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몇 년도였는지 기억조차 잘 안 나는 과거, 난 방학 때면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를 따라 단양에 위치한 큰 사찰에서 며칠을 보내곤 했다. 물론 산을 깎아 만든 절에 놀 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고, 그 산중에서 심심함을 죽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처럼 어머니, 혹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유배당하듯 절로 들어온 또래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었고, 으레 그렇듯 또래 아이들은 그룹을 이루어 놀았다.

방식은 다양했다. 술래잡기, 경찰과 도둑, 숨바꼭질. 단순한 런 앤 체이스(Run And Chase)류의 마당놀이임에도 분명 재밌었다. 해가 어둑할 즈음까지 놀다 보면 머리를 박박 깎은 비구니 스님이 오셔서 얼른 부모님께 돌아가라고 채근을 하셨던 기억이 나니 말이다. 그땐 그게 그렇게 재밌었다.

나이가 좀 들고 나니 시큰둥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임의 참맛을 알아버린 중고딩 시절엔 아이들과 논다는 것도 뭔가 부담됐고, 그보다 같이 놀 아이들도 없었다. 가끔 생각은 났다. 하지만 길어진 책상머리 생활로 비대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뛰어논다는 게 사실 조금 겁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잊었다. 어린날의 추억은 그 때로 남기는 게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합리화하고, 서른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친구들과 뛰어논 기억이 없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이볼브'라는 게임을 알게 된 시점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노는 것'이란 행위 자체가 머릿속에서 저 멀리 날아가버린지 오래.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 자극과 패드의 손맛에 익숙해져있는 지금, 구태의연하게 몸을 움직이는 놀이가 생각이 날리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연결된다. 이볼브를 본격적으로 즐기면서, 머릿속에 가장 많이 생각난 '게임'은 내가 그동안 플레이했던 슈팅 게임도, PVE 레이드 게임도 아닌, '술래잡기'였으니까.



◈ '살벌한 전투'가 아닌 '숨막히는 추격전'이 주는 쫄깃함



부드럽게 일단 체험기로 시작해보자. 처음부터 몬스터로 플레이하기에는 담이 약하기도 하고, 내 실력에 큰 자신이 없어 헌터로 시작했다. 내 첫 직업은 메딕이었는데 사실 생긴 게 이뻐서 골랐다. 과거 팀포트리스2를 할 때 메딕을 가장 오래 해서 익숙하기도 했고. 약간은 낡아보이는 비행선에서 뛰어내려 도착한 행성은 뭔가 누리끼리하고 구질구질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만 게임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닌 듯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하기 바빴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야생동물도 한 번씩 쏴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 긴급한 메시지가 떴다. '몬스터가 2단계로 진화했습니다.'

▲ 구질구질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빛나던 메딕 'Val'

그때야 생각났다. 몬스터는 점점 더 강해진다. 더 강해지면 우리의 승리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겠지. 나만 그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는지, 여행객 마냥 들떠있던 동료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돼지인지 개인지 모를(나중에 알고보니 트랩죠(Trapjaw)라는 생물이더라) '데이지'를 선두에 세운 트래퍼가 달려가고, 줄줄이 기차처럼 동료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추격의 끝에, 꽤 흥분했는지 붉게 달아오른 괴물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몇 번을 줄줄이 깨져가며 플레이하고, 도리어 괴물의 입장에서 서 보니 이 게임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볼브는 완벽한 술래잡기의 재현이었다. 술래가 한 명이고, 나머지가 술래를 잡아야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갈 경우, 처지가 바뀐다. 3단계까지 진화한 괴물은 전장을 순식간에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기 충분했다. 헌터의 입장에서 3단계의 괴물이 던지는 돌덩이와 불의 세례를 피하며 도망갈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분명 뒤에 있는 걸 아는데 뒤를 돌아보고 죽는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 같은 느낌이랄까.

▲ 점점 커지고, 점점 강해진다.

괴물로 플레이할 때도 쫄깃함은 살아있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다가 신호탄이 떨어지면서 '너 잡으러 사람들 왔음'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야 한다. 1단계의 괴물로는 별 타격도 주지 못하고 두들겨 맞다가 한 많은 괴생 마치기 십상이다. 실제로 초보 유저들과 할 때 최단 시간 경기가 3분을 채 못넘긴 적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조여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야 하는데, 의지할 동료라도 있는 헌터의 입장과 다르게 혼자라는 그 고립감이 처절하게 목을 죄어온다. 괴물답지 않게 조용히, 몸을 사리며 도망치면서 강해지는 순간, 복수의 때는 다가온다.

완벽한 술래잡기였다. 술래가 강해지기 전에 잡느냐, 혹은 강해져서 술래가 모두를 잡고 다니느냐의 단순한 명제를 다양한 게임 요소로 버무린 게임. 그것이 바로 이볼브였다.

▲ 아기 괴물일때 헌터랑 눈 마주치면 키보드에서 손 놓고 싶어진다.



▲ 시험삼아 찍어본 메딕 플레이 영상



◈ 인간, 그리고 괴물을 엮는 '대등함'이라는 단어



몇 번의 게임 플레이를 통해 이볼브의 콘셉이 전부 파악되자, 게임의 밸런스가 걱정되었다. 싱글 플레이 위주의 게임이 아닌 이상, '밸런스'의 논란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강력한 언쟁의 떡밥으로 작용한다. 괴물이 너무 강력해 스킬 한방에 헌터들이 죄다 쓸려나가거나, 혹은 너무 약해 딱총 찜질에 누워버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초반에 보았던 괴물이 그랬다. 우물쭈물 괴물을 찾아 다가가자 괴물은 이미 3단계를 달성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저히 정면 상대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폭풍 부는 날 널어놓은 빨래마냥 시원하게 쓸려나가고 나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괴물이 더 세네 이거...'라는 생각이 박혔다.

이런 생각은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사라졌다. 괴물이 약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잘 맞는 팀워크를 보여주는 헌터들은 괴물 이상으로 강력했다. 한번은 괴물로 플레이하면서 정말 잘하는 헌터 그룹을 만난 적이 있다. 보이스 채팅이라도 하는지 굉장히 일사불란한 추격을 보여주었는데, 가까스로 생존해 3단계로 진화하고 붙은 첫 전투에서 정말 처절하게 당했다. 기껏 하나를 처리하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대머리 의무병이 쌩쌩하게 부활시키고, 온힘을 다한 한방 공격은 서포터의 쉴드에 막혀버렸다. 결국, 한 자리에서만 10분 가까운 싸움을 한 끝에 져버렸다.

▲ 좋은 실력의 서포트가 있다면 괴물 입장에선 그저 답답할 따름

결국 모든 요소들은 서로 맞물렸다. 괴물과 헌터들이 나름대로의 상성과 스킬 시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점들이 모이고 모여 '이볼브'라는 게임의 변수와 흐름을 만들어냈다. 움직임에 제약이 없지만 느릿한 '크라켄'은 냄새로 수색이 가능한 '매기'에게 쉽게 추적당했고, 덩치가 커서 큰 소음을 내는 '골리앗'은 음향 탐지기를 갖춘 '그리핀'에게 쫓겼다. 분신을 쓰고 은신해 찾기 힘든 '레이스'도 '캐벗'의 방사능 분진에 맞으면 위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결국은 실력과 게임 이해도의 차이였다. 헌터의 클래스 구성도 나름 짜임새 있게 되어있어 한명 한명이 중요하다. 이 말은 곧 트롤링에 취약하고, 구멍 플레이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 괴물 사냥에 성공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PVP를 메인 콘텐츠로 하는 게임에서, 특정 캐릭터. 혹은 특정 적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가치있는 점이었다.

▲ 처음엔 이걸 어떻게 잡나 싶었던 레이스

▲ 불로 지져주면 좋아서 춤을 춘다

아직 모든 콘텐츠가 공개된 것이 아닌, 베타이기에 특별히 신경을 썼을 수도 있고, 훗날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까지 나온 콘텐츠 중에서는 딱히 스트레스를 받을 요소가 없었다. 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뒤에 처져서 따라오던 아군이 어디 잡아먹히기라도 하면 혈압이 치솟는다. 그래도 그 정도는 참아야지...

▲ 추격중에 이렇게 살려달라는 유저가 있으면 살려주기 싫어진다.



◈ '게임의 본질'은 충분하다


▲ 남자는 폭발을 보지 않아

사실 처음부터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조금은 회의적이었다. 'FPS 게임인데 전투보다 도망과 추적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닌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1주일에 한 번 인벤방송국을 통해 방송하는 콘솔게임 전문방송의 소재로 이볼브가 정해졌을 때 출연자들이 했던 이야기도 비슷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FPS의 본연의 모습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이볼브'라는 게임이 '재미있느냐'가 진짜 핵심이다. 숨어있는 상대를 찾고, 추격하는 과정이 지루한 달리기의 연속에 불과하다면 난 이볼브를 저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도망가는 괴물을 추격하는 과정은 '어떻게든 빨리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굉장한 양의 아드레날린을 생산해냈다.

▲ 식사중에 두들겨맞는 케이스. 헌터는 신이 난다.

반대로 헌터로부터 쫓기는 괴물의 입장에 서면 한 걸음 한 걸음이 뒷골을 조인다. 내 흔적이 추적당할까 봐, 내가 남긴 고기를 보고 머리 좋은 헌터가 날 쫓아올까 봐 마음은 긴장으로 가득 차게 되고, 능숙한 트래퍼의 그물망(모바일 아레나)에 갇혀버리면 절망의 신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다.

빈말로라도 이볼브가 FPS의 본연의 모습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볼브의 슈팅은 굉장히 쉬운 데다가, 애초에 표적이 크다 보니 웬만큼 랜덤 슈터가 아닌 이상 못 맞출 수가 없다. 기만전과 은신의 달인인 '레이스'와 같은 괴물이 나오면 모를까. 하지만 '게임'이 갖춰야 될 본질적 요소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바로 '재미'다. 4:1이라는 특이한 컨셉, 그리고 한정된 무대 안에서 발생하는 수도 없이 많은 변수 하나하나가 유저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재밋거리들이다.

▲ 살기 위해 살금살금...



◈ 숙제는 '콘텐츠'의 확보



작년 한 해 나온 FPS 게임들은 사실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초 기대작이었던 '타이탄폴'은 초반의 임팩트만 남긴 채 침몰했다. '콘텐츠'의 부족도 문제였지만, 사실 썩 재밌지가 않았다. '잘 만들었는데 두 번 하자니 좀 힘드네...'와 같은 느낌이랄까? '울펜슈타인: 뉴 오더'는 재미있는데 한번 엔딩을 보고 나니 2회차를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싱글플레이 시나리오밖에 없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콜오브듀티: 어드벤스드 워페어'는 분명 재미있는데 몇 번째인지 모를 비슷한 화면이 식상하게 다가왔고, '파크라이4'는 애초에 FPS인 것 빼면 장르가 좀 다르다.

이볼브는 내 마음속 FPS 가뭄을 말끔히 쓸어내고 촉촉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앞에서 정통 FPS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해두긴 했지만, 어쨌건 액션 슈터인 건 맞으니까. 처음, 몇 판 하고 나면 질릴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한 게임이 새벽을 넘어가고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물론 베타 버전에서 공개된 요소들로 게임의 성패를 좌우할 수는 없다. 이볼브는 아직 덜 다듬어진 게임이고,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패키지 게임 치고는 즐길 요소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콘텐츠의 부족'은 게임의 지속력을 망치는 중대한 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당장 2014년의 초 기대작으로 꼽히던 '타이탄폴'이 왜 유저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는가만 생각해도 쉽게 나온다. 겉모습은 특급 포장지로 감쌌지만, 정작 내용물은 부족했으니까.

▲ 반복되는 플레이에서 올 수 있는 지루함이 가장 큰 적

어쩌면 이볼브를 바라보면서 가장 걱정되는 것도 이런 점이다. 4:1의 PVP 컨셉. 거대 괴물과 4인의 헌터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요소이지만, 이런 '컨셉'에 너무 치우쳐버린 감이 있다. 이 말은 곧 4:1의 싸움 외 다른 모드는 결국 부차적인 요소들로 전락해버릴 것 같다는 이야기다. 내가 느낀 이볼브는 '완성도'는 훌륭하지만, '잠재력'이 높은 게임은 아니었다. 풍부한 재료라기보다는 이미 다 만들어진 음식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물론 이미 만든 음식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하는 것은 가능하다. 잘 만든 순대는 그대로도 맛있지만, 순대볶음이나 순댓국으로 만들어도 맛있으니까. 난 이볼브가 그 순대와 같았으면 좋겠다. 다른 방법으로 맛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하고, 롱런할 수 있는 슈팅 게임으로 남기를 바란다. 물론 패키지 FPS가 롱런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안다. 그 사실을 아는지라 너무 오래는 안 바란다. 그저 3개월. 3개월 정도라도 질리지 않고 재밌게 할 수 있는 타이틀이 되어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

걱정되는 부분도, 아직은 조금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고 있는 그 시간만동안 일, 연애, 기타 개인사 모두 잊고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거니까. '이볼브'는 그런 게임이었다. 과거 아이들과 사찰의 정숙 팻말을 무시하며 개념 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 그때 느꼈던 쫄깃한 감성이 살아나는 게임.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놀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게임. 어쩌면 이볼브는 어릴 적 숱하게 해왔던 '런 앤 체이스'게임의 궁극적인 진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게임 이름이 괜히 이볼브인게 아니었다. 사람이 진화하고, 괴물이 더 빠르게 진화할 때, '놀이'문화도 진화를 거듭해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