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 피닉스와 윙즈 게이밍의 승자전 2라운드 경기는 윙즈 게이밍의 2:0 승리로 끝났습니다. 밴픽, 설계, 운영 모든 면에서 윙즈 게이밍이 설치한 노림수에 MVP 피닉스가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죠. 사실 두 세트 모두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2세트에서는 압승을 거둘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가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을까요? MVP 피닉스는 서두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고, 그것이 경기를 그르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윙즈 게이밍은 밴픽만 이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완벽하게 활용할 줄 아는 머리와 전투력도 지니고 있었죠. 윙즈 게이밍은 MVP 피닉스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캐치하면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에서 패배해 패자전으로 내려가는 것이 확정된 후,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선수들은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각자 소파에 앉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침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죠. 숙소로 돌아가는 밴에 탄 후에도 한동안 어두운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임현석 감독님이었습니다. 무거운 얘기를 하면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것을 우려해서인지 일상적인 주제인 "저녁 뭐 먹을까"로 운을 떼었죠. 그래도 선수들이 말이 없자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패자전에서 이기면 되지 않느냐"며 선수들을 격려하면서 다시금 선수들에게 뭘 먹고 싶은지 물어봤습니다.

조금 기운을 차린 선수들은 서로 좋아하는 메뉴를 말하다가 초밥으로 의견을 모았고, 드디어 말문이 트이면서 서로 경기 내용을 복기하며 각자가 분석한 패인을 이야기했습니다. 숙소에 차량이 도착하는 약 20분 간 이야기는 쉬지 않고 이어졌죠.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초밥집에 들어가자 그곳에선 이미 팀 리퀴드 전원이 자리한 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팀 리퀴드의 코치로 가 있는 '힌'이승곤 코치는 MVP 피닉스의 선수들을 보더니 "야 왜 졌어, 이러면 우리 결승에서 못 만나잖아"라며 자기 방식대로의 위로를 건넸습니다. 멘탈을 금방 회복한 선수들은 EG VS 이홈 경기를 핸드폰으로 틀어놓고 실시간 경기 평가를 하면서 식사를 했죠.


아침에 비몽사몽하며 눈을 뜨자 드디어 시애틀 도착 이후 처음 보는 '맑은 아침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작년엔 날씨가 매일 이랬는데, 올해에는 아침만 되면 먹구름이 잔뜩 껴서 사람 기분까지 우중충하게 만들곤 했죠.

그러나 이 좋은 날에 또다시 빛도 별로 없는 키 아레나 내부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억울함이 밀려왔습니다. 도착하고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일하느라 아직도 시차적응이 제대로 끝나지 않아 수면 부족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날에 바깥 구경도 못하다니?

약이 오른 저는 뒷일은 제쳐두고 일단 피크 플레이스 마켓으로 향했습니다. 여전히 인파는 정말 대단한 수준이었는데, 기분 탓인지 생선 비린내가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네요. 저는 시애틀 맛집을 잘 아는동료 기자의 추천을 받고 한 햄버거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생각보다 좀 먼 곳에 있긴 했지만 그런 고생을 다 잊게 해줄 정도로 맛과 양이 기가 막히더군요. 시애틀에 또 올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다른 메뉴를 골라봐야겠습니다.


한편, 이날 키 아레나 현장에서는 TI에서 빠지면 섭한 올스타 매치가 펼쳐졌습니다. 올스타 매치는 수많은 도타2 프로 선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있는 최상위 1%만 참가할 수 있는, 일종의 인기의 지표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벤트죠.

이날 MVP 피닉스에서는 '큐오' 김선엽 선수만 올스타 매치 현장을 찾았는데, 이제보니 올스타 매치를 치를 10명 중 하나로 뽑힌 게 아니라 30명이 넘는 프로 선수들을 한 데 모으고 현장에서 게임에 참가할 팬이 함께하고 싶은 프로를 선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장을 찾아도 올스타 매치에 참여를 할 수도, 못할 수도 있었죠. '큐오' 선수는 앞서 9명의 선수가 뽑힐 때까지 부름을 받지 못했으나 마지막 10번 째에 MVP 피닉스의 팬이 등장하면서 올스타 매치에 참가하게 됐습니다. '아티지', '덴디', '피어' 등 세계 최고의 인기스타만 낄 수 있는 그곳에 말이죠.

'큐오' 선수를 지목한 팬이 아이디를 MVP TI CHAMPION으로 짓는 바람에 이 아이디로 플레이하던 도끼전사가 김선엽 선수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실제 '큐오' 선수는 외계 침략자로 게임을 캐리하는 중이었죠. 이번 올스타전 현장에서는 도타 올스타즈에서 이식되지 않은 마지막 영웅잉 핏 로드가 공개되면서 팬들의 어마어마한 환호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MVP 피닉스의 선수들은 연습용 방에 모여 한식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포렙' 이상돈 선수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고, 'MP' 표노아 선수는 프나틱 VS 얼라이언스전 리플레이를 보고 있었죠. 이상돈 선수는 게임을 하면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마지막 결과를 보니 이기긴 한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제가 지금껏 MVP 피닉스를 봐 온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전략 회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선 임현석 감독님이 윙즈 게이밍전 패배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느끼고 분석한 바를 말했고, 이어서 '힌' 코치가 본인에게 들려준 조언까지 말해줬죠. 계속해서 드래프터인 '두부' 김두영 선수는 상대와 자신들의 밴픽 흐름 구도를 말해주고, 엑셀 파일로 정리해둔 모든 경우의 수를 짚어가며 밴픽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캡틴인 '큐오' 선수는 자신이 느낀 윙즈 게이밍전 패인을 말하고 고쳐야 할 방향을 제시한 뒤, 다른 선수들의 의견도 받는 등 서로 활발하게 의견 교환을 했습니다. 모두가 각자 생각한 바를 말한 뒤, 임현석 감독님은 "우리 팀은 남은 다섯 팀 중 제일 똑똑한 팀이라고 봐. 절대 0:2로 연속해서 질 팀이 아니니까 높은 무대라고 너무 얼지 말고 편안하게 게임을 해"라며 선수들을 격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최윤상 총감독님이 마무리를 지으면서 MVP 피닉스의 전략 회의는 끝을 마쳤습니다.

회의를 하던 도중 뉴비의 '츄안' 선수가 방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크게 'MVP 파이팅, 굿 럭!'을 외치고 떠났습니다. 30초 정도 지나자 이번에는 한때 동지였던 'kpii' 선수가 문을 열고 같은 말을 했고, 또 30초 정도 후에는 팀 리퀴드의 '제락스' 선수도 들어와 응원을 해줬죠. 30초 간격으로 세 명이 오자 '큐오' 선수는 따로따로 오지 말고 한 번에 좀 오라며 귀여운 구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해가 될까봐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선수들의 실시간 피드백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들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준비된 카드들이 아직도 꽤 있었다는 것도요. 과연 이들을 게임에 잘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는 둘째치더라도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는 않았죠. 내일 있는 프나틱전에서는 한층 더 강해진 MVP 피닉스의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이제 TI6의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초청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MVP 피닉스는 과연 내일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또다시 국내 도타2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