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트교는 대부분 부패한 교회와 목사들이라는 개신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거나, 교황이나 바티칸, 콘클라베같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나 나와는 먼 얘기로만 인식되죠. 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불가지론에 가까운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신앙의 유무와는 관계 없이 서양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하기에 이렇게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 서로마의 몰락과 대이동


▲ 기원후 600년의 유럽


유럽사의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준은 로마입니다. 보통 게르만인 장군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황제를 폐위시킨 것을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간주하며 -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언제나 "동"로마가 아니라 "로마"라고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 이후는 동로마, 혹은 비잔틴 제국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여러 나라들이 세워졌으나, 아직까지는 서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국가들이었지 국경이나 민족 등의 개념이 매우 약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아직 이탈리아의 대부분과 로마를 지배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마 제국은 아직 서유럽에 강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나,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분쟁이 심화되며 점점 서방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 기원후 700년의 유럽

이후 서로마가 무너지며 훈족을 피해 이주해온 롬바르드인들과 작센(=색슨)인, 프랑크인들은 각자 이탈리아, 영국과 독일, 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게 됩니다. 이런 이민족들의 유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로마 대주교구는 필사적으로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사업들을 진행합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온갖 토속 종교들을 믿고 있었기에 예수의 행적을 그린 그림이라던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 등의 "실질적 증거"를 보여주는 식으로 개종을 도왔는데, 이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는 충돌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 교회와는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5대 대주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들은 모두 평등하나, 현실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강력한 기반이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가장 권력이 강했기에 이 당시의 로마 대주교구는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의 아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이런 상태에 만족할 리가 없죠.

2. 샤를마뉴와 신성 로마 제국


▲ 분열된 프랑키아 왕국


문제는 위의 "기원후 700년의 지도"에서 프랑키아 왕국을 다스리던 페핀이 사망하며 발생했는데, 프랑크인들은 자식들에게 땅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관습을 따랐기에 페핀이 죽으며 그의 두 아들 카를과 카를로만에게 국가가 분열되서 상속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의 지도에서 진한 보라색이 카를의 영토, 탁한 분홍색이 카를로만의 영토입니다.


▲ 롬바르디아 왕국의 상징인 철왕관

남쪽에서 이탈리아를 점거하고 있던 롬바르드인들의 왕 데시데리우스는 첫째 딸 베르트라다를 카를과, 둘째 딸 게베르가를 카를로만과 결혼시키며 둘 모두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민족을 왕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귀족들의 반발에 의해 카를은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데시데리우스는 카를에 대한 동맹을 철회하고 카를로만을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 카를과 카를로만의 어머니 베르트라다의 초상화

그러나 카를은 어머니 베르트라다와의 밀약을 통해 가족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후 카를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동생 카를로만이 독살당하며 카를이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당연히 다음은 자기의 동생을 지지했던 세력에 대한 숙청이 따랐고, 롬바르디아의 왕 데시데리우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카를이 롬바르디아를 침공, 정복함으로써 롬바르디아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고 롬바르디아를 정복한 후의 영토

이후 전쟁 이후의 혼란으로 로마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는데, 로마라는 도시의 상징성으로 인해 카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착해 교황을 보호하고 도시를 혼란을 진정시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교황이 뜬금없이 신성 로마 제국의 관을 내렸고 카를은 이에 대해 반발했지만 교황의 체면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는 카를

물론 그랬을리 없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고싶었던 로마 대주교(교황)와 암살과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혀 불확실하던 정통성을 확충할 방법을 찾던 카를의 이해관계가 맞아 발생한 것이 샤를마뉴의 대관식입니다. 샤를은 카를의 다른 표기법이고, 샤를마뉴는 샤를 대제라는 뜻이죠.

우리가 아는 신성 로마 제국, 그러니까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나온 독일 제 1제국은 보통 이후의 오토 1세를 기점으로 하나, 엄밀히 말해 "교황에 의해 내려진 서로마 황제의 관"은 샤를마뉴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3. 정치적/종교적 갈등의 심화


▲ 동로마 제국의 국기

"누가 감히 로마 제국을 참칭하는가!"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단 한번도 "동"로마나 "비잔틴 제국"으로 칭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국가 이름은 로마 제국이었고, 주변의 어느 나라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죠. 심지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칭했을때도 별 반발은 없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이라는건 후대의 역사가들이 구분을 위해 만들어낸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샤를마뉴의 대관식에 대해 격분했습니다. 원래 자기 땅이던 곳에 잠깐 - 물론 동로마의 관점에서 - 영향력이 사라졌다고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칭한건 동로마 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고, 수 차례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충돌에서 샤를마뉴의 서자중 하나였던 "곱사등이" 피핀이 전사하기도 하죠.


▲ 성상을 파괴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

이때 정교회에서는 성상, 그러니까 기독교 성인들의 조각상은 우상숭배의 일종이므로 모두 파괴해야한다는 성상파괴주의가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성상파괴주의는 일종의 이단이었지만, 황제 콘스탄니노스 5세가 성상파괴주의에 빠지면서 콘스탄티노플과 그 일대의 교회의 성상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췄으면 그냥 하나의 종교적 해프닝으로 끝났겠지만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로마 대주교(카톨릭의 교황)에게 성상을 파괴할것을 종용하면서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당연히 예전처럼 로마 대주교가 자기 말이라면 무조건 들을 변방 주교쯤으로 생각했지만, 샤를마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는 교황에게 이는 헛소리에 불과했죠. 성상을 써서 프랑크인들과 롬바르드인, 작센인들을 겨우 개종시켰더니 성상을 다 파괴하라?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닥칠만한 일이었죠.

이 결과로 동방의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은 서로 척을 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상숭배 금지 자체는 원칙적으로는 카톨릭에서도 따라야하는 것임이 맞았고, "그래도 같은 크리스쳔인데..."하는 사고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갈라서지는 않았죠.


▲ 840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된 신성 로마 제국.

이런 갈등은 동로마 제국이 내부의 분열로 힘이 약해지고 샤를마뉴의 아들 루이 1세의 아들 셋이 영토를 분할해 통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카톨릭 세력도 분열되면서 잠시 소강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4. 동서 대분열


▲ 지난 2천년간의 온도 변화, 9세기에 기온이 급락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세기 중반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되며 북유럽의 바이킹들은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유명한 바이킹들인 해럴드 블루투스, 라그나르 로드부룩, 할프단 비세르크 등등이 모두 이 시기의 사람들이죠. 이때 영국으로 넘어간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를 멸망시키기도 했으며, 러시아로 넘어간 바이킹들은 오늘날 러시아의 전신이 되는 노브고르드 공국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가까운 지역뿐만이 아니라 머나먼 지역들까지 약탈하거나 점령했는데요, 심지어는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틴 제국의 영토 또한 점령하고 공국을 건립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 정착한 이들은 결국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정교회 교회가 카톨릭으로 편입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한동안 이어진 불간섭 정책을 깨는 일이었고, 정교회는 비잔틴 제국 내의 모든 카톨릭 교회들을 정교회로 편입시키는 강수를 두며 관계가 악화되게 됩니다.


▲ 정교회와 카톨릭의 마지막 공의회


이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원래대로라면 서로가 사과하고 교회들의 소속을 원상복귀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황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일이 커지게 됩니다. 비잔틴 제국은 당시 전성기였던 마케돈 왕조의 말기로, 내부의 부패와 분열이 확대되는 중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강경하고 공격적인 주교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합니다.

공의회가 시작된 이후 카톨릭 주교단과 정교회 주교단은 첨예한 갈등을 지속했으며, 공의회의 지정된 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에도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의회가 끝나는 날 밤까지 진전은 없었고, 카톨릭 주교단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대한 파면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음날 이를 발견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격분해 로마 교황을 파문했고, 이를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합니다. 이 대분열은 1965년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카톨릭 교회의 대표 교황 바울 6세와 정교회 교회의 대표 세계 총 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파문을 취소하고 우호 선언을 할때까지 지속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