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전제의 SKT T1은 다르다. SKT T1은 최근 몇 년 동안 이 공식을 스스로 입증하며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언제 4연패를 기록했고 부진했냐는 듯이 중요한 무대만 되면 상대를 압도했다. SKT T1에 대한 걱정이 가장 쓸데없다는 말이 다시 한번 들릴 정도로. 그리고 이번 섬머 포스트 시즌을 진행하면서 그 말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페이커' 이상혁의 활약과 더불어.

LoL 역사상 이렇게 최고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선수는 드물다. 어느덧 e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뚜렷하게 그을 정도로 그 활약은 대단했다. 단지, 2013년 대형 신인으로 등장해 미드 마스터 이와 리븐, 제드로 깜짝 스타 반열에 오른 선수가 아니다. 해를 거듭할 수록 위기와 큰 무대에 강한 최고의 선수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최근까지도 그 기세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번 포스트 시즌 활약은 두 번의 MVP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오고 성장을 거듭한 '페이커'. 8월 15일 열린 삼성 갤럭시와 대결에서는 실력으로 자신이 다루는 챔피언의 한계마저 뛰어넘어 버렸다. 밴픽과 상성, 운영 등 모든 것을 한 방에 뒤집어버린 그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 밴하기도, 풀어주기도 애매한... 밴픽으로 가늠할 수 없는 '페이커' 발자취

▲ 상대에게 갈리오 밴을 강요하게 된 경기


아프리카 프릭스와 와일드카드 결정전 1세트, 아프리카 프릭스는 정규 스플릿에서 '페이커'가 2승 3패를 기록했던 갈리오를 풀어줬다. OGN 해설진 역시 승자 인터뷰에서 '아픈 손가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페이커'와 갈리오에 대한 인식은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갈리오 선택에 관해 묻자 '페이커'는 "당시 내 폼이 안 좋아서 다른 챔피언을 했어도 패배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이 패배했어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꺼낼 수 있다"고 답변했다. 만약, '페이커'가 당시 갈리오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갈리오는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페이커'는 깔끔한 플레이를 해냈다. 이는 아프리카 프릭스전 2세트,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바로 삼성 갤럭시는 3세트 연속 밴으로 이어졌다. 포스트 시즌 한 세트의 흔적이 일으킨 스노우볼이었다.

더욱 무서운 건 변수 갈리오를 밴한다고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첫 세트에 등장한 루시안이 경기를 지배해버리자 삼성 갤럭시의 밴픽은 더욱 복잡해졌다. 바로 다음 세트에서 밴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피즈마저 2세트에 등장해 의외의 활약을 이어가자 더이상 밴만으로 '페이커'를 봉쇄할 수 없는 시점까지 와버렸다. 다시 루시안이 풀리는 현상이 나올 정도로 '페이커'는 존재만으로 변수 그 자체였다.



그리고 SKT T1은 '페이커'의 주력 카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카시오페아를 밴했다. 섬머 스플릿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 카드인 만큼 풀 가능성도 있는 픽이었다. kt 롤스터와 섬머 스플릿 2라운드 대결에서는 상대가 먼저 밴하기도 할 정도로 위력적인 카드였으니까.

하지만 SKT T1은 '크라운'의 카시오페아가 갖는 변수를 차단하는데 신경을 썼다. 나아가, 카시오페아를 선점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결과적으로 세트 스코어 3:0. SKT T1은 '페이커'로 상대의 밴픽을 뒤흔들고 정작 자신들은 가장 안정적으로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두 팀 모두 변수를 제거하기 위한 밴을 시도했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페이커'라는 닉네임처럼 이상혁이 걸어온 길은 경기 별로, 세트 별로 상대를 속이며 끊임없이 변수를 창출하고 있었다. '페이커'의 적절한 챔피언 선택과 플레이가 상대에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다가온 것이다. 스프링 스플릿 결승전에서도 그랬듯이, 매 세트 바뀌는 '페이커'의 무기에 아무리 '3강'으로 불리는 강팀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챔피언 '유통기한' 지워버린 '페이커', 한계를 뛰어넘다

▲ 날렵하게 와드를 지우며 운영에 힘주는 '페이커' 루시안


그동안 중요한 무대에서 '페이커'의 챔피언 선택은 빛났다. 분명, 한계가 있는 픽임에도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게 '페이커'였다. 자신감 있게 선 픽할 수 있는 이유를 플레이로 입증해버렸기에 완벽한 선택처럼 보일 정도였다.

1세트 루시안 vs 탈리야. 픽만 봤을 때, 두드러지는 장점은 확실히 탈리야 쪽이 많다. 궁극기인 바위 술사의 벽으로 다른 라인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굳이 로밍을 가서 활약하지 않아도 된다. 라인을 밀고 시야에서 사라지기만 하더라도 합류 속도가 빠른 탈리야의 존재에 압박을 받기 마련이다.

루시안의 장점은 미드 라인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순식 간에 라인을 밀어낼 수 있는 탈리야를 상대로 장점을 못 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페이커'는 주도권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크라운'의 탈리야를 솔로킬을 내고 스노우볼을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삼성 갤럭시의 단단한 운영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시야를 모두 차단해버렸다. 끊임없이 탈리야를 압박해 탈리야의 로밍까지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머지 SKT T1이 자유롭게 시야와 오브젝트, 포탑을 장악해나가면서 일방적인 운영상 이득을 키워나갔다.

루시안의 주도권이 굴린 스노우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포탑을 끼고 있는 적마저 루시안의 화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면이 속출했다. 삼성 갤럭시가 미리 정글러까지 매복해 막아보려고 했지만, 2:2 싸움마저 상대가 되질 않았다. 루시안은 짧은 사거리 때문에 한타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는 챔피언이다. 하지만 상대가 성장할 시간마저 주지 않고 매섭게 몰아친 경기에서 루시안의 단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루시안이 밴되자 나온 카드는 피즈다. 섬머 스플릿에서는 '폰' 허원석이 꺼낸 뒤 한동안 등장하지 못한 챔피언이다. 더욱 강력한 스플릿 푸쉬 챔피언들이 탑에 등장했고, 강력한 CC를 보유한 근거리 서포터와 탱커들까지 등장했기에 피즈가 재롱을 부릴 자리는 없어 보였다. 후반 한타 화력 역시 오리아나-신드라와 같은 AP 챔피언에 비해 부족하기도 했다.

2세트 경기 역시 그런 구도로 경기가 흘러갔다. 삼성 갤럭시가 단단한 운영 능력을 선보이며 SKT T1의 미드-봇 억제기를 수차례 타격하며 유리해졌다. 두 개의 억제기가 파괴된 상황에서 피즈가 스플릿 푸쉬를 할 수도 없었다. 유일한 해답은 피즈와 함께 한타를 승리하는 것. SKT T1이 돌파를 시도했지만, 삼성의 알리스타-자르반 4세-쉔에 막히는 장면이 이어졌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페이커'의 피즈는 해냈다. 프로 단계에서 '입롤'로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막힌 플레이가 나왔다. 구석에서 궁극기가 돌아오기만 기다린 피즈가 다섯 명 사이로 미끼 뿌리기를 던져 삼성 갤럭시 한타의 핵심인 '크라운'의 오리아나에 적중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던져대는 미끼 뿌리기에 오리아나가 맞았고, 귀신 같은 한타 몇 번에 경기가 뒤집어져 버렸다. 피즈가 한타에서 안 좋다는 우려마저 플레이로 뛰어넘은 것이다.

이날 '페이커'의 플레이는 정답만 찾아갔다. 약점과 한계보다 어떻게 장점을 살릴지, 그것을 실현해낼지에 집중한 '페이커'와 SKT T1의 승리 공식이었다. "실수만 안 하면 이길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왜 나왔는지 알만 했다.


■ '과거의 나'를 넘는 프로게이머 '페이커'


2016 롤챔스 스프링 스플릿에서도 SKT T1은 플레이오프 1R부터 치고 올라온 바 있다. 당시 '페이커'의 첫 상대는 와일드 카드 결정전에서 8킬 1어시스트를 기록한 '쿠잔' 이성혁의 라이즈였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미드 라이즈 카드는 '페이커'가 2015 롤드컵에서 활용한 뒤 롤챔스에 자리 잡은 픽이었다. 정규 스플릿에서는 111번으로 가장 많이 밴 됐고, 카운터 카드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라이즈를 상대로 '페이커'는 카시오페아로 뛰어넘었다. 2015 롤드컵 '페이커'를 상징하는 라이즈를 자신의 손으로 꺾은 것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MSI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WE '시예'의 미드 루시안은 어느새 주 무기가 됐다.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는 선수가 '페이커' 이상혁이다. 어쩌면 15일 경기에서도 '페이커'가 넘은 것은 '크라운'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경기는 '폰'과 대결이다. 스프링 결승, 그 이상의 승리로 '페이커'가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