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중의 걸작, 슬램 덩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나? 강백호, 서태웅, 윤대협, 설마 채소연? 아마 각자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인물들을 얘기할 것 같다. 워낙 색깔이 강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만화니까. 하지만 안경 선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밋밋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다. 안경 선배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처럼. 그래서 강백호와 서태웅처럼 우리들의 이상향 같은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만화에서라도 덩크를 찍는 그 짜릿함을 대신 느껴야 하지 않겠나.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안경 선배 같은 사람이다. 필수 아이템인 안경을 착용하는 그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푸근한 친구의 인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프로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았던 적이 없을 정도로 안경 선배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나쁘게 말하면 특색이 없다는 얘기다. 스타성이 부족하다. 선수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요인이다. 그러나, 안경 선배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매일 같이 연습했다. 팀원들은 오랜 시간 묵묵히 해온 그를 믿고 따르고 있다.

14일 1위 팀 kt 롤스터를 2:0으로 꺾은 MVP '맥스' 정종빈의 이야기다. 지난 시즌 내내 한 번도 MVP를 받지 못했던 그는 오늘 경기에서 MVP를 독식했다. 만화처럼 중요한 경기, 중요한 상황에서 마침내 3점 슛에 성공했다.


그는 이번 시즌 총 11개의 챔피언을 사용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챔피언 폭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도전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다행히 그는 결과로 증명해 보였다.

지난 9일 콩두 몬스터와의 대결에서 벨코즈 서포터를 사용하여 압도적인 수치로 딜량 1위를 찍었다. 해설자들은 미드 벨코즈라며 칭찬에 가까운 농담으로 그의 활약을 얘기했다. 바로 그다음 경기인 진에어와의 대결에서는 다른 선수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쓰레쉬와 질리언으로 서포터 캐리가 무엇인지 또 한 번 보여줬다.





1세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탐 켄치


이 두 경기는 비교적 약체팀과의 경기였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그의 실력이 정상의 무대에서도 통하는지 알 수 있는 대결이었다. 1위 팀 kt 롤스터와의 첫 세트, 그는 비교적 무난한 챔피언인 탐 켄치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의 글로벌 궁극기는 특별했다.

라인전은 한 수 접고 들어갔다. 상대가 카르마였기 때문이다. 그의 파트너였던 진도 신발-4포션을 시작하면서 최대한 버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의지와는 다르게 오랫동안 포탑을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냥 내주지 않았다. 탐 켄치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포탑을 내주면서 '애드' 강건모의 카밀과 함께 상대 애쉬의 뒤를 노렸다. '맥스'는 '마하' 오현식을 태우고 궁극기를 사용했고, 카밀은 순간 이동으로 호응했다. 완벽한 설계에 애쉬는 이미 생존을 포기하며 묵묵히 CS를 수급했다. 공짜로 포탑만 내줄 수 있는 상황에서 애쉬를 잘라내 최대한의 이득을 취했다.

▲ 빠른 판단과 콜 플레이

탑 다이브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봇 라인 쪽을 향해 걸어가던 '맥스'와 '마하'는 상대의 탑 다이브를 눈치채고 바로 방향을 선회했다. 봇 듀오의 재빠른 커버로 인해 레넥톤을 데려가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맥스'는 과감한 앞 점멸로 레넥톤을 잡아먹었다. 봇 듀오의 커버로 포탑도 지킬 수 있었다.

활약은 계속됐다. 주도권을 잡은 kt는 라이즈와 레넥톤을 중심으로 1-3-1 운영을 시작했다. 자칫하면 MVP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뻔했다. 상황을 헤쳐나간 선수는 '맥스'였다. 탐 켄치는 궁극기로 라이즈를 잘라내 상대의 좋은 흐름을 다시 끊어버렸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탐 켄치의 활약으로 MVP는 조금씩 반격에 나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해답이 된 심연의 통로

성장을 마친 MVP는 후반에서야 싸움에 나섰다. 탐 켄치는 한타에서도 빛났다. '애드'의 카밀이 상대의 적진에 들어가 딜러를 잘라냈지만, 상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위기에 빠진 카밀을 탐 켄치가 입에 넣고 유유히 걸어 나왔고, 이를 통해 MVP는 바론을 획득할 수 있었다. 최종 한타에서는 탱킹력으로 상대의 스킬을 몸으로 받아냈다. 탐 켄치가 버텨내자 MVP의 딜러들은 상대를 모두 괴멸시켰다. 그야말로 전천후 활약이었다.



2세트, 다 태워 버린 방화범 브랜드




'맥스'는 2세트에서 또 한 번 도전을 시도했다. 2세트에 사용한 챔피언은 방화범 브랜드였다. 브랜드가 밴픽창에서 선택이 되자,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브랜드는 팬들의 기대만큼이나 화끈한 딜량을 뿜어냈다. 팀 내 1위였다.

생존기가 부실한 브랜드이니 봇이 격전기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첫 킬은 역시 봇에서 발생했다. 주인공은 '맥스'였다. 먼저 움직임을 취한 쪽은 kt였다. kt는 진의 궁극기를 사용해서 교전을 열었다. MVP의 봇 듀오는 위기를 직감하고 진의 궁극기 탄환을 모두 점멸로 피했다. 많은 인원을 투자한 kt는 다이브까지 시도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 망설이지 않았던 점멸 활용

봇 듀오의 빠른 대처로 MVP는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봇 듀오와 제이스는 뒤를 보이는 상대에 스킬을 난사했다. 브랜드의 궁극기가 뭉쳐있는 상대에게 적중됐고 불길이 이리저리 옮겨붙으며 끝내 탐 켄치가 목숨을 잃었다. 브랜드의 화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득이었다. 이 반격으로 MVP는 화염 드래곤도 챙겨갈 수 있었다.

▲ 반격 나선 브랜드 궁극기의 화력


브랜드의 화력은 공세를 취하는 상대편을 계속 귀찮게 했다. 많은 인원을 투자해서 봇을 무너트리려 했던 kt는 교전마다 꼭 한 명씩 데려가는 브랜드 때문에 확실한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 봇에 4인 다이브를 시도했을 때도 럼블이 매복을 통해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23분경 발생한 한타가 가장 문제였다. kt는 라이즈의 궁극기를 활용해서 MVP의 봇 듀오를 노렸다. 위험에 처한 '맥스'는 모든 스킬을 모여있는 상대에 퍼부었다. 불길에 휩싸인 kt의 챔피언들은 죽거나 체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도망쳤다. 기동성이 좋은 카밀은 도망치는 상대를 모두 잡아먹었다. 순식간에 4킬을 먹은 카밀은 엄청난 성장을 했다. 또한, 이 교전을 통해 MVP는 바론까지 획득했다.

브랜드의 방화는 역전에 성공한 다음에도 계속됐다. 바론 버프를 획득한 MVP 봇 타워를 차례대로 파괴했고 억제기까지 부쉈다. 그러나, 체력이 많이 빠진 MVP는 모두 몰살될 위기에 처한다. 자칫하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브랜드는 기지를 발휘했다. 제어 와드가 박힌 부시에 들어간 브랜드는 선제공격할 기회를 얻게 된다. 침착하게 상대가 오길 기다렸다가 뭉쳐있는 상대에게 궁극기와 스킬을 쏟아 넣었다. kt 진영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반대로 몰살당했다.



경기가 끝나고 '맥스'는 이종원 코치와 함께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2세트에서 상대가 탐 켄치를 하리라 예상했고, 브랜드로 많은 연습을 했다고 밝혔다. 승률은 70~80%였다고 한다. 갑자기 꺼내 든 카드로 얻어낸 결과가 아닌, 철저한 준비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경기를 돌이켜 보면 MVP가 유리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경기의 80~90%는 불리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싸웠고 하나의 팀으로 움직였다. 그 중심에는 메인 오더인 안경 선배 '맥스'가 있었다.

이번에 3점 슛을 성공시킨 '맥스'는 다음 경기 또 그다음 경기는 묵묵히 자신의 맡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스타는 아니지만, 겸손하고 예의 바른 그의 말투와 행동에 더욱 많은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맥스'의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또 그와 함께하는 팀 MVP까지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안경 선배가 전국구 스타가 되는 새로운 슬램 덩크가 쓰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