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게임을 찾았습니다.

최신작이에요.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따끈한 게임이란 말이죠. 그런데도 플레이를 시작하자마자 가슴 한 켠을 먹먹한 추억으로 채워줍니다. 꼬박꼬박 먹어둔 나이를 증명하듯 딱딱하게 굳은 손, 한 치 앞을 내다보기는 커녕 이미 지나간 일조차 기억을 못하는 제 두뇌 상태도 이 게임으로 낱낱이 알게 되었죠. '그레이 구' 덕분에.

1990년 대 후반부터 2000년 대 초. 그 때는 패키지 게임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온라인 게임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는 있었지만, 태동하는 e스포츠와 함께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날로 상승하는 시기이기도 했죠. 20대 후반, 30대 초 중반 게이머 분들이라면 아실 거예요. 제 2의 스타크래프트를 꿈꾸는 아류작도 엄청 많이 출시된 거.

물론, 괜찮은 게임도 많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는 RTS(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의 이해도를 높이고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그 못지 않은 웰메이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의미죠. 결과도 괜찮았어요. 지금은 폐쇄된 앙상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마찬가지로 EA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웨스트우드의 'C&C(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는 스타크래프트와 다른 방향성과 완성도를 선보이며 국내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레이 구'를 제작한 페트로글리프(Petroglyph)는 구 웨스트우드 직원들이 설립한 게임 개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웨스트우드가 사라질 당시 C&C의 핵심 개발진은 대부분 EA 로스엔젤레스로 이직했기에 정통성을 올곧이 계승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웨스트우드의 정신을 약간이나마 잇는 기업인 것은 맞습니다.

뭐, 그들의 전작 '유니버스 앳 워'는 솔직히 좀 별로였어요. 형편없는 밸런스 덕분에 연신 뒷목을 잡은 경험이 있었지만 뭐랄까,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의 추억을 한 게임만으로 접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열받는 기억은 잠시 접어 두고, 이번 작품에도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죠.

'그레이 구(Grey Goo)'

이 단어는 나노과학의 창시자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가 1986년에 쓴 '창조의 엔진'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작은 인공지능 로봇을 의미하는데요. 녀석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닥치는대로 먹어치운 뒤, 자기 복제를 통해 지구를 점령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레이 구 시나리오'라고 하죠.

게임에 등장하는 '구' 종족은 위 가설과 거의 동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구' 종족의 개성이 사실상 이 게임의 시작과 끝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 구는 이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구'로 시작해보죠.

화면 정 중앙, 거대하고 물컹거리는 슬라임(?)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체 구'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이 게임에서 가장 인상깊은 유닛이죠. 자원 생성과 저장부터 시작해 이동 및 공격까지 만능으로 수행하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 따로 없죠. 외모가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지만, 이녀석이 만드는 유닛들은 더 이상하게 생겼으니까 미리 적응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

게임을 플레이해 본 유저들은 '구'의 쏟아지는 물량을 보고 스타크래프트의 '저그'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중반 이후로 미칠 듯이 몰아치는 러쉬, 웨이브 한 번 정리하니 다음 테크 유닛으로 구성된 뉴웨이브가 탄생하는 매직. 이러한 디펜스 게임스러운 진행은 확실히 저그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여기에 해처리가 직접 자기 몸을 쪼개 유닛을 만들고, 적 유닛을 말 그대로 '흡수'하기까지 한다면, 그게 바로 '구'입니다.

'구'의 본진은 스스로 분열하고 이동합니다. 게다가 자원 위에 올려두기만 하면 알아서 쪽쪽 빨아먹으니, 타 종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성이 뛰어나죠. 유닛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각 '모체 구'에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물량은 중후반으로 들어서며 타 종족 플레이어를 말 그대로 '씹어'먹는데 적합합니다.

그런데 얘기만 듣고 있자니 조작이 참 어려워 보일 겁니다.

물량 컨트롤, 수급 자원을 각 모체 별로 계산한다는 것, 이 모두를 아우르는 멀티테스킹이 필수거든요. 저도 당연히 어렵다고 생각했죠. 임요환 손가락이 일곱 개 쯤 된다 해도 생물학, 물리학의 정점에서 태어난 이 종족을 완벽하게 조작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어요.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걱정한 만큼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타 종족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에 등장했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비교하면 오히려 간단한 편입니다.

이는 '그레이 구'의 독특한 인터페이스 덕분입니다. 각 종족의 특성에 맞게 인터페이스가 조금씩 다르게 구성되었지만, 특히 '구'의 인터페이스는 종족만큼이나 특별한 설계를 자랑합니다. 다른 전략시뮬레이션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랄까요. 플레이어는 Q, W, E, R 키로 대부분의 명령어를 넣을 수 있고, 덕분에 게임 내내 벌어지는 난타전에도 유기적으로 대응이 가능합니다.

▲ 구의 인터페이스는 매우 편리합니다


전략 시뮬레이션은 유저 편의 기능이 꽤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장르입니다. 유닛 예약 생산이라던가 집결지 등은 한 번 플레이어가 지정만 해주면 알아서 척척 해 준단 말이죠. 다만, 그 외 부분에서는 플레이어의 개입이 말 그대로 '필수'였고, 이것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게임 실력이 판가름나곤 했습니다.

'구'의 인터페이스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습니다. 아예 모체 구의 생산 순서대로 단축키를 배치시킨거죠. 플레이어가 지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 인터페이스 구조입니다. 또, 굳이 단축키를 쓰지 않더라도 화면 하단에 일렬로 모체 구를 노출시켜 각 모체의 자원 수급량 및 생산 및 집결지를 빠르게 설정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생소한 메커니즘을 가졌음에도 타 종족 못지 않은 생산력을 뿜어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죠.

'구'의 게임 내 비중이 5할이라면, 나머지 5할은 '베타'와 '인간'이 반 씩 나눠 갖고 있습니다.

뼈대부터 개성적인 디자인은 아니지만, 두 종족도 나름 명확한 콘셉트와 알찬 구성으로 플레이어를 반겨줍니다. 세 종족 중 기술적으로 가장 발달한 '인간'은 말 그대로 우주를 초월하는 방어력을 과시하며, '베타'는 뛰어난 공수 밸런스를 갖춘 종족으로 그려지고 있죠.

특히, '베타'는 구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괜찮은 확장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유닛 시야가 확보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건물을 지을수 있어 자원 확보에 이점이 많은데다가 백병전과 동시에 슬금슬금 방벽을 쌓는 전술도 가능합니다. 적극적인 플레이어라면 구간마다 '관문'을 만들어 맵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지요. 상대가 관우 쯤 되지 않고서야 이를 돌파하는 게 간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은 구나 베타에 비하면 굉장히 무거운 종족입니다. 본진의 위치가 정해져 있고, 도관을 연결해야만 각 건물이 제 기능을 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을 선택했다면, 초반이든 중후반이든 상대의 풍족한 자원 수급을 연신 부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각 유닛의 화력이 뛰어난 편이며, 특히 방어 건물의 성능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한 번 자리를 잡은 '인간'은 철옹성이란 표현이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레이 구'의 기본 캠페인은 이러한 '인간'과 '베타'가 손을 잡고 어떠한 목적을 지닌 '구'를 무찌르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물량이 쏟아지는 종족을 적으로 두고, 소수 정예 종족을 정의의 편으로 뒀죠. 어떻게 보면 좀 진부하긴 하지만 '스타쉽 트루퍼스'부터 이어져온 구도이니 만큼, 대중성 면에서 검증이 끝났다고 봐도 되겠지요.

▲ 유동적인 플레이가 특징인 '베타'

▲ 인간의 방어력은 우주 제이이이이일!!!


세세한 면을 놓고 보면 제법 다른 맛이 나지만, '그레이 구'를 쭉 즐기면서 드는 생각은 추억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도트 감성이니, 8비트 사운드니 해서 게임업계에도 복고 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 게임은 수준급의 그래픽과 사운드를 가졌음에도 고전적인 분위기를 표현했다는 것이 주목할 부분이지요.

종족 별로 완전히 구분된 테크트리 디자인, 그리고 극초반 정찰을 통해 상대 빌드를 확인한 후 판짜기를 한다는 점은 '스타크래프트'에서도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유닛들 대부분이 느리다는 점, 그리고 상성도 명확하지 않기에 탄성을 자아내는 마이크로 컨트롤이 나오는 것도, 또 그렇게까지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극초반 심리전을 즐기는 유저들에게는 충분히 가산점을 받을 만한 요소로 보여집니다.

자원 채취 및 관리에 대한 밸런스는 'C&C'의 그것입니다. 언뜻 보면 자원 종류가 적은 만큼 관리가 쉬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막상 게임을 플레이하면 이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조금 과장을 보태면 게임의 극초반, 플레이어가 싸워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 상태라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짓게 되는 '정제소'는 자원을 모으기 위해 꼭 필요한 건물입니다. 건설 속도도 매우 빠른데 반해 매우 비싼 가격을 자랑합니다. 초반 정찰을 거의 대놓고 허용할 수 밖에 없는 '그레이 구'에서 정제소를 짓는 타이밍이 갖는 중요성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입니다.

일꾼을 못살게 구는게 곧 승리로 직결된다는 공식은 대다수의 전략 시뮬레이션에서 바이블로 통했고, 이는 '스타크래프트'나 'C&C'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레이 구'의 '베타'와 '인간'은 정제소를 짓는 순간 별첨스프처럼 일꾼이 딸려나오는데다, 굳이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일합니다. 이는 '스타크래프트'보다는 'C&C'에 가까운 구조라 볼 수 있겠죠.



'그레이 구'는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작품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왔고, 특히 과거에 자신들이 만들었던 'C&C'의 여러 부분을 차용한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플레이하며 가장 많이 떠오른 게임은 다름아닌 '토탈 애니힐레이션'이었어요.

한 발짝 접근해서 보면 위 게임들이 연상되지만, 게임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분위기 등은 '토탈 애니힐레이션'의 그것입니다. 초정밀 마이크로 컨트롤로 완성되는 '전술'보다는 게임 전체의 판도를 읽는 '전략'이 우선시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유닛이 원거리 공격형이라는 점 또한 일치합니다.

사실 이것은 조작감과도 일부 연결되는 부분인데요. '그레이 구'의 유닛 움직임이 부드럽기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처럼 빠릿빠릿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유닛들의 다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주는데다 눈에 띄는 극적인 상성도 없죠. 그러다보니 최종 유닛을 제외한 소규모 병력으로는 게임 내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기 어렵습니다.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부터 종족을 막론하고 쌓이는 물량, '베타'와 '인간'만 놓고 보면, 유닛 체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역시 '토탈 애니힐레이션'에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만 없었다면 '토탈 애니힐레이션'의 계승작이자, '슈프림 커맨더'의 형제격 되는 게임이라 불러도 위화감이 없어 보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요. 지금까지 언급했던 여러 요소들은 '구'의 존재로 인해 게임의 아이덴티티로 승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인간'과 '베타'만 있었다면 말 그대로 추억팔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임이었을 겁니다. 그럼 제가 리뷰 안 썼죠. 하지만 '구'는 수면에 물결을 일으키는 물고기가 됐고, 덕분에 호수는 한 층 높은 생동감을 연출했습니다. 게임에 의외성을 더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 제일 닮은 건 이녀석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종합해보면 '그레이 구'는 추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멋진 작품입니다. 헌데 누구에게나 추천하고픈, '스타', '워크', 'C&C', '에이지' 팬이라면 웃돈 주고서라도 꼭 해봐야 한다는 그런 게임은 아닙니다. 단점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쉽게도 '그레이 구'의 단점은 생각보다 큰 편입니다. 이걸 왜 지금 말하냐고요. 기사 앞부분만 읽는 분들이라면 좋은 이미지만 가져갈 수 있도록 나름 고심 끝에 배치한 겁니다.

우선 앞부분에서도 살짝 언급했듯 유닛 간 특징이 매우 적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종족 별 유닛 디자인은 뚜렷한게 사실입니다만, 공격 방식이나 상성에서 나오는 역할은 세 종족 모두 거의 똑같습니다. 각 종족별로 보유한 최종 유닛은 개성이 강한 편입니다만, 저는 그 개성을 일반 유닛들에게서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다면, 업그레이드를 통해 같은 유닛이라도 전혀 다르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만... 업그레이드 종류도 극소수의 유닛을 제외하고는 세 종족 다 비슷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레이 구'에 등장하는 유닛 종류가 기존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과 비교해 굉장히 적은 편이라는 거죠. 특색도 약한데 유닛 종류까지 적다면 활용되는 전략이 단순해져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게임에 개성을 입혀주는 '구'조차 같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특히 아쉽습니다.

게임을 익히면서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싱글플레이 캠페인도 특별한 매력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일단 적을 '섬멸'하면 대부분 미션을 클리어 가능하죠. 메인 미션만 풀게 되면 이것저것 시도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만, 부가적인 임무로 섬멸을 강제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가 임무가 다양한 플레이를 즐기는 유저들에게 보상을 주는 형태였으면 어땠을까요.


▲ 최종 유닛의 개성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전략 시뮬레이션으로써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졌기에 높은 점수를 주지는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그레이 구'를 무척 아끼고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게임시장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장르.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멋있게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입니다. 저는 사실 '스타크래프트'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e스포츠 경기는 꼬박꼬박 챙겨봤고 그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AOS나 FPS 장르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레이 구'는 차세대 RTS가 되기에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한국 PC 게임 시장의 왕좌에 올라 있었던 전설적인 게임들을 추억하며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게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게임'이 현재 '그레이 구'를 대변하는 말이 아닐까요.

▲ '그레이 구' - 베타, 구 종족 플레이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