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에는 다양한 종목 만큼 많은 리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상금이 높은 대회를 꼽자면 단연 도타2의 The International(디 인터내셔널, 이하 TI)을 꼽을 수 있다. 1-2차 대회는 총 상금이 160만 달러 규모였지만, 작년 TI3부터 유저들의 아이템 구매가 상금 누적으로 이어져 총 상금이 30억 원 규모로 진행됐고, 이번 TI4는 무려 60억 원 규모를 넘었다. 이에 밸브는 총 목표액을 100억 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상금 규모가 이토록 엄청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도타2는 해외에서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가장 많은 게임 중 하나다. 워크래프트3 유즈맵인 도타 올스타즈부터 형성된 탄탄한 유저층이 도타2를 든든하게 지지하고 있다. 둘째는 밸브의 마케팅 능력이다. 기록서 총 수입의 25%가 TI4의 상금으로 적립되며, 일정 구간을 돌파할 때마다 밸브의 공약이 하나씩 이루어진다. 이에 유저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고, 그에 따라 TI4의 상금은 수직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국내 도타2 시장은 불모지에 가깝다. 밸브가 국내 영업을 직접 하지 않다보니 한국은 도타2 베타테스트 때 제외됐다. 그 사이 리그오브레전드가 국내 시장을 점령했다. 밸브가 정식 서비스에 맞춰 넥슨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지만 이미 대세가 크게 기운 뒤였다.
그렇지만 넥슨은 연 2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고 실행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며 일갈했다. 부정적인 목소리도 많았고, '도타2 e스포츠를 계속해야 하나?'라는 의문도 제기됐다. 하지만 '대형사고'가 터졌다. MVP 피닉스가 동남아예선에서 최종 2위를 기록, 시애틀 행을 이루어냈다.
■ 1. 넥슨이 도타2와 손을 잡은 이유 :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
한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e스포츠의 개념을 정립한 국가다. 이미 98년부터 스타크래프트1 리그를 시작하며 e스포츠의 태동기를 거쳤고, 기업의 본격적인 참여로 선수들이 연봉 계약을 맺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연습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다져진 프로게이밍 인프라는 한국에게 독보적인 e스포츠의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가 국내에 상륙하면서 판도는 뒤바뀌었다. 스타크래프트의 후속작인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가 블리자드-협회간 지적재산권 분쟁 등 여러가지 이슈로 힘을 받지 못하는 사이 국내 팬들에게는 생소한 장르의 게임인 LoL이 출시 되었고 쉬운 게임성을 무기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e스포츠의 방향성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북미에서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LoL에서 한국은 후발주자였다.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와 달리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러나 이 격차를 따라잡는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즌1 월드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는 출전조차 못했던 한국이 시즌2 롤드컵에서는 준우승, 시즌3 롤드컵에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올스타전에서 증명했듯이 이제는 LoL에서도 한국이 세계 최강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LoL은 쉬운 접근성 덕분에 한국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게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PC방에 모여 팀플레이를 즐기는 여가 생활의 일부가 청소년들 사이의 사회 문화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친구들과 LoL을 모르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고, 이 덕분에 LoL의 점유율은 더 높아지는 현상을 가져왔다. 결국 PC방 점유율이 계속 상승한 LoL은 마침내 4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면 넥슨은 왜 도타2를 품에 안았을까? 정리하자면 공개 베타테스트만 2년 가까이 진행한 높은 완성도, 도타2가 AOS 장르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점, AOS가 리그오브레전드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장르가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 2. 국내를 점령한 LoL : 이에 대항해 공격적인 투자를 선보인 넥슨
국내 시장을 과점한 LoL은 도타2에게 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저를 휘어잡은 LoL과 같은 장르인 도타2를 국내에 런칭하는 것은 넥슨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 게이머들은 신작 게임에 마음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연 게임은 항상 최고이길 원하며 세계 그 어느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즐기는 특성이 있다. 즉, LoL에게 마음을 열어준 유저들을 어떻게 도타2로 불러들일 것인가가 넥슨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에 넥슨은 국내 서버 런칭 일정에 맞춰 넥슨 스타터 리그를 개최, 하드 유저들을 프로게이머로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2013 E3에서 넥슨 서민 대표와 김인준 실장은 도타2에서 20억 원 규모의 e스포츠 대회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도타2 스타터 리그(NSL) 개최에 이르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도타 국가 대표 출신이었던 'March' 박태원이 소속된 FXOpen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상금 1,000만원과 함께 TI3 초청권을 확보하게 됐다.
이후 넥슨 스폰서십 리그(NSL)가 1년 세 시즌 3억 원의 상금을 걸고 진행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 일시불로 지급하는 구조가 아니라 구성원이 3명 이상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속에서 1년간 상금을 나눠 지급하는 이례적인 구조로 책정됐다. 또한 우승을 차지한 팀은 이후의 시즌에는 참가할 수 없는 규정도 만들었다. 이는 프로게임단의 육성에 무게추를 두겠다는 넥슨의 확고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넥슨이 이렇게 판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이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e스포츠 종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도타2 선수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세계 무대 위에 선수들을 올려놓는 것, 이것이 넥슨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이후 온게임넷에서 도타2 슈퍼매치를 통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국내팀을 스파링 시킨 것도 이러한 목표가 있었기에 추진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처참하리만큼 좋지 못한 결과를 거뒀다.
■ 3. '제퍼'의 등장 : 세계와의 경쟁에서 첫 성과를 거둔 MVP 피닉스
넥슨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NSL 시즌3 때 푸른 눈의 전사가 등장했다. '퍼지', '섹시뱀부' 등 유명 스트리머들이 결성한 '제퍼'가 한국 도타2 시장에 진출한 것. 이는 마치 작은 저수지에 황소개구리가 출몰한 것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국내의 인지도에 비해 세계적인 기준으로 봐도 큰 상금이 걸렸으니 상금 헌팅을 노린 용병 기용은 몇 번 있었지만, 외국인들이 팀을 결성해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곧바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도타2가 시작부터 파격적인 상금이 책정된 것은 한국 프로게임단의 원활한 연습환경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퍼의 등장은 넥슨이 예상한 일이 아니었고, 자연히 한국 도타2 생태계를 망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넥슨은 제퍼의 NSL 입성을 심각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넥슨은 결국 제퍼를 NSL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국내 도타2 시장에 진출한 제퍼는 NSL 시즌3를 곧바로 우승하고 KDL 시즌1에서 전승 행진을 달리며 파죽지세의 행보를 보였다. MVP 피닉스가 간간히 한 세트 따낸 것이 성과였을 뿐, 제퍼의 질주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랬던 제퍼도 시즌2 들어서 MVP 피닉스에 0:2로 패배를 거뒀다. 제퍼의 등장이 도타2 한국 선수들의 기량을 상향평준화하는데 어느정도 일조한 셈이다.
MVP 피닉스는 획득한 상금을 기반으로 체계적인 숙소 생활을 하는 팀이지만 사실 지금의 팀원이 뭉치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5inQ에서 활동하던 'QO' 김선엽이 MVP 피닉스에 입단한 것도 KDL 시즌2 개막 전에 일어난 일이다. 호흡에 문제가 있을만 했다. 스타래더 시즌9 예선전에서 7전 전승으로 한국 국가 대표 자격을 획득한 MVP 피닉스는 기세좋게 우크라이나로 출국했지만, 우려했던 대로 Empire, DK, 얼라이언스에게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MVP 피닉스는 마치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NSL 시즌3 우승 이후 전승 질주를 하던 제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더니 TI4 동남아예선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애로우에게 전술적인 한계를 드러내긴 했지만, TI4 본선이 열리는 시애틀행을 확정지으면서 한국 도타가 세계무대에 보란듯이 올라섰다. 도타2가 국내에서 정식 런칭한지 207일, 만 6개월 25일만의 일이다.
■ 4. 보는 재미가 도타2의 길 : 한국인의 게임 실력은 민족의 본능이다
넥슨 도타2실의 박성민 실장은 인벤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넥슨의 목표는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며 도타2와 같은 종목은 보는 재미가 중요한 콘텐츠"라고 밝혔다. "넥슨이 여러가지 게임을 운영하지만 e스포츠화를 할 수 있는 게임은 극히 적다"며 "피파온라인3와 도타2와 같은 게임은 스포츠와 접목할 수 있고, 보는 재미를 강조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박 실장은 넥슨이 프로게임단 양성에 집중적으로 나선 까닭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위선양에 관심이 크다. 야구가 WBC이후 관심이 급증해 성장하기도 했고 그 외에 월드컵이나 피겨스케이트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 e스포츠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총상금 60억 원 규모의 TI에서 선전을 펼친다면 유저들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넥슨은 2013 E3에서 e스포츠 사업에 연 20억 원을 투자하겠다며 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박 실장은 "작년과 올해를 합쳐 e스포츠 예산으로 40억 원 가까이 사용하면서 약속을 지켰다."고 밝히면서 "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큰 것 같지만 그렇다고 투자만 해서 성공하기는 힘들다. 종목사의 의지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유저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MVP 피닉스가 거둔 성과는 괄목할 만한 수준이었다. MVP 피닉스는 NSL 시즌2 우승을 차지하고 얻은 상금으로 숙소를 준비하는 등 안정적인 연습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무모하다고 보일 정도로 선수들에게 크게 투자한 넥슨이 첫 성과를 거둔 셈이다.
다른 종목에서도 증명됐듯 한국인들의 게임 실력은 민족의 본능이다. LoL판을 한국이 접수하는 데 약 2년 반 정도가 소요됐다. 실제로 이번 MVP 피닉스가 단기간에 거둔 성과에 대해 외국 유저들은 'Korean is coming'이라며 경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넥슨의 투자가 이제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을 뿐, 아직 확대해석을 하기엔 시기 상조다.
■ 5. 전폭적 지원 속에 세계로 향하는 한국 도타2 : 지속성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박 실장은 "우리가 선수들에게 지원하는 부분은 상금 외에도 많다."며 "스타래더 시즌9이나 앞으로 열릴 ESL 출전 등도 우리가 지원하는 영역"이라고 밝혔다. "그 외에도 선수의 컴퓨터와 마우스까지도 지원하기도 하며 필요한 경우 유니폼이나 팀을 상징하는 앰블럼도 제작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넥슨의 지원은 전방위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도 지속성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MVP 피닉스가 거둔 성과는 괄목할만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넥슨이 원하는 이상향은 최정상의 e스포츠 리그인 TI 무대 에서 한국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명경기를 펼치고, 이로 인해 도타2가 한국인들의 국민 게임으로 자리잡는 단계다. 여기까지 올라서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직은 그야말로 '이상향'이다.
이에 대해 박 실장은 "선수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입문한 만큼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지금도 티어3 팀들을 중심으로 프로팀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문의가 오고 있다"라고 밝힌 뒤 "넥슨과 도타2실은 리그들이 지속적으로 열릴 수 있도록 꾸준히 투자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유저들이 호응해줘야 더 멋진 리그를 만들 수 있다. 유저가 없는데 투자만 하는 것도 애매한 것이 사실"이라며 유저들의 호응을 강조했다.
'마치' 박태원은 TI3에 초청되어 현장의 열기를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다음에는 TI4의 무대에서 경기를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시애틀로 향해 2위 팀들과 마지막 진출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지만 동남아 1티어급 경쟁자들을 꺾고 조 2위를 기록, 작년에 밝혔던 각오를 이룬 셈이 됐다. 넥슨도 '적은 해외에 있다'라는 생각 하에 선수들의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했고, 이제 그 첫 성과가 나왔다. 한국의 도타2 제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Korean is 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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