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을 잃은 바오크 부대가 흩어지자 모트롤 군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언덕 위의 진지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레비나님의 지휘 아래 아르카나군과 모험가 길드는 모트롤 진지 앞까지 진격하여 포위망을 형성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레비나님"

"모트롤들이 왜 도망갈 곳 없는 언덕 위에 진지를 마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자 하는 배수의 진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형적으로 낮은 위치의 우리에게 불리한 형세가 될 거에요.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이곳에서 나태의 소울을 탈환해야만 해요."




"저는 늘 모트롤의 불뚝한 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이참에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려서 모트롤들에게 다이어트 좀 시켜주는 건 어떨까요?"

"그건 위험해영, 립튼님. 물론 나태의 소울의 탈환이 중요한 일이긴 한데영, 아르카나들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오염된 혼돈의 소울을 정화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라 더이상 이곳으로 파견 나올 인원도 없구영, 공화국 군대 역시 제국군과의 전쟁으로 지원받을 상황이 아니에영. 만약 시간을 끌다가 모트롤군의 지원 부대가 오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앞뒤로 공격당할 뿐이라구영."

"하지만 지금 아르카나군도 모험가 협회원들도 모두가 지쳐있는 상황이잖아요. 다들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모트롤의 불뚝한 배를 보고 묘한 동질감을 느끼시는 건 아니죠, 퓨엔님?"

"뭐라구영?! 이 싸람이 증말! 아르카나 최고 귀요미로 칭송받는 이 퓨엔에게 무슨 망발인가영!?"



오랜 추격으로 아르카나군이 지쳐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 두 의견 모두 틀린 말이 아니기에 장기전을 주장하는 립튼 대장과 단번에 결판을 내자는 퓨엔님의 의견이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립튼 대장의 뜬금없는 도발 덕분에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다. 음, 이대로 토론이 길어지다간 립튼 대장의 뜻대로 장기전이 돼버리겠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위이이이이잉~! 콰과과과!!]




갑자기 언덕 위에서 괴성이 들리더니 첨탑 하나가 빛을 내뿜었다. 첨탑은 조각조각 갈라져 갔고, 떨어져 나온 파편들은 기이한 힘에 이끌려 첨탑을 맴돌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큰일이에요! 나태의 소울에서 힘을 끌어내는 의식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나는 레비나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설기에 뛰어올라 모트롤 진지를 향해 달렸다. 관문을 지키는 적들이 나를 막기 위해 달려왔지만, 나는 백설기를 믿고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적진을 파고든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언덕 위를 향해 달렸다. 뒤에서는 모트롤 군단이 나를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그 뒤를 다시 아르카나군과 모험가 협회가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뜻하지 않은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아르카나와 모험가 협회 대원들에게 뒤를 맡기고 나는 계속 달려갔다. 언덕 위에 도착해 보니 커다란 뿔이 달린 투구를 쓴 모트롤이 첨탑 앞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쿠흐흐흐... 그래, 네 녀석이 올 줄 알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었다. 가디언"


그 모트롤은 서서히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목소에서는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브리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우리의 계획을 모두 망쳐버린 네 녀석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둬야겠다!"




나는 미리 준비한 해독제 약병을 베르타녹에게 던지고 약효가 발생하길 기다리며 뒤로 물러났다. 해독제를 뒤집어쓴 베르타녹은 잠시 걸음을 멈춰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건 무슨 수작이지? 설마 바오크 녀석들이 만든 강화제를 약화시키려는 건가? 크하하하, 어리석은 것. 내가 그깟 약물 따위에 의존할 것 같으냐!? 모트롤 군단장의 힘을 보여주마!"


베르타녹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거대한 망치를 내리쳤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해독제가 소용없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베르타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나를 저 멀리 튕겨내버렸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나는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커헉!"

"진작에 내가 나서서 네 녀석을 없애버렸어야 하는데 쓸모없는 부하 녀석들을 믿고 있다가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구나. 이제 끝을 내도록 하지. 크흐흐흐."



어느새 내 앞까지 걸어온 베르타녹은 망치를 크게 들어 올렸다. 더는 어쩔 도리가 없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콰르르릉~!]


"크윽, 웬 번개가!"

"일어나, 유피!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야!"



순간 내 몸은 환한 빛에 휩싸이더니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유키 언니?"




청량한 푸른 빛 머리와 눈동자. 그녀는 분명 몇 년 전 홀연히 사라진 유키 언니었다. 언니는 내 앞에 서서 베르타녹을 경계하며 말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저 녀석을 쓰러뜨려야 해."

"크윽, 한 놈이든 두 놈이든 상관없다! 모조리 해치워주마!"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베르타녹이었지만 유키 언니와 합을 맞추며 치고 빠지는 공격을 계속했다. 긴장감이 감돌면서도 유키 언니와 함께 수련하던 옛 기억이 떠올라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져 갔다. 기세등등하게 우리를 상대하던 베르타녹은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쥐새끼 같은 놈들!"

베르타녹이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드는 순간 유키 언니의 창이 베르타녹의 몸을 관통했다. 베르타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아, 하아... 끝난 건가...?"

"아직 아니야. 나태의 소울을 봉인해야 해."

"유키 언니, 그동안..."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건 알지만 모든 걸 마무리 짓고 이야기하자.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아르카나군과 모험가 협회는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

"...알았어."





첨탑의 한가운데에는 나태의 소울이 사악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봉인이 풀린 나태의 소울은 사람 하나 정도의 크기로 도저히 혼자서 운반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나와 유키 언니는 아르카나의 힘을 이용해 나태의 소울을 봉인하여 겨우 가방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백설기에 나태의 소울을 싣는 동안에도 유키 언니를 오랜만에 만난 백설기가 난리법석을 피우는 바람에 복귀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키 언니, 함께 돌아가는 거지? 응?"

"...일단 나태의 소울을 기지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는 게 중요해. 그러려면 백설기는 유피 너 혼자 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좀 지치기도 하고 천천히 뒤따라 갈게."

"언니..."

"어서 가! 레비나님께서 기다리고 있어."



유키 언니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설기를 출발시키려고 백설기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러나 백설기가 어디 흔한 라마들과 똑같이 반응할 리가 없다. 왜 때리냐는 듯 투정을 부려 유키 언니를 당황하게 했다.

잠깐 소란이 있고 나서 결국 나는 언니를 두고 아르카나 진지로 돌아왔다. 복귀하는 동안에도 모트롤 잔당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백설기는 여유롭게 달리며 포위망을 돌파해냈다.




진지로 돌아온 나는 나태의 소울을 레비나님에게 맡기고 모트롤 잔당을 소탕하는 데 합류했다. 싸우면서도 언니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언니 정도의 뛰어난 가디언이 위험한 일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걱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왠지 다시 언니가 멀리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최후의 모트롤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나서 아르카나군과 모험가 협회는 모트롤 진지를 수색하며 전장을 정리했다. 나는 따로 언니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언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또 떠나버린 건가...'


이미 늦어버렸음을 직감한 나는 더이상 언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진지로 돌아와 레비나님을 만났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유피님. 유피님이 없었더라면 나태의 소울을 되찾을 수 없었을 거에요."

"아르카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유키님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해요. 유키님이 비밀로 해주길 바라셨기에 저 역시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유키님은 몇 년 전부터 누군가를 추적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유키님이 유피님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셨어요."



레비나님이 데려온 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라마였다. 그런데 보통의 라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색상의 털을 갖고 있었다. 마치 유키 언니와 같은...




"파란색 라마?"

"네, 저도 이런 라마는 본적이 없어서 많이 놀랐답니다. 유키님은 이런 귀여운 아이를 어디서 찾으신 건지."



아기 라마는 나에게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 보는 데도 왠지 낯설지가 않네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할 일이 있어요. 나태의 소울을 이그네아까지 운반해주셨으면 해요. 아르카나군과 모험가 협회는 나태의 소울을 운반하는 척하며 양동작전을 펼치고 실제 나태의 소울은 유피님께서 가져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립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 방법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요. 수고스럽더라도 부탁해요."

"양동작전이라... 알겠어요. 립튼 그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분인 것 같아요."



아르카나군과 모험과 협회는 다음날 날이 밝으면 출발하기로 했고 나는 달이 저문 어둠을 틈타 비밀리에 이그네아로 출발했다. 밤새 쉬지 않고 달려 해가 뜰 무렵 이그네아가 보이는 해지는 언덕에 도착했다.


"해뜰 무렵의 해지는 언덕이라... 참 아이러니하지 않니?"


백설기는 내 말을 들은 채도 않고 눈을 끔벅거리며 하품을 했다. 브리 마을에서의 레비나님과의 우연한 만남부터 이곳 이그네아까지, 나태의 소울을 되찾기 위한 여정은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됐다.




- 소울을 지키는 아르카나 이야기, E.O.Story 1막 [전설 속의 소울] 끝 -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