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장소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이만큼 그리움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 지인을 도와주기 위해 운고로 분화구의 어떤 동굴에 들어갔다. 동굴 깊숙한 곳에 가지각색 보석으로 장식된 장소가 눈길을 끌었다. 분명 예전에도 본 적이 있고, 감탄까지 했던 곳이다. 그냥 보라고 해 놓은 것인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 참으로 반갑고 정겹다.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여기저기 올라도 보고 돌아다녀도 봤다. 이곳 뿐만 아니라 근처에도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꾸며져있었다. 전체가 광채로 가득차 있는 동굴이다. 

 그런데 이 동굴을 보고 있자니, 와우를 처음할 때 운고로 분화구가 나를 몹시도 힘들게 했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양진영 모두가 웬만해선 거쳐가기 때문일까, 가뜩이나 퀘스트도 골치아픈데 얼라이언스까지 바글바글 했었다. 호위퀘를 한답시고 링고라는 이상한 NPC를 질질 끌면서 쓰러질 때마다 찬물을 퍼다 붓던 일이며, 불기둥 마루 가장 뜨거운 온도를 찾는다고 엉뚱한 곳 뛰어다니며 아무 보람 없이 고생한 기억도 난다. 거기에 퀘스트몹을 잡을라치면 휘익 달려와서 가로채는 녀석, 잊고 있던 일이 문득 생각나듯 갑자기 나타나 괴롭히고 가는 얼라이언스들을 상대했던 기억이 어제인 양 새롭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잖은 날에 까맣게 있고 있었던 운고로 분화구를 만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제로스 곳곳에 운고로 분화구같은 추억의 장소가 많다. 기이한 절벽들이 한기롭기 짝이 없던 버섯구름 봉우리, 와우를 막 시작하던 시절 광막한 들판으로 나를 붙잡은 불모의 땅, 야산의 연두색 참나무들이 햇볕에 반짝 거렸던 어둠의 해안. 지금은 모두 없다. 버섯구름 봉우리는 물에 잠겼고, 불모의 땅은 갈라졌다. 어둠의 해안은 잿빛 구름아래 거무칙칙하던 나목의 숲이 어느새 사라지고 잔해만 남은 모습이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처럼 여겨진다. 대격변의 사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지역들을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아 또 비루하게 느껴진다. 환경이 바뀌고 활기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내 기억 속의 옛 사람이나 특정한 장소 찾아보기를 좋아한다. 그 만남의 순간 맛보는 감회가 좋아서, 말하자면 아름답고 간명한 나만의 피서지를 찾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화되고 망가진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당해보는 날은 몹시나 허무하고 아련한 마음이 든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옛 추억들이 탄생했던 장소도 몰라보게 바뀌고 그 주인공들마저 하나 둘씩 사라져 가는 서운함을 누구라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그 추억들이 제발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어 끝까지 함께 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도 있다.

 인생의 숱한 사연들은 완성된 영화처럼 잘 편집되어 나타날 수는 없는 일이다. 몹시도 아름다운 일이었거나 또 몸서리 나게 기피하고 싶은 일이었거나 불문하고 결국은 생각 속에서 차지하는 무게만큼  남아 추억으로만 떠오를 것이다. 나는 이제라도 확장팩이 나오기 전 남아있는 시간동안 마음을 채워줄 좋은 추억 만들기에 힘 쏟을 작정이다. 잃어버린 그리움이 있으면 또 그만큼 오늘을 찍어 추억으로 만들면 된다. 비록 남의 눈에는 변변찮을지 몰라도 혼자 좋아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베란다의 화초를 대하듯, 매일 추억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