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5. 셀주크의 등장


▲ 셀주크군 철갑기병의 모습

셀주크는 원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 부족중 하나로, 광활한 스텝에서 강대한 세력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10세기에 들어 이들은 오늘날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땅을 정복하고 기존에 있던 사파르, 사만, 부이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착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셀주크의 군대는 서쪽의 이슬람교도들을 정복하며 계속 세를 키워, 결국 11세기 말에는 동로마 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 셀주크 투르크 최대 강역

이 강대한 투르크도 결국 세대가 거듭되며 분열되었는데, 지금의 터키 땅인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쉴레이만 투르크가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의 나라이름을 룸 술탄국, 그러니까 로마라고 지으면서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이 격화됩니다.


▲ 룸 술탄국의 영토와 동로마 제국과의 무력 충돌

8세기 압바스 조 아랍 제국 이후 거의 처음으로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는 도중에도, 그리고 오랜 영토인 소아시아가 룸 술탄국에게 점령당하는데에도 동로마 황제를 비롯한 두카스 왕조는 사치를 일삼으며 정치를 등한시했고, 결국 군인 명문가 콤네노스 가문의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를 찬탈하며 콤네노스 왕조가 열립니다. 


▲ 알렉시오스 1세의 이콘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의 화폐 제도와 군사 제도를 개혁해 제국의 중흥기를 열었으나, 이미 소아시아를 상실해 롬 술탄국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고, 피해를 감수하며 롬 술탄국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다른 셀주크계 국가들의 침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실리주의적이었던 알렉시오스는 눈을 서쪽으로 돌려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청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6. 제 1차 십자군의 발호


▲ 복자 우르바노 2세의 초상화

동방 정교회와 상호 파문을 한지 30여년이 흐르고 1088년에 즉위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방 정교회에 온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와 동로마 제국과의 연합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을 견제한다는 교황령의 정치적인 이유가 합쳐저 우르바노 2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 십자군에 참가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제

이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성지 회복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제후들을 선동했고, "신이 원하신다!" 혹은 "신의 뜻이다!" 라는 십자군의 구호 "Deus Vult"또한 이 공의회에서 채택되게 됩니다. 이에 유럽의 수많은 제후들이 십자군의 이름 하에 집결했는데,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첫 왕이 되는 저지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또한 이 군대의 일원이었습니다.


▲ 제 1차 십자군의 경로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가 카톨릭 교회에 도움을 청한 이유가 룸 술탄국으로부터 영토를 수복하는것이었으니 만큼, 첫번째 목표는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였습니다. 이곳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는데, 여기서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7.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의 갈등


▲ 종교적 광신이 드러난 당대의 기록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성지 회복은 부수적인 목표일 뿐, 딱히 별 의미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 군대를 끌어들여 투르크를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십자군과는 목표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에게 기존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곳을 점령하는 일을 돕고, 새로운 영토는 십자군의 군주들의 봉토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이에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바 있으므로 크게 반발했으나, 어떻게든 성지로 진격해야 한다는 동행한 사제단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모두들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물질적 지원에 힘입은 십자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게 됩니다.


▲ 니케아 공성전 기록화

문제는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에 대한 공성이 진행되며 발생했습니다. 당시 서유럽의 관습으로는 점령된 도시에는 3일간의 약탈을 보장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수복한 자신의 영토에 대해 약탈을 허용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십자군은 종교적 광신에 불타 점령된 영토의 모든 이교도들을 학살했는데, 이는 무슬림 방어자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결사적으로 싸우게 했기 때문에 공성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알렉시오스 1세는 니케아의 공성전을 지휘하던 롬 술탄국의 장군과 몰래 협상을 타결했는데, 무슬림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게 포위망의 일부를 열어주는 조건으로 동로마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할 수 있게 성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약에 의해 하룻밤만에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점령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알지 못했던 십자군들은 눈앞에서 뺏긴 대도시의 약탈품들로 인해 격노하게 됩니다.

십자군의 지휘관들은 동로마 제국에게 항의했으나, 알렉시오스 1세는 공성에서 이겼고, 승자로서의 자비로 패자를 살려보내준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정론을 통해 십자군의 항의를 무시합니다. 이에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진격을 속행하게 됩니다.


▲ 안티오크 공성전 기록화

당시 셀주크 투르크는 롬 술탄국이 독립을 선언한 이후 수십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어있어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으나, 니케아가 함락된 이후 위기감을 느낀 소국들이 룸 술탄국의 왕(=술탄) 아르슬란에게 원군을 파병함으로써 대규모 회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 십자군에게 궤멸당하는 투르크 연합군

술탄 아르슬란은 군대가 여러 국가의 연합으로 이루어져있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조직력을 만회하기 위해 십자군을 기습한다는 선택을 했으나, 셀주크 군이 기습한것은 십자군의 미끼 선봉대였고 결국 돌라이온에서 십자군 본대의 역습을 받아 궤멸당하게 됩니다. 전투 후반에는 시리아에서 보낸 기병이 가세해 잠시 십자군이 밀리기도 했지만, 결국 전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순 없었습니다.

8. 십자군의 진격


▲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을 그린 기록화

투르크 연합군이 패배하며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소국들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십자군은 군소 국가들을 점령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안티오크와 여러 무슬림 도시에서의 약탈에 대한 소문은 서유럽으로 흘러들어가 부와 명예를 꿈꾸는 수많은 농노들이 지중해를 건너 십자군에 합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이집트의 술탄 파티마 왕조는 오랜 셀주크 투르크와의 갈등으로 셀주크가 십자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모습을 보며 희희낙락했고, 심지어는 십자군과 동맹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에게 투르크는 단순히 성지로 가는 길을 막는 세력이었을 뿐이고, 파티마 또한 적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이러한 협상은 십자군이 파티마 왕조의 영토였던 베이루트에 대한 공성을 시작하며 결렬되게 됩니다.


▲ 파티마 왕조의 강역. 예루살렘은 변방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티마 왕조의 세력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군대를 소집하는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군은 파티마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 예루살렘 공성전에 대한 후대의 복원도

십자군이 인근의 도시 아크레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의 총독은 모든 기독교도를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공성을 준비했습니다. 예루살렘같은 대도시에 대한 공성은 상당히 오랜 시간의 준비가 필요하며, 공격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기에 예루살렘 총독은 지원이 올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견고한 방어에 십자군의 사기는 떨어져갔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여리고 성의 일화처럼 사제들이 순례자의 복장으로 성 주변을 도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공성전은 예상보다 빠르게 한달만에 끝나게 되는데, 고드프루아의 병력이 성벽을 점령하는것에 성공하며 성문을 열었고, 다른 구역을 막던 예루살렘의 병사들이 재배치되는것보다 그 성문으로 십자군들이 몰려 들어오는것이 더욱 빨라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 무슬림들의 기록에 따르면 십자군은 도시에 입성한 이후 모든 이교도들을 학살했다고 하나, 이는 카톨릭 사제들의 요구였을 뿐 수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사들은 돈에 눈이 멀어 몸값을 받고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고 합니다.

9. 예루살렘 왕국의 탄생


▲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기뻐하는 십자군

계획대로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니,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의 군대를 막는 일로 관심을 돌립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 군주들 중 한명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해 지휘체계를 일원화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대부분의 지지하에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십자군에 동행한 사제들은 첫 번째로 가장 병력이 많았던 레몽에게 가서 왕위를 받으라고 제안합니다. 레몽은 한번 사양함으로써 겸손한 모습을 보여 다른 기사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으나, 상황이 시급한지라 사제들은 그 다음으로 세력이 강했던 고드프루아에게 달려가게 됩니다. 고드프루아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써 예루살렘의 왕은 예수이므로 칭할 수 없고, 성묘의 보호자로 만족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데 결국 표현의 차이일 뿐 수락했다고 판단한 사제들은 고드프루아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한번 튕겨보려다가 졸지에 왕위를 날려먹은 레몽은 성지 탈환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자신은 요단강 주변의 성지들을 순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명목으로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문제는 파티마 왕조의 대군이 예루살렘에 하루하루 접근중이었다는 것인데, 이에 예루살렘의 주교들은 레몽을 어르고 달래고 신의 이름으로 협박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 예루살렘 왕국의 문장

결국 예루살렘 근교의 도시 아스칼론에 파티마 군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한 레몽은 군대를 돌려 파티마군을 공격하게 되고, 파티마군은 예루살렘에 대한 공성을 진행중에 후방을 기습당한 형세가 되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파티마군은 패주하게 되고, 예루살렘에 대한 공성을 포기하게 되니 이것이 예루살렘 왕국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