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또 당신인가요. 제시. "

" 아... 미안하게 됐어... 오늘 하루도 신세 좀 질게. 의사 아가씨. "

다 죽어가는 주제에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면서 소파 위로 몸을 던지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난 아직 신세를 져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라고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테니 하지 않기로 한다.

푹 한숨을 내쉰 앙겔라는 책상 서랍을 열어 소독약과 면봉, 그리고 붕대를 꺼낸 후에 조심스럽게 맥크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시체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엎드려 있던 그가 몸을 돌려 똑바로 누우면서 말했다.

" 치료는 됐어. 이런 건 자고 일어나면 나으니까. "

아까도 말했지만 피를 철철 흘리며 소파를 더럽히고 있는데다가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주제에 허세를 부려봐야 기도 안 차기에 조용히 면봉에 소독약을 바른 후에 다친 부위를 일부러 세게 힘을 주어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 저는 외과의지, 정신과 의사가 아니에요. 그러니 허언증 치료는 다른 사람을 알아보셔야할 거에요. "

" 이런, 미운 털이 박혀도 아주 단단히 박혔구만. "

" 끼칠 수 있는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다니면서 호의를 바라셨나요? 제가 당신이였다면 입이 열 개가 있어도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을 거에요. "

" 너무 그렇게 화 내지 말라고. 예쁜 얼굴에 주름이라도 생기면 아깝잖아. "

듣자듣자 하니까 이 삼류 건달 양아치 한량이 정말! 화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맥크리의 얼굴을 노려본 앙겔라는 어느새 잠들어버린 것인지 감겨있는 그의 눈을 보고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정말이지... 제멋대로네. "

맥크리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붕대를 감는 것으로 치료를 마친 앙겔라는 잠시 멍하니 그가 잠들어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탁상 위에 올려둔 자신의 휴대 전화를 집어들어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파리하, 지금 시간 되나요? "

저 능글맞고도 막무가내인 남자와 둘이서 밤을 보내느니 굉장히 무뚝뚝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배려심 깊은 연인과 잔을 나누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의자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입은 앙겔라는 맥크리의 얼굴을 덮고 있던 촌스러운 카우보이 모자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 몸이 괜찮아지면 알아서 귀가하도록 하세요. 혹시라도 없어진 물건이 생긴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그런 줄 아시고.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대답하세요. "

" ... 걱정 말고 다녀와. 연인을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

말이나 못하면.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앙겔라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애인이 초조해하면서 택시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와 기다리고 있을 약속 장소로,

그리고 맥크리는 잠에서 깨어나면 상대의 앳된 얼굴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하지만 그 느낌은 초콜렛처럼 매우 달콤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이름과 나이는 물론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도 알 수 없는 꿈 속의 소녀를 만나러.

" 당신이 정신과 의사가 아닌 게 참으로 유감이야, 앙겔라. "

*

" ...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하나는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휴대 전화의 전원을 켰다.

최근 통화 목록을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거의 세 자릿수에 가까운 숫자로 와있었다. 발신자는 딱 한 사람,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자신의 주치의를 맡고 있는 아나였다.

" 할머니도 참... "

너무 호들갑스러우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됨과 동시에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과거의 자신이였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였으므로.

- 띵동

아나에게 전화를 못 받아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는 도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좋은 느낌은 틀리지를 않는 걸까.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현관문 앞으로 간 하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민에 빠졌다.

이 이른 새벽에 찾아올 사람은 딱 한 명 밖에 없기에 문을 열어야하나 말아야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잠시 후, 하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해야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 정말 안타깝게도 상대는 하나의 고민을 이해해줄만한 위인이 절대 아니였고, 그에 따라 어마어마한 파열음과 함께 현관문이 박살이 난 채로 저 멀리 날아가바렸다.

그리고 얼이 빠져버린 표정으로 날아간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앞에 나타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수염이 잔뜩 난 중년의 남성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모자를 살짝 들어올려보이며 말했다.

" 여어, 오랜만이지. "

" 남의 집 문을 박살을 내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 "

" 그러니 빨리 문을 열었어야지. "

" X같은 새끼! 진짜 죽여버리겠어! "

이를 갈면서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손쉽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 X발! 이거 안 놔?!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니까?! 놔! "

" 오늘도 기운이 넘치는구만. 물론 곧 그 넘치는 기운을 나에게 바치게 될테지만. "

목에서 끔찍한 느낌이 느껴졌다. 그딴 지저분한 수염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입을 어디다가 들이미는 거야. 전력으로 발버둥을 쳐봤지만 근력의 차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 그럼 오늘 하루도 신세를 지도록 하지. 몸에서 힘을 빼도록. 반항해봐야 너만 아프다. "

" 지랄하지 ㅁ...! 으으으읏... "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목에 송곳니가 박혔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피가 빨려나갔다. 실제로는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이 답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 ... 음, 끝내주는군.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

" X... 바알... 죽여버리... 겠... "

" 이런, 입이 거친 여자는 인기가 없다고? 더군다나 너같이 조그만한 꼬맹이는... 차라리 애교를 부리면서 달라붙어오는 쪽이 어울리겠군. "

" ㄱ... 그... 입... 닥쳐어어...! "

" 입 닥치고 덮치기나 하란 뜻인가? 명령조인 게 마음엔 안 들지만 일단은 분부대로 해주지. "

안 그래도 피를 잔뜩 빨린 탓에 몸에 기운이 없는데 빌어먹을 흡혈귀와 키스를 하게 되자 영혼이 빨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나 할머니, 앞으론 전화 꼬박꼬박 받을테니까 제발 살려만 주세요.

이를 갈면서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아나에게 들리지 않을 구원을 요청하며, 하나는 쾌락의 지옥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

잠에서 깨어나 몸을 움직여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뻐근함은 물론이고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은 어찌나 멀쩡한지 피로감을 느낄 수 없었다.

" 서큐버스(몽마)인 건 아닌가 의심스럽군. "

꿈 속에 소녀가 나왔다 하면 그 다음 날은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진다. 처음에는 앙겔라의 약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치료에 사용한 것은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소독약이였다.

- 당신에게는 이 정도도 과분해요.

그래도 좀 좋은 약을 써주면 어떠냐고 불만을 표출했을 때, 앙겔라가 지어보인 표정과 내뱉은 독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 예술이였지. "

과거를 회상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맥크리는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카우보이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집 주인인 앙겔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였다. 아마 자신의 주량을 넘겨서까지 마구 술을 들이붓다가 그 무뚝뚝한 이집트 여자에게 업혀 모텔에 실려갔겠지.

몸이 괜찮아지면 알아서 귀가하라고 본인이 말했었고, 테이블 위에 놓여진 지폐들은 누가 봐도 챙겨가라고 냅둔 것이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지폐들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은 후에 앙겔라의 집을 나선 맥크리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서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갱단의 아지트로 돌아가면 그 빌어먹을 중2병 영감탱이와 눈을 마주쳐야하니 사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창 근무중일 것이 분명한 은인을 찾아가기엔 너무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젠장... 꼴사납게 됐군. "

욕설을 내뱉으며 일단은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기 위해서 은퇴한 독일군 할배와 전직 강력계 형사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하겠지만 아지트보단 낫겠지.

피식 웃으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맥크리의 눈에 어떤 소녀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과연 우연이였을까, 아니면 인연이였을까.

" 저 꼬마는... "

분명 그 소녀다. 꿈 속에 나왔던. 유일하게 기억을 하는 것이니 장담컨대 확실할 것이다. 반가운 느낌이 들어 소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다가가려는 순간, 머릿속에 얼음물이 뿌려졌다.

맥크리가 소녀를 만났다고 기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꿈 속의 기억, 이 쪽이 반갑다고 해서 저 쪽도 이 쪽을 알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이 쪽도 얼굴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을 걸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게다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 삼류 건달이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건다. '

자신이 보아도 그림이 이상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범죄로 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 ... 젠장. "

역시 갱단 따위에 들어가는 게 아니였어. 어렸을 적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겁대가리 없는 자신을 욕하며 모자를 푹 눌러 쓴 맥크리는 빠르게 소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멱살을 잡아오는 소녀의 손에 의해 땅바닥에 몸을 눕히고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아야했다.

" 이젠 집 밖에서도 지랄할 생각이냐?! 것보다, 뭔 놈의 뱀파이어가 대낮에 돌아다녀?! "

" ... 뭐? "

" 됐고! 일단 좀 맞자! 내가 죽여버린다고 분명히 말했었지!!! "

영문을 알 수 없는 전개에 맥크리가 뭐라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그의 얼굴 한복판엔 소녀의 작지만 매운 주먹이 꽂혔다.

-

팬아트도 아니고 카툰도 아닌 팬픽이지만 마땅히 올릴만한 게시판이 없는 것 같아서 가장 비슷한 취지의 게시판에 올려봤습니다.

만약 게시판 혼동으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글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벽 감성으로 쓴 오그라드는 글을 봐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