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스마트폰 전쟁


June 2014

The Great Smartphone War

애플과 삼성은 3년간 기업사상 전례 없는 규모로 충돌해왔다. 그들의 법정 전쟁은 대륙 4곳을 넘나들며 비용도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아이폰을 만들어낸 초-기밀 프로젝트부터 애플의 납품업체였던! 삼성이 충격적으로 유사한 기기를 선보였을 때 고 스티브 잡스가 보였던 분노에 이르기까지, 본지의 아이켄월드(Kurt Eichenwald)가 가차 없는 사업 전술 중에서도 삼성의 특허 침해의 역사를 알아보고 애플이 전투에서 이길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질 수도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By Kurt EichenwaldPhoto Illustration by Sean McCabe


iSPY Samsung chairman Lee Kun-hee, who was convicted of tax evasion in 2008 and pardoned soon after, and the late Apple C.E.O., Steve Jobs

2010년 8월 4일, 애플에서 온 소규모 간부진이 서울 중심가에 있는 파란색 유리 빌딩 44층의 문을 들어섰다. 그들은 이제 기업사상 제일 처절한 전쟁이 될 첫 포문을 열 준비가 돼 있었다.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 새로 선보인 갤럭시 S가 봄에 나타난 이후로 결전은 예고돼 있었다. 애플은 갤럭시 S를 미리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본사의 아이폰 팀에게 하나 보냈다. 아이폰 팀의 디자이너들은 갤럭시 S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불신의 늪이 더 깊어졌다. 갤럭시 S가 완전히 베낀 제품이라 생각해서였다. 휴대폰의 전체적인 외양과 화면, 아이콘, 포장 상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이폰과 동일했다. 사용자가 스크롤을 밑으로 내릴 때 화면 이미지가 반동을 나타내는 특허 기술 "rubber-banding"과 같은 것도 동일했다. 두 손가락으로 사진 크기를 조절하는 "pinch to zoom" 역시 같았으며,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애플의 변덕스러운 CEO 스티브 잡스는 분노했다. 그의 팀이 수 년 동안 혁명적인 휴대폰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더군다나 애플의 납품업체가 아이폰 디자인과 수많은 기능을 훔쳤기 때문이었다. 잡스와 당시 COO인 팀 쿡은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과 접촉하여 두 제품 간의 유사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으나,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미소와 함께 한 요구 및 안달난 설득으로 점철된 수 주일 간의 미묘한 줄다리기 끝에, 잡스는 싸우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서 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애플 간부진은 삼성전자 빌딩 고층 회의실에서 삼성측의 엔지니어와 변호사 대여섯과 만남을 가졌다. 법원 기록과 회의 참가자들에 따르면 당시 삼성전자 부사장이었던 안승호 박사가 삼성측을 대표하고 있었다. 인사 후, 칩 러튼(Chip Lutton) 애플의 지재권 담당 법률고문 부위원이 무대 위에 올라 "Samsung’s Use of Apple Patents in Smartphones"에 대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그리고나서 그는 특별히 충격적인 유사성을 몇 가지 보여줬지만 삼성 간부진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러튼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갤럭시는 아이폰을 베꼈습니다."

그러자 안승호 박사는 "베끼다니 무슨 말씀이신가요?"라 물었다.

러튼은 "제가 말한대로입니다"라면서, "여러분은 아이폰을 베꼈습니다. 유사성이 우연의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섰습니다."라 주장했다.

안승호 박사는 "어떻게 그리 말씀하시느냐?"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우리에게 혐의를 제기하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휴대폰을 계속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특허가 있고, 애플이 아마 오히려 우리 특허를 침해했을 겁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애플 간부진이 아이폰 절도 행위에 대해 주장을 이어갈 요량이라면, 삼성도 삼성 특허를 베꼈다고 되받아 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전투 전선이 그려졌고, 그 후로 애플과 삼성은 기업사상 전례 없는 규모로 충돌했다. 비용도 10억 달러 이상 들어가고 수 백만 페이지의 법률 서면이 작성됐으며, 두 자리 수가 넘어서는 판결과 평결, 수많은 구두 변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자체가 삼성의 의도였을 것이다. 법원 기록과 삼성에서 일한 사람들에 따르면 경쟁사 특허의 무시는 삼성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일이었다. 애플의 사례에서 쓰인 맞고소와 지연, 패소, 지연, 상소, 패배가 확실할 경우 합의 등, 같은 전술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한때 삼성측에 있었던 특허 변호사인 백스터(Sam Baxter)의 말이다. "삼성은 어디에 속하건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을 특허면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스웨덴의 통신 기업] 에릭슨을 수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생명이 특허에 의존해 있다면 거짓말을 할 수 없었죠. 그런데 삼성을 수임할 때, 특허에 생명이 걸려 있을 때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삼성 간부진은 고소-맞고소에 대한 외부의 비판이 삼성의 특허 접근이 가진 현실성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삼성은 지구상 최대 규모의 특허 소유 기업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술 업계에서 다른 기업들이 삼성 지재권을 훔쳐가는 경우도 종종 발견하지만 삼성은 그들을 항상 소송하지는 않는다. 단, 그 간부에 따르면 삼성이 소송 대상인 경우 삼성은 방어 전략으로 맞고소를 한다.

애플 소송에 있어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 특허 소송의 경우, 삼성 제품 22개 이상이 애플을 베꼈다는 모두 변론(opening statements)이 4월 1일, 산호세 미국 지장법원에 등장했다. 양측 모두 소송에 피로감을 갖고 있지만, 법원 명령에 따른 합의 시도는 실패했다. 제일 최근의 시도는 2월에 있었는데, 양측 모두 법원에게 분쟁 합의를 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재무적인 결과와 상관 없이, 애플은 법정 투쟁에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2012년 7월 캘리포니아에서 배심원 2명은 삼성이 아이폰의 외양과 기술을 실제로 훔치려 했음을 발견하고 삼성으로부터 애플이 10억 달러 이상 피해를 받았다고 결정했으나, 피해액은 2013년 하반기, 판사가 계산 오류를 발견함으로써 8억 9천만 달러로 깎인 바 있었다. 소송이 질질 끌수록 삼성은 시장을 더 많이 차지했으며(현재는 애플의 15.6%에 비해 삼성은 31%이다), "애플스럽지만 더 쌀 뿐"인 기술에서, 자기 자신의 혁신적인 기능과 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 전직 애플 간부의 말이다. 

"[삼성은] 당시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쟁으로 전환됐습니다. 아마 애플과 싸운 결과이기도 할 겁니다."

실제로 애플과의 싸움은 이전에도 많이 사용했던 삼성 전술의 한 페이지였을 따름이다. 다른 기업이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면, 같은 제품이되 덜 비싼 버전을 내놓고, 전략이 잘 풀릴 경우 삼성 그룹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서 세계적인 거물로 성장했었다.

Patents Pending

1938년에 한국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자 대학 중퇴자인 이병철이 삼성을 창업했다. 26세의 이병철은 상속을 이용하여 정미소를 열었지만 사업은 실패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이 삼성상회를 열어 어물을 수출했다. (삼성은 한국어로 "세 개의 별"을 의미한다.) 그 후 이병철은 양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53년부터 제당업과 모직, 몇 가지 보험업에 진출했다.

그후 삼성이 소비자 가전 사업에도 진출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었다. 1969년 삼성은 삼성-산요 전자를 형성하여 1년 후, 흑백 텔레비전 생산을 시작했다. 아직 컬러 텔레비전을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삼성은 패배자(also-ran) 이미지였다. 소니와 같은 일본 기업들을 기술 업계 최전선에 세울 정도였던 일본 경제 붐 이후, 삼성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에게도 삼성의 이미지는 싸구려 저질 복제품 기업이었다. 

그런데 과감하고 불법적으로, 주요 사업의 경쟁사들과 함께 가격을 고정하여 이윤 늘리기를 택한 삼성 간부들이 있었다. 삼성이 가격-고정 담합을 했다고 처음 알려진 제품은 CRT 브라운관(한때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의 표준 기술)이었다. 미국과 유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의 가격 담합은 상당히 구조적이었다. 경쟁사들과 함께 은밀히 "글래스 미팅(Glass Meetings)"을 갖는데, 이 의미는 한국이나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 적어도 8개 국가에 있는 호텔과 리조트에서 개최하는 회의이다. 최고 임원진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보통은 더 낮은 직급의 관리자들이 참여한다. 임원진은 종종 "그린 미팅(Green Meetings)"을 갖는다. 골프 회동을 가지면서 담합 가격을 올린다든가, 생산을 줄여서 실질적으로 경쟁할 때보다 더 높은 이윤을 놀린다든가 하는 경우다. 결국 이런 담합은 폭로가 이뤄졌으며 2011년과 2012년, 삼성은 미국에서 3,200만 달러, 한국에서 2,150만 달러, 유럽집행위원회(EC)에서 1억 9,700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CRT 담합의 성공은 다른 사례로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사에 따르면 LCD(CRT와 직접 경쟁하게 된 이미지용 액화크리스탈 기술)가 떠오르자, 1998년 11월 삼성의 한 관리자가 주요 경쟁사인 샤프 및 히타치 대표들과 만나서 LCD 가격 인상에 합의했다. 그 관리자는 더 높은 간부에게 기쁜 소식을 전달했고, LCD 담합이 이뤄졌다.

조사에 따르면 2001년 당시 이윤우 삼성 반도체 사업부 사장은 또 다른 경쟁사인 Chunghwa Picture Tubes의 임원진에게, 이미 조작됐던 특정 종류의 LCD 가격을 올리자고 제안했었다. 단 이번에는 "크리스탈 미팅(Crystal Meetings)"을 통한 제안이었다. 가격을 불법적으로 설정하기 위해 호텔과 골프 코스에 임원진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2006년 당시 LCD는 이미 시장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때 그들이 벌인 범죄의 희생양 중 하나를 그들은 코드명, NYer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NYer가 LCD 공급 업체들의 가격 조작을 의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당시 삼성 임원진은 NYer가 미국 정부의 형사조사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NYer(애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상당히 강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성은 법무부로 가서 반독점 자백 프로그램(anti-trust leniency program)에 따라 담합한 회사들을 밀고했다. 그러나 삼성에게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밀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LCD 구매자들 및 주정부 법무부와의 합의를 위해 수 억 달러 어치의 합의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LCD 가격 조작 자백의 이유가 애플의 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미국 법무부의 관찰 대상에 삼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삼성은 가격 담합으로 형사 조사를 받았다. 이 건은 1999년,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DRAM(dynamic random-access memory) 가격 담합이었고 삼성은 대규모로 DRAM 사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2005년 적발된 삼성은 미국 정부에게 3억 달러의 벌금을 내기로 동의했고, 임원진 중 6명이 유죄였으며, 미국 감옥에서 7개월-14개월의 형을 선고 받았다.

가격 조작 스캔들 이후, 삼성 임원진은 잠재적인 법적, 윤리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삼성 준법지원팀(global legal affairs and compliance)의 지재환 수석 부사장은 삼성이 준법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 전담 변호사들과 명확한 정책 및 절차, 회사 전반적인 훈련 및 보고 시스템을 통해 강력한 기업 준수(Compliance) 조직을 갖췄습니다. 그 결과, 미국이건 아시아이건 아프리카이건 현재 우리 직원 누구나 매년 준법/윤리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있기 전에 삼성이 저질렀던 위법 행위는 가격-담합만이 아니었다. 2007년 삼성 법무팀장으로 임용되기 전, 원래 한국의 스타급 검사였던 김용철은 뇌물과 돈세탁, 증거 인멸, 90억 달러에 이르는 절도 등 삼성의 대규모적인 부패에 대해 폭로했다. 나중에 자신의 책을 쓴 김용철은 삼성이 세계에서 제일 부패한 기업 중 하나라 주장했다.

한국에서 있었던 범죄 조사는 처음, 삼성 간부진이 정치인과 판검사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김용철의 주장에 집중했었다. 2008년 1월, 정부는 삼성 회장이자 3,700만 달러의 탈세를 선고 받았던 이건희의 사무실과 가택 조사에 들어갔다. 그는 3년의 집행유예와 8,900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 받았지만, 1년 반 후,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회장을 사면했다.

뇌물 수수건이란 무엇인가? 한국 검사들은 김용철 주장의 증거를 찾지 못 했다고 발표했다. 김용철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삼성 뇌물을 도왔다고 한 검사 목록을 제출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한국 국회의원은 삼성이 그에게 현금이 가득 든 골프가방을 받았다고도 주장했고, 한 전직 대통령 비서는 삼성이 자신에게 $5,400 어치의 현금 선물을 줬지만 돌려줬다고 말했다. 김용철은 2010년, 자신의 책을 내면서 주장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해 "배설물(excrement)"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합법적이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은 맞고소 전략도 있다. 2010년 초부터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었던 최지성은 좋은 소식이라며 주주 편지를 보냈다. 지난 12개월이 전례 없는 성공이라면서, 격심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860억 달러 이상의 매출액을 올렸고, 영업 수익은 94억 달러였다고 말했다. 

최지성은 혁신에 대한 삼성의 전념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는 2009년 미국 특허 등록 2위를 유지했으며, 3,611건이 넘음으로써 우리의 차세대 기술을 강화 시키기 위한 근간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최지성이 알린 것은 삼성이 큰 패배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법원은 삼성이 불법적으로 지재권을 복제했으며, 일본 기업 샤프의 LCD 플랫-패널 기술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결내렸었다. 삼성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법원은 법원 명령을 통해 삼성에게 특허를 침해한 제품의 수입을 전 유럽에 걸쳐 중단 시켰기 때문이다. 최지성이 자랑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때, 미국의 ITC(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는 빼돌린 기술을 사용한 삼성의 플랫-패널 제품 수입을 막기 시작했다.

삼성은 마침내 샤프와 합의했다.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현행범(red-handed)으로 붙잡혔을 때는, 상대방 회사가 사용한 특허를 삼성이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맞고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송을 질질 끌 동안 시장 점유율을 더 늘리고 삼성 제품 수입이 막히면 합의로 나가는 방식이다. 샤프는 2007년 소송을 일으켰고, 소송이 이어지는 동안 삼성은 2009년 말까지 플랫-화면 사업을 구축하여 전세계 텔레비전 시장의 23.6%를 차지했지만 샤프의 점유율은 5.4%로 급락했었다. 삼성에게는 대체로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디지털 오락 제품에 특화됐으며 플라즈마 텔레비전 특허를 갖고 있는 일본의 다국적 기업인 파이오니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삼성은 다시금 특허 기술에 요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2006년 파이오니어는 Eastern District of Texas 연방법원에서 삼성을 제소했고, 삼성도 맞고소했다. 삼성의 주장은 재판이 있기도 전에 취하됐지만, 소송중 나온 한 문건이 삼성에게 특히 피해를 줬다. 그 문건은 삼성이 파이오니어 특허를 침해하고 있다며 삼성의 한 엔지니어가 명시적으로 밝힌 메모였다. 배심원단은 2008년 삼성에게 5,9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상소와 소송이 이어지면서 결국 재정적으로 문제에 봉착했던 파이오니어는 밝혀지지 않은 액수로 2009년 삼성과 합의했다. 당시로서는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2010년 파이오니어는 결국 텔레비전 사업부를 폐쇄하여 1만 명을 해고해야 했었다.

다른 기업들은 경쟁사 특허를 존중하지만 삼성은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은 채 같은 기술을 몇 년이고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서 펜실베니아의 한 작은 업체, InterDigital은 애플과 LG 전자와 같은 거대 기업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서 자사의 특허 기술 사용을 허가했었다. 그런데 삼성은 계속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특허 집행을 위해 소송을 벌여야 했었다. 2008년 ITC가 삼성의 주력 휴대폰 수입을 금지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자, 그제서야 삼성은 InterDigital에게 4억 달러를 내기로 합의했다.

같은 시기, 코닥도 삼성과 속임수에 신물이 난 상태여서, 삼성이 코닥의 특허화된 디지털 이미징 기술을 삼성이 훔쳤다는 소송을 일으켰다. 다시금 삼성은 코닥을 맞고소했고, ITC가 코닥편을 든 이후에서야 로열티 지불에 합의했다.

영리한 상업 모델이지만,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삼성이 그렇게 빠르게, 극적인 기술 진보를 이룰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The Purple Dorm

퍼플 돔에서 피자 냄새같은 냄새가 났다.

쿠퍼티노 애플 본사의 한 빌딩은 기숙사(Dorm)라 불렸다. 직원들이 하루 24시간 일 주일 내내 패스트푸드로 지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애플이 제일 비밀스럽게 유지한 프로젝트 퍼플(Purple)을 작업하는 곳이었다. 2004년 이래 애플 역사상 최대의 도박이었던 프로젝트 퍼플은 완전한 인터넷과 이메일 기능, 그 외 전례 없는 여러 기능을 담은 휴대폰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다.

애플 간부진은 그동안 계속 잡스에게 휴대폰 개발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그는 계속 회의적이었다. 이미 시장에 수많은 휴대폰이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장의 휴대폰 기업들은 모토로라와 노키아, 삼성, 에릭슨처럼 경험도 매우 풍부한 업체들이어서, 애플이 그들을 이기려면 뭔가 혁명적인 휴대폰을 개발해야 했었다. 게다가 애플은 AT&T와 같은 통신사와도 계약을 체결해야 했고 잡스는 자기 회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회사에게 맡기기 싫어했었다. 그리고 잡스는 기존 휴대폰 칩과 주파수가 인터넷 접근용으로 충분한 속도를 제공하는지도 의심스러워 했다. 잡스 생각에는 통신 속도야말로 성공의 핵심이었다.

애플의 멀티터치 유리가 개발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이 휴대폰은 혁명적인 폰이 될 터였다. 애플 디자인부장인 조니 아이브는 미래 아이포드 목업을 갖고, 아이폰의 외양이 어떨지를 가늠했었다. 2004년 11월, 잡스는 애플이 태블릿 프로젝트를 멈추고 아이폰에 전력을 다하도록 허가를 내렸다.

잡스는 최고의 비밀주의를 요구했다. 이미 애플은 입 다문 기업으로 유명했지만 이번에는 수준이 달랐다. 어떠한 경쟁사도 애플이 휴대폰을 극적으로 다시 디자인하여, 휴대폰 시장에 진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잡스는 움직이는 목표와 경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예전과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퍼플 프로젝트 인원으로 외부인 영입 금지 명령이었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테스팅 등 모든 것을 초기밀 상태의 폐쇄된 사무실에서 해야 했다. 새 폰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긴 스콧 포스탈 수석 부사장은 퍼플이 뭔지 설명도 안 한 채 애플 직원들을 프로젝트 퍼플로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팀은 퍼플 돔으로 이주했고, 처음에 층 하나였던 규모는 팀이 더 들어오자 빠르게 늘어났다. 특정 컴퓨터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뱃지 리더기를 통해 잠긴 문을 통과해야 했다. 카메라가 끊임 없이 감시했으며, 정문 바로 앞에, 비밀주의의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직원들은 "파이트 클럽"이라 쓰인 사인을 붙였다. 1999년에 나왔던 영화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규칙은 영화 등장인물에 따르면 파이트 클럽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였다.

많은 수가 10여 년 이상 같이 일해 온 직원들 15명 가량이 모여 디자인 팀을 이뤘다. 브레인스토밍 세션에서 그들은 돔 안에 있는 부엌 탁자에 모여 앉아 아이디어를 주고 받고, 스케치북이나 종이, 컴퓨터 인쇄에 디자인을 그렸다. 팀 전체에 걸친 비판에서 살아남은 아이디어는 CAD 그룹에게 넘어가고, 이들이 스케치 데이터를 컴퓨터-기반의 모델로 만들어낸다. 그 후 3D로 만들어져서 다시 부엌 탁자의 디자인팀에게 전달된다.

이 과정이 수 백 번 반복됐다. 팀의 산업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스트링어(Christopher Stringer)에 따르면 전화기 버튼 하나만 갖고도 50번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들은 휴대폰 구석 구석, 코너와 크기, 너비 등 모든 디테일을 따졌다. 가장 초기 모델 중 하나인 코드명 M68은 뒷면에 "iPod"라 쓰여 있기도 했다. 이 제품이 무엇인지 가리기 위해서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포스탈과 그의 팀은 사용자가 터치스크린 뒤로 콘텐츠를 어떻게 다루는지 실제로 알아보기 위해 환영(illusion)을 만들려고도 했었다. 마침내 2007년 1월, 잡스는 마침내 새 폰을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기조연설에서 발표했다. 모두들 큰 발표를 기대하던 참이었다. 

잡스의 연설 전날 밤, 모스코니 센터 바깥에 줄선 군중은 문이 열리자마자 Gnarls Barkley와 Coldplay, Gorillaz 노래가 울러퍼지는 센터 안으로 수 천 명이 들이닥쳤다. 오전 9:14, James Brown의 노래가 나오면서 청바지 차림의 잡스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오늘 다같이 역사를 만들 겁니다!" 그는 박수 소리 속에서 열정적으로 말했다. 맥과 아이포드, 아이튠스, 애플 TV에 대해 말한 후, 마이크로소프트를 몇 번 겨눴고, 9:40 쯤 물을 마셔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 날은 제가 2년 반 동안 정말 고대하던 날입니다."

방은 조용해졌다. 큰 발표를 누구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혁명적인 제품이 하나 나와서 모든 것을 바꾸죠. 오늘, 우리는 혁명적인 제품 세 가지를 소개할 겁니다. 첫 번째는 터치 컨트롤이 달린 와이드-스크린 아이포드, 두 번째는 휴대폰, 그리고 세 번째는 엄청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디바이스입니다."

"아이포드, 휴대폰,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케이터. 아이포드, 휴대폰…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이들은 별도의 세 가지 제품이 아닙니다. 하나에요! 우리는 이 제품을 아이폰이라 부릅니다."

청중이 환호하자 잡스 뒤로 화면이 떠올랐다. 아이폰이라 적혀 있었고, 밑에는 "애플, 전화기를 재발명하다"라 적혀 있었다. 

돌아오는 주, 전세계 기술 애호가들은 할렐루야의 합창에 동참하여 아이폰을 칭송했다. 그렇지만 기존 거대 업체들과 어울리려 드는 애플을 비웃은 기존 휴대폰 업체들은 아이폰에 대한 칭송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 블랙베리의 공동 CEO였던 짐 발실리(Jim Balsillie)는 이미 소비자들의 선택이 대단히 많은 공간에 휴대폰 하나 더 들어왔을 뿐이라 일축했다. 전형적인 코멘트였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였던 스티브 발머는 더 강경했다. "아이폰이 어느 정도라도 시장을 차지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전혀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석 마케팅 책임자였던 리처드 스프레이그(Richard Sprague)는 2008년까지 천 만 대를 팔겠다는 잡스의 예측을 애플이 이루지 못 하리라 말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옳은 것처럼 보였다. 2008년 첫 9개월 동안 아이폰 판매는 잡스 예측의 절반 이하였다. 그러나 그때 아이폰이 떠올랐다. 2세대인 아이폰 3G를 발표했던 마지막 분기에는 수요가 워낙 거대해서 아이폰을 선반에 올려 놓기 바쁘게 아이폰이 팔려나갔었다. 애플은 그 석 달 동안 690만 대를 팔았다. 이전 9개월 간의 실적보다 많았었다. 2009년 4/4분기가 되자 애플의 아이폰 판매량은 3천만 대를 추월했다. 3년 전만 해도 전혀 존재감이 없었던 애플은 갑자기 휴대폰 업계 제3위의 업체가 됐다. 그동안 삼성에서는 스마트폰 판매에 대해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었다. 동분기 삼성은 톱 5 안에도 못 들었었고, 업계 연구 업체인 IDC의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의 총 스마트폰 판매분은 계속 "기타 업체" 군에 속해 있었다. 

Galaxy Quest

삼성 본사 10층의 Gold Conference Room, 삼성 모바일-커뮤니케이션부의 임원진 28명이 모였다.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오전 9:40, 회의 주제는 삼성의 닥칠 위기 상황이었다. 삼성 휴대폰은 인기를 잃고 있었고 사용자 경험은 열악했으며, 바깥에서는 아이폰이 열풍이었다. 삼성 휴대폰 사업은 강력했고 매년 여러 디자인을 갱신했지만, 스마트폰에서는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었고 애플은 스마트폰 업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회의 때 적었던 내무 메모에 따르면, 휴대폰부 책임자가 [우리] 품질이 좋지 않다고 말했었다. 메모에 따르면 이렇다. "아마도 너무 모델을 많이 해야 하는 일정에 디자이너들이 쫓겨서 그럴 것이다." 

그는 삼성이 너무 많은 휴대폰을 디자인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에게 최고의 제품을 제공한다는 목표에 맞지가 않다고 언급했다. "품질 개선의 길은, 비효율적인 모델을 없애고 전체적으로 모델을 줄이기입니다. 물량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시장에 완벽한 수준의 제품을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두 개의 훌륭한 모델로 말입니다..."

"우리 회사 바깥의 인사들이 아이폰 보고는 삼성이 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관심을 노키아에 가져 왔었죠... 하지만 애플 아이폰이라는 예기치 못한 경쟁자와 [사용자 경험] 비교를 받고 있습니다. 정말 하늘 땅 만큼이나 차이가 크죠. 삼성은 이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디자인의 위기에요."

이 메시지는 삼성 전체이 퍼졌다. 뭔가 아름다우면서도 "쿨함"을 끼얹어서 사용하기 쉬운 삼성만의 "아이폰"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빠르게 말이다. 그래서 상당한 압박 하에 석 달 동안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합동으로 긴급 팀이 구성됐다. 너무나 업무 강도가 강력해서 하루에 2-3 시간 밖에 못 자는 직원도 있을 정도였다.

3월 2일, 삼성의 제품엔지니어링팀은 아이폰 기능 분석을 완성하고 제작중인 삼성 스마트폰과 비교했다. 이 그룹은 132 페이지 짜리의 보고서를 상사에게 제출하면서, 삼성 폰이 뒤떨어지는 모든 면을 자세히 설명했다. 모두 126가지 기능에서 애플이 더 나았다.

비교할 만한 기능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아이폰의 경우 회전을 하면 어느 방향이든 계산기 이미지가 더 커졌지만 삼성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폰의 달력 일정 기능은 알아볼 수 있고 전화기 키보드 상의 숫자는 보기가 더 쉬웠으며 통화 종료도 단순했고, 열려 있는 웹 페이지도 화면상에 표시됐으며 Wi-Fi 커넥션은 단일한 화면에서 이뤄졌고, 이메일 알림이 분명했었다. 엔지니어들의 결론에 따르면 이 어떠한 기능들도 삼성 폰에는 부족했다.

삼성 스마트폰의 신규 모델은 점차 외양과 기능 모두 아이폰처럼 변모해갔다. 홈 화면의 아이콘은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둥그런 모서리와 크기, 빛 방향에 따라 일부러 만들어낸 깊이 등 아이폰과 유사했다. 기능 또한 키보드를 꺼내는 것부터 아이폰 이미지를 그대로 동일하게 들여왔다. 둥그스런 모서리의 베젤과 전면부를 덮은 유리, 아래 부분에 있는 홈 버튼 모두가 거의 동일했다.

이미 유사성을 우려한 업계 임원들이 있었다. 2월 15일, 삼성의 한 선임 디자이너는 다른 직원들에게 삼성과 구글 간의 회의에서 나온 말을 알려줬다. 구글이 특정 갤럭시 폰을 거론하면서 애플 아이폰 및 아이패드와 너무 유사하다고 지적했다는 말이었다. 다음 날, 한 삼성 디자이너는 구글의 코멘트에 대한 내용을 사내에 이메일로 알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애플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게 차이를 만들어야 함. 전면부부터 시작."

다음 달 하순까지 삼성은 삼성판 아이폰 준비를 마쳐 놓았다. 3월 23일, CTIA Wireless 박람회에서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에 기조연설을 기다리는 청중이 모였다. 참가자들이 자기 자리를 찾으면서 파란색 무대 뒤에서 조명이 켜졌다. 당시 삼성 모바일커뮤니케이션의 신종균 사장이 무대 위에 올랐다. 애플이 야기한 휴대폰(어느 휴대폰인지 예상하기 어렵지는 않았다)에 대해 사용자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경험에 대해 거론했었다. 

"지금은 물론 이 모든 새로운 경험을 보여줄 신제품을 제가 분명 갖고 이겠거니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는 양복 상의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하나 꺼내 들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삼성 갤럭시 S를 소개합니다!" 신종균 사장은 박수치는 청중에게 갤럭시를 들어 보였다.

삼성 갤럭시 제품의 외양을 바꿔야 한다는 이전 달의 이메일에도 불구하고, 갤럭시는 여전히 아이폰과 동일해 보였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위에 선명히 새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 것을 베꼈다."

아이폰 디자이너 중 하나였던 크리스토퍼 스트링어는 못 믿겠다는 심정으로 갤럭시 S를 바라봤다. 당시 그는 애플의 수 백 번에 걸친 디자인과 온갖 크기 유리와 여러 가지 아이콘과 버튼을 갖고 했던 실험을 삼성 사람들이 그냥 가져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애플은 너무 다른 일로 분주해서 임원진을 삼성 폰에 대한 관심으로 끌어낼 수 없었다. 1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잡스는 아이패드를 선보였다. 아이패드는 원래 아이폰보다도 더 전부터 개발에 들어갔었지만 아이폰에게 순위를 양보했었으며, 나오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갔다.

갤럭시 S는 나온지 한 달 만에 전세계에 팔리기 시작했고, 잡스는 드디어 삼성이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삼성 최고 임원진과 먼저 다투기를 원했지만, 곧 계승자가 될 팀 쿡은 아직 너무 공세적으로 나서지 말라고 잡스에게 주의를 줬다. 삼성은 애플에게 프로세서와 디스플레이 화면 등을 제공하는 제일 큰 공급업체였기 때문이다. 즉, 함부로 나섰다가 아이폰 및 아이패드용 부품을 포함, 필요한 부품을 못 얻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8월 4일 서울에서 있었던 삼성의 무시로 인하여, 러튼 애플 변호사는 안승호 박사에게 애플의 우려 사항에 대한 삼성의 답변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는 여러분들로부터 답변을 빠르게 듣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제발 특허에 대한 일반적인 말은 말아 주십시오."

애플 팀은 본사로 귀환했다. 애플의 수석 법률책임자인 브루스 슈얼(Bruce Sewell)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잡스에게 브리핑했다. 그러나 잡스는 삼성의 답변을 기다릴 정도로 참을성이 있지 않았다. 

답변 없이 수 주일이 흐르자 잡스는 러튼에게 계속 그들이 어디 있는지,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었다.

별다른 진전이 없는 채, 새로운 회의가 쿠퍼티노에서 한 번, 워싱턴 DC에서 한 번, 서울에서 여러 번 열렸다. 워싱턴의 회의에서 애플 변호사들은 해결 가능성을 거론했다. 아이폰과 별 차이 없게 만들어 버린 지재권 로열티를 내고, 특허화된 디자인과 기능 사용을 멈추기로 하는 라이선스 계약을 기꺼이 맺을 의향이 있다고 한 것이다. 

결국 대화는 깨졌고, 잡스는 점차 삼성을 법원으로 끌고 갈 마음이 커졌다. 쿡은 계속 참으라 조언했다. 애플 사업에 그리도 중요한 기업을 때려 눞이기보다는 협상을 통한 해결책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3월 하순, 삼성은 10 인치 화면을 탑재한 태블릿 컴퓨터를 선보인다. 애플 임원진은 이 역시 애플의 2세대 아이패드를 베꼈다고 봤고,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삼성은 아이패드 2와 경쟁하기 위해 자기 모델을 변경 시키겠다 선언해 놓았었다.

잡스는 쿡의 조언을 듣지 않았고, 2011년 4월 15일, 드디어 캘리포니아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특허 침해를 이유로 삼성에게 연방 소송을 일으켰다. 삼성은 애플의 공격에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며칠 후 한국과 일본, 독일, 미국에서 애플이 삼성의 모바일 통신 기술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며 맞고소를 벌였기 때문이다. 결국 여러가지 소송이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호주, 네덜란드는 물론 델러웨어의 연방법원, 워싱턴 DC의 ITC에서 일어났다. 

Phone Tag

2011년 3월의 어느 날, 한국의 반독점 당국 조사관들을 태운 자동차가 서울에서 남쪽 25 마일 떨어진 수원의 삼성 시설 앞에 멈춰섰다. 그들은 삼성과 통신사들 간 휴대폰 가격 담합의 증거를 찾기 위해 빌딩을 급습할 준비가 돼 있었다.

조사관들이 들이닥치기 전, 보안 요원들이 맞서서 그들의 진입을 거절했다. 대치 상황이 지속되자 조사관들은 경찰을 불렀고, 결국 30분 늦게 진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했던 당국은 내부 보안 카메라 영상을 가져가서 봤다. 거의 믿지 못 할 일이 있었다.

조사관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말이 들리자, 플랜트의 직원들이 문서를 파기하고 컴퓨터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아마 부품에 손상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1년 후, 한국의 신문들은 설비 조사 방해의 이유로 삼성에게 정부가 벌금을 매겼다고 보도했다. 당시 애플 법률팀은 삼성 건을 녹취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삼성 간의 대치 상황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듣기로는 삼성 직원 중 하나는 조사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문서를 삼키기도 했다고 한다. 애플에게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애플 변호사들은 절반은 농담조로 혹시 범죄행위의 증거를 먹어치울 정도로 회사에 충성스러운 직원들과 법정에서 어떻게 다투냐 말했었다.

법원으로 향했을 때, 애플은 삼성 특허에 올라 있는 삼성의 엔지니어 및 디자이너들에게 질의를 했었다. 모두들 특허 주제와 관련된 기술적인 아이템을 개발한 것이 맞다고 증언했지만, 어떤 특허인지 세부 사항 설명을 요구했을 때, 일부 직원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법정에서는 사기 및 기만 혐의가 쏟아져 나왔다. 애플은 법원에게 아이폰과 갤럭시 S를 하나 하나 비교한 문건을 제출했다. 삼성은 후에 갤럭시 S 사진이 실제 크기보다 아이폰과 유사성을 보이기 위해 크기 조절이 됐음을 보여 줬다. 애플은 증거 개시에서 노키아와의 비밀 라이선스 협약을 제출했었는데, 삼성은 노키아와의 협상에서 이 정보를 활용하기도 했었다. 정말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터무니 없을 정도의 순간도 있었다. 애플이 제기한 특허 중, 둥그스런 사각형 모서리 표에 대한 애플의 한 문장 짜리 주장이 있었는데, 이 도형은 특정한 기기가 아니라 사각형 그 자체로서 아이패드에 쓰이는 도형이었다. 하지만 그때 삼성측 변호인단이 보여준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도 있었다. 루시 고(Lucy Koh) 연방 판사가 아이패드와 갤럭시탭 10.1을 들고 혹시 두 기종을 구분할 수 있겠냐고 삼성 변호사에게 질문했었다.

삼성 변호사로서 10 피트 떨어져 서 있던 캐슬린 설리번(Kathleen Sullivan)은 "이 거리에서는 아닙니다. 판사님."이라 답했다.

전세계 소송에서 아무도 완전한 승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의 법정은 애플이 삼성 특허 두 건을, 삼성은 애플 특허 한 건을 침해했다고 판결 내렸었다. 일본 동경에서 법원은 애플 특허 주장을 거부하고 삼성의 법정 비용을 지불하라 명령을 내렸다. 독일에서는 갤럭시탭 10.1의 직접적인 판매 금지를 명령하면서 갤럭시탭이 애플의 아이패드 2와 너무나 닮았다고 판결 내렸다. 영국에서는 삼성에게 호의적인 판결이 있었다. 삼성 태블릿이 아이패드만큼 "쿨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캘리포니아는 삼성이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 특허를 침해했음을 발견하고 10억 달러 이상의 손상액을 산정했고, 나중에 배심원단이 계산을 잘못 했음을 판결 내리기도 했었다. 손상액 계산의 논쟁에서 삼성 변호사는 삼성이 실제로 애플 소유물의 일부 요소를 가져갔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한 애플 관련자에 따르면 끝 없는 소송이 애플에게 감정적으로나 재무적으로나 소모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이 한 기업의 특허를 침해했을 때 일어났던 다른 사례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소송 기간 동안 더 새롭고 더 나은 휴대폰을 계속 개발하기이다. 애플과 협력해온 사람들조차 삼성이 이제는 더 이상 베끼기 회사가 아니라 강력한 기술 경쟁자가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송을 강력히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에 사망한 잡스도 어쩌면 지금쯤 소송 밖에 안 남은 상황을 돌아보고는 입장을 바꿀 때가 됐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이제 유명해진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잡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오늘이 내게 남은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할 일을 과연 할까'하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만약 그 대답이 계속 '아니오'라면 이제 뭔가 바꿔야 함을 알게 되죠."

소송만 천 일이 넘었다. 이제 삼성과 애플의 임원진이 어느 날 아침 자신을 들여다 보고 드디어 "아니오"의 한계가 넘었음을 깨달을 날이 오기를 바란다.


The Great Smartphone War: Apple vs. Samsung | Vanity Fair

http://www.appleforum.com/mac-column/62166-%E5%A4%A7-%EC%8A%A4%EB%A7%88%ED%8A%B8%ED%8F%B0-%EC%A0%84%EC%9F%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