발생한 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오직 어머니가 남긴 장치 몇 개에 의지한 채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친구를 잘 사귀는 재주도 없었고 못된 놈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또 내가 좋아하던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 노력했고 필트오버로 가겠노라 다짐하며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토록 믿었던 잔나는 나를 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서 받은 펜던트만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가 봤다는 파랑새가 새겨진 나무로 된 펜던트.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운 때를 위해 갖고 있던 것이다.

벤치 같은 건 찾아볼 새도 없이 나는 그저 젖은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셔츠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 늘 지니고 다니던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나는 이내 잔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입 밖으로 크게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약 기운에 취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난 그렇게 잔나에게 말을 걸었다.

잔나에게 뭘 달라고 요구한 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의 내 일상을 풀어놓았다. 오늘은 어땠는지, 어제는 무얼 했는지,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얼마나 두려웠는지,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잿빛 도시의 지하동굴 밑으로 말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말이다. 때로는 숨이 탁 트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고 매일 두려움에 질려 울기 직전까지 겁을 내며 살아야 하는 삶을 벗어나고 싶은데, 사실 나보다 훨씬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이런 투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다는 것. 그래서 가끔은 그냥 지하동굴 아래로 빠져 엄마처럼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을 한다는 솔직한 심정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 보였다. 지하동굴에 빠지면 비록 내 폐는 물로 가득 차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죽음이라는 두 단어로 말끔히 해결될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난, 잔나만큼은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디에 있든, 잔나만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순간, 부드러운 바람결이 마치 내 뺨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잔잔한 바람은 가볍게 일렁이듯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얼굴과 머리를 감싸듯 스쳤다. 하지만 순식간에 세찬 돌풍으로 변해버렸다. 입고 있던 내 외투 자락이 펄럭일 정도였다. 나는 마치 강력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 느껴졌다.

자운의 잿빛 공기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강력한 소용돌이와 함께 금세 맑아졌다. 중간층에 있는 다른 행인들이 스모그가 걷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바람이 멈췄다.

그리고 잿빛 하늘도 맑게 개었다.

휴우- 이제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공기의 느낌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달랐다. 살며시 조심스레 몰아 쉬는 그런 숨이 아니었다. 폐 안쪽 깊숙한 곳으로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가득 채워지는 듯 느껴졌다. 자운은 더 이상 잿빛 하늘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 필트오버 꼭대기를 비추던 강렬한 태양은 이제 자운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트오버 사람들은 언짢은 듯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눈에서 자운을 가려주던 그 잿빛 하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필트오버의 높이 솟은 수많은 교량과 난간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선명하게 자운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레 바뀐 현실에 필트오버 사람들은 당황한 듯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하 빈민가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몇몇은 노골적으로 쏘아보기도 했다.

바로 그때, 나는 한 사람과 다시 마주쳤다. 보스웰 홀로란이었다. 케이크 하나를 손에 든 그는 이번에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역겨움의 표현인 것 같았다.

경멸하는 듯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이번에는 나도 질세라 같이 쏘아보았다. 그러던 중 문득 어깨 위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잔나였다.

내 어깨를 따뜻하게 어루만진 후 무릎을 꿇은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다 괜찮을 거야.” 그녀가 말했다.

잔나의 머리칼이 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마치 오랜 비가 내리고 난 뒤의 공기 같은 익숙한 내음이 풍겨오는 듯했다.

“지금은 힘들 수도 있어.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괜찮아. 앞으로 네게 일어날 모든 일이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행복해질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얼굴은 금세 따스한 온기와 눈물로 가득 채워졌다. 언제부터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자 마치 흐린 구름이 걷히듯 눈앞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난 후 그녀의 팔을 붙잡고 선 내게 그녀는 연신 ‘내가 여기 있으니 괜찮아. 앞으로는 나아질 거야.’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꼭 안아주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자운의 중간층과 필트오버 난간에서 있는 모두가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저 너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렴. 날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뭔가 대답하려 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고마워.”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물로 젖은 내 뺨에 입을 맞춘 후 마지막으로 짧은 포옹을 했다.

서둘러 일어선 그녀는 미끄러지듯 내 옆을 스쳐 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온전한 모습을, 나는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어깨를 감싸고 포옹을 하는 등 그녀가 나를 직접 만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천상의 모습이었다. 길고 뾰족한 모습의 귀, 땅에 닿지 않는 발,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도 흩날리는 머리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갑게 느껴질 만큼 짙고 푸른 눈동자. 그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는 그저 꿈만 같았다.

이후 잔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윙크를 하고선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이내 강력한 돌풍이 불어 닥쳤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강렬하게 밀려든 탓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가려버렸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땐 그녀는 이미 떠난 후였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다. 이제 바람의 방향은 필트오버, 그리고 얼이 빠진 듯 우리를 바라보는 필트오버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바람의 속도와 크기는 겉잡을 수 업이 커져갔다. 필트오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극한의 강도에 치달은 돌풍에 사람들의 옷은 찢겨 나갔고 머리칼은 금세 뽑혀나갈 듯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보스웰 홀로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람에 밀려 서 있던 난간에서 떨어진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마치 죽음의 터널로 곤두박질치는 듯 보였다. 이내 또 다른 돌풍이 그를 향해 불어 닥쳤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 강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번 돌풍은 마치 그에게 죽음의 길을 친절히 안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스웰 홀로란이 발악하는 꼴을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지는 내내 쇳소리를 내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좀처럼 들어주기 힘든 괴성이었다. 품위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퍼-얼럭! 퍼-얼럭!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위를 향해 펄럭이며 물웅덩이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그의 얼굴을 세차게 강타했다.

“난……” 그가 입을 열자마자 바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엉덩이부터 철퍼덕 빠져 버리자 제법 비싸 보이는 옷가지는 전부 엉망이 돼버렸다. “으악!” 그러고는 성난 아이처럼 물속에서 텀벙거리며 놀람과 고통, 분노가 섞인 비명을 질러댔다.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보려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미끄러져 주저앉을 뿐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 보스웰 홀로란, 그는 이제 세상에 다시 없는 바보처럼 보였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챔피언 소개: 비밀 병기, 자크



자크는 화학공학 지층을 따라 흐른 독성물질이 자운의 지하동굴 깊은 곳에 위치한 웅덩이에 모여 만들어진 생명체이다. 이처럼 변변치 못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원시적인 진흙의 상태에서 지성을 갖춘 존재로 성장했다. 그는 자운의 배관 속에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거나 자운의 망가진 기반시설을 재건하기 위해 이따금 모습을 드러낸다.

자운의 어린이들이 자크를 처음 만난 것은 오수 연못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놀 때였다. 아이들이 던진 돌 중 일부가 되돌아왔던 것이다. ‘되돌아오는 연못’은 자운의 지하동굴 지역 거주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마침내 어둠의 화학공학 연금술사들의 관심을 끌기에 이르렀다. 거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사들은 연못의 물을 펌프로 퍼 올린 후 여러 통에 나눠 담아 연구실로 가져갔다.

정적 강화와 부적 강화를 테스트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실험을 통해 연금술사들은 연못 내의 응고된 덩어리에 향정신성 경향이 있음을 알았다. 간단히 말하면, 덩어리는 주어진 자극을 그대로 반영해 반응했다. 잘 대해주면 기분 좋은 아이처럼 명랑한 모습을 보였으나, 고통을 가하거나 공격을 하는 실험을 할 때는 무시무시한 파괴가 뒤따라 숱하게 많은 지하동굴 채집꾼들이 증강체를 갖추고도 목숨을 잃었다.

연금술사 대다수는 이를 단순한 반사 작용으로 치부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연금술사가 두 명 있었다. 그들은 전적으로 전례 없는 공격성을 띤 생명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안된 듯한 실험 방식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둘은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갔고,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고 있는 인물이 폭력적인 기질과 유혈이 낭자한 갱단의 싸움 등으로 악명이 높은 화공 남작 사이토 타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타케다 남작은 치명상을 입지 않고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으며 어떤 명령에도 복종하는 전사를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두 연금술사는 프로젝트의 진짜 이름 또한 알아냈다. 바로 ‘자운 변형 전투 크리쳐’였다.

두 연금술사는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행동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중, 이 끈적이는 젤 형태의 덩어리가 자극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단순한 모방 그 이상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특별한 자극 없이도 나타나는 행동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각력이 있음을 방증하는 행동이었다. 두 연금술사는 이 생명체에게 자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크가 사고력과 감정을 가진 존재의 행동을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은 이 연구 결과를 연구팀장에게 보고했지만 무시당했다.

이 사안이 그대로 묻히기를 원하지 않은 둘은 연구팀의 폭력적인 가르침을 상쇄하기 위해 은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한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한 연구자가 손을 다쳤을 때 자크는 슬픈 감정 표현을 하고, 또 다른 연구자가 연구실에서 쥐를 죽였을 때는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두 연금술사는 동료들이 자크에게 잔인한 실험을 하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자운에서 진보의 날 기념식이 열려 연구실에 아무도 없을 때, 두 연금술사는 자크를 바퀴가 달린 오수 정화조로 옮겨서 자운의 멀고 외딴 장소로 데려갔다.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자 타케다 남작의 보병대가 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자운은 매우 큰 도시이므로 두 연금술사는 추격자로부터 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크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으나, 자크는 둘을 가족으로 여겨 다른 곳에 가기를 원치 않았다. 둘은 자신에게 친절함을 베푼 유일한 존재였고, 또한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더 받고 싶었다. 사실 두 연금술사는 자크의 반응에 기뻤다. 자크에게 정이 들어 그를 입양한 아들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케다 남작의 수하들로부터 숨어 살기 위해 그들은 신분과 겉모습을 바꾸고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지하동굴의 외딴 지역을 거주지로 삼았다. 자크는 부모의 목소리를 흉내 낼 줄 알게 되었고, 곧 자신의 모습을 젤리 덩어리 형상에서 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자크는 오랜 기간 양부모와 함께 살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오수 연못이나 벼랑의 바위틈에 숨었다. 그의 ‘부모’는 자크에게 그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 가득한 곳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자크에게 태양 관문 위로 뜨는 달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자운의 상업지구 건물 지붕에 비친 무지개의 찬란한 향연, 그리고 자운 중심부의 활기차고 북적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또한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할 수 있는지도 설명해주었다. 자크는 사람들이 인색하고 불친절하며 증오와 편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고, 이목을 끌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이 가진 기술로 주위 사람들을 돕는 부모를 도왔다.

자크의 부모는 환자를 치료하거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등 자신들의 화학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때가 자크의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는 거의 제한이 없다시피 뻗어있는 자운의 배관과 도시의 기반암에 있는 수많은 틈을 통해 자운을 돌아다녔다. 자크는 지각력이 있는 존재였으므로, 주위 환경의 지나친 자극에 압도된 나머지 주변의 감정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일시적으로 그 감정에 몰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종종 악당들에게 억압당하는 이들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운에는 자크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소문의 대다수는 자크의 도움에 관한 것이었지만, 공장이 파괴되거나 지하동굴 주변 지역에 크레바스가 생긴 것처럼 좋지 않은 일을 자크의 탓으로 돌리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은 마침내 타케다 남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남작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자크를 되찾고자 신체를 증강한 깡패 무리를 보냈다. 남작의 연금술사들이 자크가 들어 있던 통에 남은 액체로 자크와 같은 생명체를 복제해보고자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타케다 남작은 자크를 되찾고 싶어 했고, 남작이 보낸 깡패들은 자크 부모의 집을 에워싸고 공격을 감행했다. 화학공학 연구자로서 방어를 위한 비책이 있었던 자크의 부모는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저항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고, 결국 그들을 생포하라는 타케다 남작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크의 부모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자크는 자운의 깊은 지하 지층을 탐험하는 중 부모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운의 배관을 타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부모를 구하기에 너무 늦은 상태였다. 부모의 시신을 보고 자크가 느낀 압도적인 분노는 남작의 수하들이 지금껏 경험한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자크는 맹렬하게 몸을 뻗고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으스러뜨리며 공격했다. 슬픔과 분노로 인해 자크는 주변의 집 수십 채 또한 파괴했으며, 전투가 끝날 때쯤 남작의 부하는 모두 사망했다.

전투에서의 흥분된 감정이 의식에서 빠져나가자, 자크는 자신이 파괴한 집들을 보며 후회에 사로잡혔고, 부모가 하던 좋은 일들을 지속해 나가기로 맹세했다. 자신이 만든 폐허를 재건하는 작업을 마친 자크는 즉시 자운의 광대한 배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자크는 자운을 관통하는 굴과 동굴 속에 혼자 살면서 자운 시민들의 여러 감정 속에 푹 잠겨 있다. 이는 그를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한다. 도시의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 모두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크는 일종의 도시 전설로, 바위틈이나 부서진 배관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생명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통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나타나는 자크이지만, 어려움의 시기가 닥쳐 자운의 분위기가 암울하게 변했을 때 출현하는 자크의 모습은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자크 이야기: 보호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의 황금 시간대.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팩토리우드의 사람들 대다수가 이때 일과를 마친다.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지만 그래도 그날의 업무는 끝이다. 일을 뒤로하고 따뜻한 저녁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착하고, 나는 언제나 내 젤리 같은 몸을 팩토리우드를 둘러싼 바위틈 속에서 기분 좋게 비틀곤 한다. 나는 갓 태어난 아들을 보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남자에게서 그의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경계 구역 시장에서의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기대하는 부부의 행복감도 즐긴다.

사람들의 생각이 내게로 스며든다. 따뜻한 목욕을 하듯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가끔 너무 뜨거워져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사람 중에는 행복하지 않은 한둘이 있게 마련이다. 어찌 됐건 간 자운에서의 삶이 매우 퍽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있고 앞으로의 근무 시간을 생각하며 속을 끓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을 모두 흡수한다.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쁜 감정들은 가끔 나를 화나게 하지만, 그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부모님은 가끔은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도 괜찮다고 가르쳐 주셨다. 나쁜 감정이 없다면 좋은 감정의 소중함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리가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질 때까지 그들을 따라간다. 몇몇 나쁜 감정이 남아 내 머릿속으로까지 들어왔고, 이를 몰아내기 위해 나는 뭔가 좋은 일을 하기로 했다. 나는 한동안 고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손대지 못했던, 금이 간 환풍구로 스미듯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몸속의 금속 조각을 모으고, 이 조각들을 부정형의 몸에서 밀어내어 금이 간 곳에 댄 후 외피의 온도를 올려 용접했다. 모든 금 간 부분을 때우자 저 위의 필트오버에서 펌프실을 통해 내려오는 깨끗한 공기가 다시 흐르게 되었다. 덕분에 아래 자운의 거리에서 폐병을 앓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배관의 바닥으로 내려가면 지하동굴 지역의 윗부분에 다다른다. 이곳은 별로 좋지 않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얼마 안 되는 그것마저도 빼앗으려는 악당들이 많다. 화학 공장에서 흘러나온 독성물질과 오수로 가득한 오수 연못은 내가 연구실의 표본으로서 홀로 보냈던 시간을 기억나게 한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화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면 의도치 않게 주위에 있는 것을 부술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싫기 때문에, 나는 별빛 상업지구의 숲 아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위틈에 들어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곳은 언제나 좋다. 밖에 나온 사람들이 갤러리를 구경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저녁을 먹거나 배우들의 풍자 공연을 보러 간다. 분위기가 따뜻하고 친근한 이곳은 자운의 모든 것을 즐기며 잠겨 있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이다.

외진 거리 아래를 통과할 때 찌르는 듯한 괴로움의 감정이 내게 파문을 일으켰다. 공포와 고통의 떨림이 액체로 된 내 살을 괴롭게 했다. 나는 이 감정이 싫었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이 괴로움은 지하동굴 지역의 저 깊은 곳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곳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자주 일어나는 곳이니까. 그런 나쁜 일이 여기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는 이 감정이 점점 더 내게 스며들수록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이 감정이 더 퍼지는 것을 막고자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나는 내 몸을 한 금속세공사의 가게 아래를 지나는 부식된 배관으로부터 밀어 올렸다. 내 몸은 뒤틀린 마룻널 아래 공간을 채웠다. 마루에 설치된 창살 달린 통풍구를 통해 빛이 몇 가닥 들어왔다. 위에서는 화난 목소리들이 들렸다. 고함과 어떤 남자가 우는 소리. 나는 몸을 창살에 바짝 눌렀다. 내 젤리 형상의 몸이 갈라지고 창살 반대편에서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몸을 강하고 빠르게 밀어붙여 가게 안으로 들어와 다시 내 모습을 형성했다.

가게의 주인 남자는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는 복부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의 아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는 폐허가 된 가게 안에 서 있는 남자 네 명에게 팔을 뻗고 있었다. 나는 이런 놈들을 안다. 지하동굴 지역에서 늘 보는 놈들이다. 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돈을 빼앗거나 생계 수단을 파괴해 버리는 깡패들.

가게 내부는 화학공학 램프로 밝혀져 있고, 램프 중 하나는 정육점에서 쓰는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들고 있었다. 반대쪽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고기를 매다는 갈고리가 붙어 있었다. 다른 세 남자는 근육질의 단순한 멍청이들로 캔버스 천으로 만든 작업복을 입고 두꺼운 확대 렌즈 고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그들 위로 솟아오르자 그들의 멍청한 눈이 깜짝 놀라 커졌다. 나는 몸을 부풀렸고, 녹색을 띤 사지가 힘을 받아 팽창했다. 나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입을 형성했다.

나는 이놈들을 정말 괴롭게 하고 싶었다. 그들의 감정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가게 주인을 괴롭힌 만큼 그들을 괴롭히고 싶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말했다.

내 오른팔이 날아가 첫 번째 놈을 날려버렸다. 그는 문 옆 금속 지지대에 처박혀 일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 놈은 무거운 철 곤봉을 휘둘렀다. 지하동굴 채집꾼들이 들고 다니는 초대형 렌치였다. 렌치는 내 몸 한가운데에 맞았지만 내 유연한 살에 즉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몸을 굽혀 놈을 들어 올려 격자세공이 된 천장의 대들보로 던져 꽂아버렸다. 바닥으로 다시 떨어진 놈의 사지는 내가 봐도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세 번째 놈은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를 따라잡아 팔을 대들보 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튕겨 발을 놈의 등에 메다꽂았다. 놈을 바닥에 때려눕혔을 때, 놈들의 대장이 손에 달린 갈고리로 내 등의 중앙을 갈랐다.

아프다! 아, 얼마나 아픈지. 고통 때문에 몸의 응집력이 떨어졌다. 나는 녹색의 액체 방울 소나기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공간감을 잃은 내게는 세상이 수천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이고 느껴졌다. 대장은 나를 내려다보며 서서 듬성듬성 빠진 이를 드러낸 채, 나를 죽였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기뻐하며 바보 같이 웃고 있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이 증오의 마법 물약처럼 내 속을 흘렀다. 나는 이 감정을 느끼기 싫었다. 내가 배운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게 주인 부부를 돕기 위해서는 내 속을 채운 분노를 이용해야 했다. 이 분노를 저 악당들에게 쏟아부어야만 했다. 놈이 나를 완전히 죽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채 깨닫기 전 흩어진 나의 액체 방울이 모여 몸이 원상복구 되었다. 나는 바닥에서 밀려들 듯 몸을 일으켜 말뚝 박는 기계처럼 단단한 밀도로 그에게 충돌했다. 우리는 벽을 박살 냈고, 놈은 충격의 여파로 처참한 모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는 분노가 서서히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벽에서 내 몸을 벗겨냈다. 그리고 가게 주인 부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고는 인간과 비슷한 형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주인 남자는 공포와 두려움에 차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엄청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자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부드러웠다. 나는 그녀의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고는 즉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그녀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내 몸의 일부 조각을 잘라 그녀의 상처에 덮자 내게서 열기가 퍼졌다. 내 몸의 일부, 다시는 자라나게 할 수 없는 일부분을 남기는 것이지만, 기꺼이 줄 수 있었다. 그녀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준 내 몸 조각이 그녀의 상한 살을 치료하고 찢어진 조직을 회복시키며 상처가 난 복부를 자극해 재생되도록 했다. 가게 주인은 아내의 상처에 손을 대보고는 피부가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고마워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힘을 그처럼 팽창시켜 사용하고 나자 기운이 빠지고 몸이 가늘어졌다. 나는 몸의 응집력을 느슨하게 풀어 바닥의 창살을 통해 흘러 배관으로 돌아갔다. 내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바위틈으로 흘러 좋은 감정으로 가득 찬 장소로 돌아가는 것. 나를 재생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자운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느껴야 했다.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야 한다.

나는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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