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획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은 무엇일까? 실제 기획자로서 활약할 때 어떠한 점을 중시해야 효과적인 업무 진행과 원활한 협업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NDC2015 두 번째 날인 20일, 넥슨코리아 박재석 기획자가 강단에 올랐다. 모델러로 게임업계에 입문한 그는 칼 온라인과 프리스톤테일1, 프리스톤테일2와 트리니티2를 거쳐 현재 '메이플스토리2' 캐릭터와 몬스터 디자인 기획을 맡고 있다.

'내 삽질을 넘어서 가라'. 강연 제목에도 쓰여 있듯 이번 발표는 모델러와 마케터, 기자, 운영자, 기획자까지 경험하면서 그가 느꼈던 '신입기획자를 위한 가이드'에 관한 것이었다.

박재석 기획자가 제시한 5가지 논의점은 ▲나는 정말 기획형 인간인가?, ▲하고 싶은 일 vs 해야 하는 일, ▲아나바다식 개발, ▲천상천하 유아낫어론, ▲안되면 되게 하라 이다.

▲ 넥슨코리아 박재석 기획자



1. 나는 정말 기획형 인간인가?


게임업계로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야 할 점으로 그는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를 꼽았다. 어떤 이유로 게임을 좋아하는지, 게임 제작에 관심이 있는지 기획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게임 취재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게임업계를 크게 개발과 운영, 사업, 언론 등 총 4가지로 나누었다. 분야마다 창조와 소통, 육성, 전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분야별로 역할이 다르므로 자신의 적성과 어떤 파트가 맞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신중하게 선택할 때 비로소 업무에 대한 보람과 만족도가 증가하며, 개인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무작정 '게임이 좋아서' 게임업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쉽게 퇴사를 결정하며 오래 머무르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게임업계를 선택하기에 앞서 어떤 직군이 본인에게 맞는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2. 하고 싶은 일 vs 해야 하는 일


셧다운제와 4대 중독, 언론사에서 게임중독 실험을 위해 PC방 전원을 내려버린 해프닝 등 우리 사회에는 게임과 관련해 부정적인 이슈가 많다.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게임은 문화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나 언론계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는 동안 "게임 좀 해라" 라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박재석 기획자는 "없다"고 명료하게 답했다.

안팎으로 게임에 대해 나쁘게 바라보면서 "게임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게이머들 마음속에는 공통으로 '반발심'이 생겨났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해보고 싶은 그런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를 오히려 자극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게임회사에서는 게임도 많이 하고 창조적인 업무만 할 것이라고 오해하는데요. 물론 보람된 일이긴 합니다만, 매일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아요. 고된 업무도 상당히 많죠. 게임을 즐기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동료 기획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서 업무를 수행할 때 외에는 전혀 게임을 즐기지 않는 한 기획자가 있다는 것. 이유는 간단했다. '살다보니 게임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라는 것. 당시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게임회사에 다니는 이들은 모두 게임을 좋아할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획자의 답변도 일리는 있었다.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할 때는 반발심으로 하고 싶었고, 게임 밖에 할 수 없는 시절에는 게임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게임보다 즐거운 일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삶에서 게임의 비중이 작아지는 순간 게임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평생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박재석 기획자는 전했다.

지원자들에게 '왜 게임업계에 들어오려고 하느냐?'를 물어보면 뻔하디뻔한 답변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억대 연봉, 대박 신화 창조, 스타트업을 키워서 대기업에 팔아 차익을 남기겠다. 등 거액의 보상을 위해 입사를 희망하는 경우가 다분했다.

"보상만을 바라고 게임업계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겠다고 하는 건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보상을 많이 주는 다른 직종을 알아보는 것이 좋죠. 게임 개발자로서 어려운 일을 견뎌내고 참으면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건 보상이 아니라 게임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박재석 기획자는 어떻게 게임업계에 들어왔을까? 그는 '파이널판타지3'와 '창세기전'이 자신을 게임업계로 인도했다고 말했다. 두 게임을 하면서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여러 번 게임을 하면서 '게임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다는 것.

기획자가 되고 나면 흔히들 '나도 끝내주는 게임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한 번쯤은 한다. 하지만 정작 게임회사에 입사해서 기획자가 되면 말처럼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회사에 들어가는 순간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가 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나를 뽑은 이유는 개개인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즉, 게임 개발이란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맞는 게임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는 실화를 토대로 재구성한 사례를 거론했다.



던파와 같은 2D 횡스크롤 액션 게임에서 신규 콘텐츠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황. 기획팀 내에서 회의가 이루어졌고 기획자 A는 "제가 즐기는 게임에서 날아다니는 부분이 재밌는데 어떨까요?"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횡스크롤 게임에서 날아다니면서 이동하는 시스템을 넣기에는 무리였다.

다음으로, A가 제시한 것은 "탈 것의 도입". 하지만 스테이지 구성 방식으로 게임이 되어 있었기에 활용이 애매했던 것. 답답해진 A는 "부분파괴라도 해서 액션성을 강화하자"고 주장했지만, 타겟팅 게임이 아니었기에 이 역시 적용이 불가능했다.


A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물론 타사 게임의 요소를 여과 없이 프로젝트에 반영하려고 했던 부분도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게임을 개발할 때 본인이 즐겁게 했던 게임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거나 이를 분석해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은 좋다. A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제시한 요소들이 어울리는지에 대한 판단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메이플스토리2'에는 몬스터 몸에 매달려서 공격할 수 있는 보스가 있다. 사실 이 보스 콘셉트 역시 0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갓오브워나 캐슬배니아 등 수 많은 콘솔게임에서 보아왔던 패턴이다. '메이플스토리2'는 다양한 캐릭터 액션이 가능하고 아케이드 성향의 게임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해당 요소를 구현할 수 있었다.



전문 개발 인력으로서 소속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는 필수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프로젝트 성격과 비슷하다면 이행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게임업계 종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박재석 기획자의 조언이다.


3. 아나바다식 개발


지난 1998년 IMF 사태 당시 '아나바다' 운동이 열렸다.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의 줄임말이다.

갑자기 왠 아나바다 타령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금일 강연에서 이 용어가 등장했다. 박재석 기획자는 4번째 발표 주제로 '아나바다식 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정된 시간과 자본 내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나바다식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

게임 개발의 슬픈 전설로 그는 '개발 속도가 소비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라는 점을 짚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 그래서 개발팀은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기획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 중 하나가 신규 요소에 대한 유혹이다. 신규 몬스터와 신규 맵, 신규 기능과 신규 이펙트를 도입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추진하고자 하나, 그 과정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의 등골은 빠질 대로 빠진다.

그래서 중요한 점이 '리소스 재활용'이다. 리소스 재활용은 업계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왜 재활용을 하는 것일까? 일반 몬스터를 예로 들어보면, 하나의 몬스터를 만드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든 몬스터가 단 한 두 시간 용 콘텐츠로 끝나버린다면 들인 코스트에 대비해 상당한 손해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개발비를 절약하는 방법으로 리소스를 재활용한다. 동일한 풍의 몬스터에 색깔을 달리하여 화염 속성과 냉기 속성, 독 속성 등 서로 다른 몬스터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동일한 캐릭터에 무기만 변경하고 공격패턴을 미묘하게 바꾸어 차별성을 줄 수도 있다.

신규 콘텐츠에 대한 열정은 좋다. 그러나 신규 개발에 대한 욕망은 자칫 동료의 업무 부담 증가로 직결되며, 나아가 프로젝트 전체 효율성을 저하할 우려가 있다. 기획자는 기획만 잘한다고 다가 아니다. 기획한 사항이 잘 개발될 수 있는 환경 조성도 기획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아나바다식 개발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4. 천상천하 유아낫어론(天上天下 You are not alone)

앞서 말한 대로 기획만 잘한다고 좋은 기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발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좋은 기획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박재석 기획자는 두 번째 실화바탕 사례를 제시했다.



기획자: 트윈 포니 테일 머리에 귀엽고 가녀린 느낌의 여자 캐릭터 요청드려요.

그래픽 디자이너: 요청하신 여자 캐릭터 디자인 작업 완료요~

기획자: 요청 드린 내용이랑 복장이 좀 다르네요. 수정 부탁드려요~

그래픽 디자이너: 수정 사항 반영해서 업데이트 했습니다.

기획자: 음...생각했던 스타일이랑 다른데 요청서 참고해서 작업 부탁드릴게요.

그래픽 디자이너: 요청서 참고해서 수정했습니다...

기획자: 아무래도 원하는 느낌이 아닌데 요청드린 대로 디자인해주시면 안 돼요?


위 사례에서 어디까지가 중요한 부분이었을까? 그는 '트윈 포니 테일의 귀여운 여자 캐릭터'까지만 챙겨야 했다고 지적했다. 디자이너마다 그림체나 스타일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세부적인 부분은 작업자의 성향을 어느 정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개발에 있어 의도에 맞는 결과물 제작은 중요하다. 의도와 다르게 결과물이 나오면 개발 코스트도 낭비되고,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재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 개발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적당한 선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이브 서비스에서도 배려와 존중의 중요성은 같다. 조작감이나 대미지와 관련해 이용자가 문의한 경우 운영자는 기획자에게 이를 전달한다. 그러나 기획자는 게임을 수정하면 자신의 기획 의도와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주의해야 할 점은 기획의도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획자란 게임의 모습을 설계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기획자가 되려면 동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잘 아울러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5. 안되면 되게 하라


게임 개발에는 원칙과 프로세스가 있다. 통상적으로 배경스토리를 설정하고 등장 지역을 설정한 뒤 외형 디자인을 짜고, 외형에 어울리는 스킬을 디자인한다. 그 뒤에 AI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이러한 프로세스는 변화하기도 한다.

기획만 해도 캐릭터 디자인, 레벨 디자인, 시스템 디자인, 밸런스 디자인, 아이템 디자인, 시나리오 디자인 등 굉장히 다양한 영역이 있다. 좋은 프로세스라는 게 있을 순 있지만, 무조건 이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환경은 없다. 주어진 환경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다. 원칙이나 프로세스에 사로잡혀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탁상공론과 책임 전가로 얼룩지게 된다. 박재석 기획자는 "노력이 배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력 뒤에 후회는 없어요"라며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13년간의 삽질의 교훈을 5가지로 정리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프로젝트에 맞는 게임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 ▲효율적인 개발로 비용과 동료의 업무 부담을 감소해야 하며, ▲동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할 때 프로젝트의 방향이 올곧아진다. 마지막으로 ▲환경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멋진 기획자가 될 수 있다.

"게임 개발은 꿈과 비슷해요. 그 속에서 기획자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죠. 이번 NDC 키워드가 '패스파인더(Pathfinder)'인데요. 기획자에게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여러분 모두 캡틴이 되기보다는 인도자가 되어, 좋은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