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저희 공대는 검둥의 네파리안마저 씹어먹고 안퀴라즈 폐허, 사원 공략에 접어들었습니다.

 

안퀴라즈 공략을 진행함에 따라 주말공대인 저희는 레이드 3곳을 공략해야만 했고

 

효율성 논란과 함께 화심을 공대일정에서 제외할 것이냐, 그대로 갈 것이냐에 대한 회의가 이뤄졌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다음달부터 화심을 공대공략에서 제외하며 공략일정을 조정할 것을

 

운영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지했습니다.

 

 

               < 현 재 >                                         < 다음달부터 >

토 : 화심 후딱 깨고 검둥 최대한 진행   -> 검둥 후딱 깨고 안퀴라즈 트라이

일 : 검둥 마무리 후 안퀴라즈 트라이    -> 하루 종일 안퀴라즈 올인

 

 

이렇게 변경이 되는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다음달까지 주말은 2번 남았습니다.

 

제가 라그나로스의 눈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이제 단 2번 뿐인 것입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파밍할 템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나오지 않는 폭풍우 손목과 벨라용방패 제외하고는 전부 다 먹었습니다.

 

네파리안 머리(불타는 관, 고양술사, 사냥꾼용), 네파리안 민첩 사슬 등 고양템까지 다 모았습니다.

 

줄구룹도 전부 파밍했습니다. 줄구룹 마부 완료하고 다음 먹을 템을 대비한 마부재료까지 갖춰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제 스펙은 지각5피스(35%마나회복 유지), 폭풍우 어깨, 네파리안 머리로 룩과 성능을 한 껏 살렸으며

 

피통 5000 / 마나통 5000이 달성되었습니다. (복원특성 마나5%증가 포함)

 

용아 비수, 가시쐐기 도끼는 전사, 도적 다 가지고 있는 템으로 제가 포인트를 써서 먹은 컬렉션일 뿐이었군요.

 

포인트는 공대 1위입니다. 공대 2위와는 2배 차이로 앞서있습니다.

 

제 창고에는 아케나이트주괴 90개가 라그나로스의 눈과 합쳐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퍼라스를 만들기 위한 나머지 잡재료들은 공대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라그나로스의 눈을 먹는 자가 재료들을 전부 쓸 수 있는 것이 공대 방침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신경쓸 것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라그나로스의 눈이 떨어지는 그 날 전 설퍼라스를 바로 손에 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1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구경도 해보지 못한 라그나로스의 눈이 과연 나올 수 있을지...

 

저는 저의 운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라그나로스는 잡을 수 있는 기회는 2번 남았습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난 저는 몸이 무척 무겁고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레이드하러 피시방 가야 하는데.... 1시간 전에 도착해서 출석체크랑 포인트 계산 해둬야 하는데....

 

도저히 나갈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었기에 저는 카페 게시판에 제 상황을 올리고

 

공략을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은 뒤 잠들었습니다. 심한 감기몸살이었죠.

 

밤새 열에 신음하며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요.

 

땀을 내고 푹 자고 다음날 일어나니 몸이 많이 좋아진 것을 느꼈고 일요일 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해

 

피시방으로 가서 접속했습니다.

 

 

접속해서 공초 받고 황야의 땅으로 와이번 타고 이동하는데 공대장님께서 귓말을 주시더군요.

 

'아... 술사님... 어떡해요... ㅠㅠ   어제...  어제... 라그나로스 눈이 나왔어요'

 

 

 

 

아....   이런.... 영화같은.... 뭐 같은 상황...

 

10개월 동안...

 

단 한번도...

 

결석은 커녕 지각도 안하고... 참여했는데...

 

아파서 하루 빠졌는데...

 

그 날 눈이 나왔다고?....

 

잠깐만!!! 이게 그러니까...

 

10개월 동안 주말동안 했으니까...

 

한달에 주말이 8번... 80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널려있는 카드 80개 중 단 한장있는, 뽑으면 절대 안되는 조커카드 한장을 한번에 뽑은거란 말이지...

 

아... 이런.... 진짜... 영화같은...

 

 

정말로 억울하고 분하더군요.

 

내가 이렇게 운이 없는 놈이었나....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는 말을 전 그 때 믿게 되었습니다.

 

라그나로스 눈은 당시 포인트 2위였던 전사님이 드시고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일요일 검둥공략 시작부터 안퀴공략까지 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공대 분위기가 안좋을때면 항상 저는 여러 가지 아이템과 개그로 공대원을 웃기며 즐겁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늘 쉴새 없이 떠들어대고 공대원 한명한명을 챙겼지만

 

이 날은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아무 것도 신경쓸 수가 없었습니다.

 

공대원들은 그런 저의 심정을 잘 아는지 제 눈치까지 살피며 저에게 귓말로 위로를 해주더군요.

 

당연히 감사하고 고맙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저는 머리 속이 하얘져서 답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공대 채팅창은 아무 말도 없이 공략을 브리핑하는 공대장님의 글만 올라왔습니다.

 

그 날 공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공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공략이 모두 끝나고 저는 귀환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그 때 공대장님은 저에게 다가와,

 

 

'힘내요... 다음주 토요일 한번 더 있으니 나올 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오닉시아 잡으러 갑시다.

 

 설퍼는 아니지만 내가 술사님 죽음의 인도자 먹게 해 드릴께'

 

 

10개월 동안 오닉시아도 라그나로스랑 똑같은 횟수로 잡았지만 죽인은 구경도 못했거늘...

 

그게 먹겠다고 가면 나오는 그런 템인가...

 

저는 그냥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지만

 

같이 가자고, 먹게 해주겠다고 조르는 공대장님과 공대원들의 마음이 감사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닉시아를 잡고 난 후 떨어지는 '죽음의 인도자'.

 

공대원들이 박수를 쳐주고 공대장님은 한손 무기 중에는 이게 최고라며 이걸로 질풍 맞아봤는데

 

진짜 아팠다고... 죽인의 가치를 한껏 치켜올리며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죽음의 인도자'를 먹은 뒤 공대원은 접속종료하기 전까지 귓말로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모두 귀환해버린, 아무도 없는, 텅빈 오닉시아 둥지 안에서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오늘 하루 제 행동을 곰곰히 돌아보며 제 자신을 비난했습니다.

 

'내가 템을 못먹었다고 왜 공대분위기가 무거워져야 하는건데?'

 

'내가 운없고 복없어 못먹은건데, 왜 우리 공대원들이 내 눈치를 보는건데?'

 

'그리고 너는 왜 떨어진 죽인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쳐먹은거냐.

 

 설퍼라스 못먹었으니 니가 먹는게 당연한거냐?

 

 공대장님은 아직도 싸구려 무기 들고 메인탱킹하는데...

 

 같이 따라온 사람 중에 죽인 먹고 싶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거잖아.

 

 도대체 니가 뭔데 당연하다는듯이 그걸 쳐먹은건데?'

 

 

와... 정말로 부끄럽고 민망하더군요... 뒷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처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제가 설퍼라스 먹기 위해 이 공대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레이드라는 컨텐츠를 즐기기 위해 가족 같은 공대원들과 즐겁게 게임하기 위해 들어온건데...

 

그 날 제 행동은 마치 설퍼라스 먹기 위해 지금껏 10개월 동안 공대에 몸담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 날 집에와서 잠들기까지 공대장님과 공대원들에게 민망하고 부끄럽더군요.

 

 

[질풍술사 이야기 보너스] - 추억의 아이템 -  편에서 죽음의 인도자 스샷을 올려뒀습니다.

 

그리고 이 템에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현재까지도 제 창고에는 죽음의 인도자가 가장 윗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형상변환시스템이 생길 줄 꿈에도 모르던 터라 지각셋, 폭풍우셋, 그 외 무기들 전부 다 팔았지만

 

죽음의 인도자만큼은  팔지 않았습니다. 아니, 팔 수 없었습니다.

 

이 '죽음의 인도자'는 당시 공대원들의 마음이 들어간 제 최고의 보물이기에,

 

미안함과 감사함이 함께 스며있는 아이템이기에.... 와우가 망해서 서버가 사라지는 날까지...

 

저는 소중히 보관할 것입니다.

 

'죽음의 인도자'는 그 어떤 전설템보다 좋은 저만의 보물입니다.

 

'사람의 마음'보다 소중한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 주말부터 저는 공대원들에게 제 마음 전부를 주기로 결심하며 잠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