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K를 오랜만에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2019 LCK 스프링 순위표가 쉽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작년 2018 LoL 월드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 진출했던 세 팀 젠지 e스포츠, 아프리카 프릭스, kt 롤스터가 현재 7, 8, 9위로 하위권에 처져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화가 빠른 e스포츠 판이라고 해도, 고작 한 시즌 만에 LCK 서열 구조가 크게 달라진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이적 시즌 동안 선수 구성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경기력에 변화가 생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팀의 색깔과 평균 전력을 고려할 때, kt 롤스터, 젠지 e스포츠, 아프리카 프릭스 세 팀은 현재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순위에 있다.


■ 여전히 '룰러' 엔딩... 7위 젠지 e스포츠(3승 7패 -7)



젠지 e스포츠는 지난 진에어 그린윙스전에서 '로치' 김강희를 미드에 세우며 변화를 시도했지만, 최근 메타에 어울리는 속도감 있는 플레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경기가 지지부진하게 후반으로 흐르면서 전형적인 '룰러' 엔딩이 나왔다.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지만, 경기력은 여전히 졸전에 가까웠다.

느린 속도, 수동적인 운영, 높은 '룰러' 의존도. 지금의 젠지 e스포츠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과거에는 이러한 패턴이 통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대놓고 후반을 바라보는 운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지금의 젠지 e스포츠에게 필요한 건 '느림의 미학'이 아닌 주도적인 플레이다. 하지만, 초중반 주도권의 핵심인 상체 라인의 부진이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가장 큰 악재는 역시 정글러 '피넛' 한왕호의 부진이다. 한왕호는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유리한 게임을 굳히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정글러다. 반대로 게임이 불리하거나 팽팽한 상황에서 의외로 무기력한 편이다. 그러한 단점이 지금의 젠지 e스포츠의 약한 라인전과 맞물려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거듭된 패배로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한왕호의 날카로운 판단력까지 흐려지고 있다. 2월 16일 SKT T1전에서 한왕호는 자크로 드래곤을 스틸하다가 잘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솔로 랭크에서 몇 번이고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프로 간의 경기에서 정글러가 후반에 허무하게 잘리는 건 승패와 직결되는 큰 실수다.

탑과 미드의 상황도 좋지 않다. 젠지 e스포츠는 '큐베' 이성진과 '로치' 김강희가 번갈아 기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교체 출전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롤드컵 우승 멤버인 이성진은 이번 시즌 11번의 세트에 출전해 고작 3승밖에 챙기지 못했다. 상대의 갱킹을 너무 쉽게 허용하는 등 전성기 기량에 한참 못 미치는 경기력이 나오고 있다. '로치' 김강희는 버티는 픽이나 받쳐주는 픽은 곧잘 하지만, 주도적인 플레이나 뛰어난 캐리력을 아직까지 보여준 적은 없다.

미드라이너 '플라이' 송용준은 약점인 기복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SKT T1전에서 1세트에서 리산드라로 맹활약하며 MVP에 선정됐지만, 이어진 2세트 가장 중요한 순간에 '페이커' 이상혁의 르블랑에게 쉽게 솔로킬 각을 허용하며 끊겼고, 곧바로 사이드 라인에서도 허무하게 잘리면서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비록 지난 경기에서 아쉬운 모습이 나왔지만, 송용준은 조이, 리산드라 등 최근 메타에 어울리는 챔피언 숙련도가 뛰어나며 아우렐리온 솔 같은 조커 픽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다. 송용준과 한왕호를 중심으로 젠지 e스포츠가 주도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다면 중위권 도약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기인'이 만든 희망... 8위 아프리카 프릭스 (3승 7패 -9)



아프리카 프릭스는 리그 초반부터 많이 삐걱거렸다. 팀 내부 사정으로 인해 한동안 '에이밍' 김하람이 빠지고, 정글러 출신인 '드레드' 이진혁과 '스피릿' 이다윤이 동시에 출전했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다윤을 서포터로 기용하는 등 다양한 변칙수를 선보였지만,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유칼' 손우현의 경기력이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kt 롤스터에게 2018 LCK 섬머 스플릿 우승컵을 안긴 'LCK 제일검' 손우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미드가 불안해지면서 팀이 전체적으로 흔들렸다. 변수 창출과 이니시에이팅을 담당했던 '투신' 박종익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아프리카 프릭스의 수호신 '기인' 김기인은 아프리카 프릭스의 본연의 강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며 팀을 지탱했다. 김기인은 1라운드 마지막 경기 샌드박스전에서 제이스로 원맨쇼 활약을 펼치며 팀에 귀중한 승리를 안겼다.

김기인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동료들은 3세트에서 폭발적인 경기력을 뿜어내며 샌드박스를 압도했다. 이번 시즌 최고점의 경기력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1승 이상의 의미가 있는 값진 승리였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에이밍' 김하람과 '유칼' 손우현이 자신감을 찾았다는 것이 가장 큰 희소식이었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2라운드부터 10인 로스터를 도입하며 선수 기용의 폭을 넓혔다. 비록 지난 경기에서 한화생명e스포츠에게 패했지만, 새로운 선수들로 경쟁력 있는 경기력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 9위 kt 롤스터 (2승 8패 -9)



kt 롤스터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고된 수순이었다. 지난 겨울, 역대급 이적 시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치열한 영입 경쟁이 펼쳐지는 동안 kt 롤스터는 다소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비디디' 곽보성이라는 대어를 낚는 데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포지션인 원거리딜러 전력 보강에 실패했다.

확실히 작년과 비교해서 바텀의 무게감이 크게 줄었다. 신예 '제니트' 전태권이 주전으로 출전하고 있는데, 경기력이 많이 불안하다. kt 롤스터가 리드하고 있는 순간에도 '제니트'가 허무하게 잘리면서 순식간에 경기가 뒤집어진 경기가 상당히 많았다.

'제니트'는 블라디미르를 비롯한 비원딜 챔피언 숙련도가 매우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지만, 원거리딜러 챔피언을 사용할 때도 비원딜 챔피언을 사용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과감한 포지션을 잡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리그가 벌써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데 보완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kt 롤스터의 문제는 비단 바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엄티' 엄성현이 주전 정글러로서 출전하고 있지만, 그의 약점인 기복이 있는 플레이가 여전히 나오고 있다. 또한, 베테랑 탑솔러 '스맵' 송경호까지 기대에 못 미치는 경기력이 나오면서 kt 롤스터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kt 롤스터의 유일한 호재는 미드라이너 '비디디' 곽보성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이다. 곽보성은 르블랑, 조이, 아우렐리온 솔 등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뛰어난 챔피언 활용이 매우 뛰어난 선수다. 곽보성을 중심으로 kt 롤스터가 주도적인 플레이를 펼칠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LCK는 호흡이 긴 리그다. kt 롤스터가 아프리카 프릭스처럼 승리하는 방법을 떠올리고 본연의 강점을 찾는다면, 반등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