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ORPG 이전에 RPG라는 쟝르를 보면, 뭐 정해진 스크립트대로 따라가는 형식의 JRPG도 있었지만 울티마 시리즈로 대변되는 서양쪽 RPG는 일종의 가상현실을 만드는데 포커스를 맞춰서 만들었죠.

평범한 주인공이 브리타니아의 아바타로 소환돼서 게임이 시작되는데, 이후에는 소젖을 짜고 양털을 깎고 빵을 굽고 하면서 세계여행을 할 수도 있었고, 마을사람의 주머니를 털거나 학살하는 범죄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메인스토리만 따라가면서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죠. 저런 형식의 중세RPG 계보는 오늘날 엘더스크롤 시리즈로 이어지죠. 

저런 자유도 높은 진행이 가능했던 이유는, 게임사가 게임세계의 "리얼리즘"에 최우선적인 포커스를 맞췄기때문이죠. 메인스토리나 퀘스트등은 그 위에 얹어진 토핑정도의 역할이었구요. 전투 역시 중요한 재미요소긴 했지만 전투 그자체에만 촛점을 맞춰서 나오는 핵앤슬래시 게임들처럼 디테일하거나 비중이 높진 않았구요. 전투 그자체만 따로 놓고 보면 당시에도 RPG보다 전술성 전략성 액션성 등등에서 우월한 게임들이 훨씬 많았죠. 스토리만 따로 놓고 봐도, 역시 그 자체에만 촛점을 맞춰서 만들어진 어드벤쳐 게임들에 비하면 연출력이나 디테일함에서 역시 상대가 안됐구요.

한마디로, "얕고 넓은" 종합선물세트같은 게임이 RPG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겪은 RPG가 주는 게임경험 자체는 오히려 저런 게임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물론 각각의 요소를 따로 놓고 보면 분명히 열등한게 맞는데,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따로 놓고보면 별로 의미없는 자잘한 "리얼리즘 장치"들이 모이고 모여서 실제 내가 게임세계에 존재하는듯한 거대한 몰입감을 만들어줬으니까요. 단순한 전투라도 거기에 강하게 몰입해있는 상태에서 치르는 큰 전투는 반쯤은 현실에서의 승리마냥 큰 희열을 줬고, 그런거 없이 그냥 전술성/전략성의 관점에서 치르는 전투는 단순 퍼즐에 지나지 않죠.
즉, RPG의 핵심적인 재미는 그 게임세계로의 "몰입"에서 왔고, 게임사는 그것을 위해 그 세계를 최대한 리얼하게 묘사했죠.

여기까지가 RPG 얘기.



그리고, RPG는 이후 AberMUD -> DikuMUD의 머드게임 계보를 거쳐서 오늘날 MMORPG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버퀘스트로 이어졌죠.(혹자는 DikuMUD의 그래픽 버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하이엘프 여케의 I'm not easy라는 슬로건답게 에버퀘스트는 상당히 하드코어하게 리얼리즘을 구현했습니다. 유저도 항상 음식을 먹어야 했고(인벤에 있으면 자동으로 먹어졌던걸로 기억합니다.), 장시간 굶으면 점점 회복이 안됐죠. 죽으면 모든 아이템을 시체에 떨구는데, 7일간 찾지 못하면 전부 날아갔고요. 인스턴스따위도 없어서 필드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던전에서 여러 파티가 사냥하며 분쟁이 생기기도 했죠. 

기억이 잘 안나서 영상을 찾아보니 요즘은 3인칭 시점으로도 하는거같던데, 당시에는 3인칭 자체는 됐지만 뭔가의 이유로 그걸 실사용하는건 거의 불가능했고, 그래서 1인칭으로 게임할수밖에 없던걸로 기억합니다. 이것도 생각해보니 리얼리즘에 크게 한몫 한거같습니다. 초보시절 오크가 쫓아와서 한참 도망가다가 뒤를 돌아보는데 오크가 딱붙어서  그 못생기고 커다란 얼굴을 바로 앞에 들이댔을때의 쇼크라던가...3인칭으로 멀리 땡겨보는 와우에서 큰몹들은 사실 별로 커보이지 않는데, 1인칭 시점이 강제된 에버퀘스트에서 그 비슷한 사이즈의 자이언트는 3층건물이 달려오는듯한 정말 어마무시하게 커보였죠...(그러나, 몰입감보다 전투의 전술성이나 전략성같은 측면에서 접근하면 3인칭 시점이 더 낫죠.)

MMORPG 최악의 보스 아닌 보스로 꼽히는 투명드래곤 케라핌의 연출도 대단했죠. 잡는게 불가능한 보스몬스터라니...(옛날에 읽은거라 부정확할 수 있는데, 케라핌을 사냥했던 길드도 심심해서(?) 10분간 딜을 해봤는데 피통이 99.9%로 떨어지는걸 보고, "피가 떨어지긴 떨어지는구나" 해서 즉석에서 한번 해보자 해서 했다고 기억합니다. 스치면 사망이라 힐러들은 힐 대신 부활만으로 지원했고, 4시간이 넘는 전투끝에 20~30%까지 피통을 깎았지만 게임사에서 케라핌을 회수했다고 하죠.) 우드엘프 마을은 숲의 나무들 사이에 좁은 다리로 연결을 해놓은 형태였는데, 처음 게임 시작한 초보들은 떨어져서 한번 죽고 시작하는게 대부분이었죠.(바닥에는 언제나 시체들이 즐비했구요.) 종족도 밸런스따위 버리고 로어에 올인해서 만들어서 요즘 게임들에 비하면 종족차이가 훨씬 크게 났구요. 

게임플레이(전투) 자체는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단조로웠다고 봅니다. 그러나, 특유의 하드코어한 리얼리즘으로 인해 제가 가장 강하게 몰입했던 게임이라, 지금도 저에겐 MMORPG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임입니다.

여기까지가 에버퀘스트 이야기.(사실 넘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납니다. - _-;)



에버퀘스트의 하드코어 게이머들이 모여서 만든 와우는 많은 부분을 에버퀘스트(+다옥)에서 빌어왔고, 거기에 블리자드 특유의 향신료를 뿌렸죠. 애초 블리자드는 RPG보다는 워크래프트나 스타크래프트같이 "따로 방잡아서 즐기는 전투 중심"의 게임을 만들던 회사였기때문에 와우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을 만들고싶었을겁니다. 바로 인스턴스죠.

초반에는 에버퀘스트의 영향으로 곳곳에 리얼리즘 장치들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확장팩을 거듭하며 블리자드 특유의 향신료는 점점 강해집니다. 편의성이 대폭 강화되었다고 하는데, 편의성이라는걸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게임이 아닌 부분을 스킵하는것"이죠. 블리자드는 초기 와우에서 게임과 게임이 아닌것을 선명하게 구분했던것같습니다. 예를들어, 리얼리즘은 "게임이 아닌 부분"이었고, 인스턴스는 "게임"이었죠. 실제로, 블리자드 입장에서 "진짜 게임"인 인스턴스 내부에는 저런 편의성을 적용하지 않거나 적용해도 엄격하게 필터링하면서 적용했구요.

그렇게 리얼리즘보다는 인스턴스 위주의 게임이 되어갔고, 자연스럽게 로어보다 밸런스를 우선하는(대표적으로 직업구분을 하이브리드/퓨어가 아닌 전문화로 나눠서 각 전문화는 전부 과거의 퓨어 직업들과 동일한 수준의 역할수행이 가능하게 한다던가)게임이 되어갔죠.

여담이지만 저 블리자드 특유의 향신료라는게 "나쁜거"라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나름대로 많이 발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발전의 방향이 (제 기준에서는)점점 RPG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거같구요.

가상세계의 리얼리즘이나 그런건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걸 넘어서, 필드를 지나다 보면 뜬금없이 중국산 모바일 게임같은게 등장하는, 아예 그런 리얼리즘을 깨버리게 만드는 전역퀘스트같은 요소들이 대거 추가되었죠. 과거의 RPG 역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같은 게임이었지만, 그 장치들은 게임세계를 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해주는 리얼리즘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추구했죠. 반면, 현재의 와우는 서로간에 큰 관련성을 찾아보기 힘든, 서로 독립적인 게임속의 게임들이 대거 추가되었는데, 그 많은 장치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그런건 없는듯  보입니다.(그러다보니 그냥 "할것" 혹은 "숙제" 이상으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갠적으로 MMORPG 올드비들이 현재의 와우에서 찾아볼 수 없다며 그리워하는것은 그 세계로의 몰입이 가능한 리얼리즘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사람이 변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와우 역시 변한건 맞고,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MMORPG 올드비들이 원하는 그것과 많이 다른것도 맞는거같습니다. 오히려 롤이나 오버워치, 디아블로에 더 가까운 게임이 된것같아요. 물론, 그게 요즘 트렌드라고 하니 비난할만한 일까지는 아닌거같습니다.(다만, 그렇다면 쓸데없이 "할일" 만들어준다며 이상한거 하지 말고 아예 그쪽을 향해서 나아갔으면 합니다. 저도 오버워치나 그런 게임들도 RPG와 다른 종류의 재미로서 좋아하는데, 저 게임들은 쓸데없는 노가다 없이 하고싶은것만 해도 되잖아요.) 

여기까지가 와우 이야기.



클래식은 기대반 걱정반입니다. 기대반은 아직 블리자드가 리얼리즘->인스턴스 핵앤슬래시로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의, 개인적으로 리얼리즘과 편의성이 적절하게 조화된(에버퀘스트는 솔직히 시간적으로 너무나 하드코어했습니다.)게임이었다는점이고, 걱정반은 그 게임 자체와 그 미래(?)까지 이미 알고있는것들이라 완전히 모르던 상태에서 접했을때보다 몰입감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뭐 일단 나와봐야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