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인터내셔널5(The International5, 이하 TI5) 그룹 스테이지가 끝나고 3일 간의 휴식기가 주어졌다. 물론 휴식기라고 해서 나도 그렇고 선수들도 그렇고 마음껏 쉴 수는 없다. 선수들은 다가올 본선 플레이오프를 위한 연습을 해야하고, 나 역시 시애틀에 온 만큼 일은 해야하니까.

연습을 하던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러 나오면 잠시나마 인터뷰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침부터 다시 웨스틴 시애틀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키 아레나 공원으로 들어서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덕분인지 아침부터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바로 비밀 상점 입구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치 중이던 조형물을 다 세우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구 한편에 써진 문구를 보니 사전 주문을 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먼저 오픈하는 것 같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사전 주문 고객들에게는 정오, 선수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는 2시부터 오픈을 한다고 한다. 이로써 예정에도 없는 스케줄이 하나 더 추가됐다.

아직 비밀 상점이 오픈하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다시 웨스틴 호텔로 이동했다. 프레스 룸이 있던 4층으로 가보니 그룹 스테이지가 끝났기 때문인지 원래 쓰던 프레스 룸은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연회장처럼 생긴 방은 여전히 개방 중이었다.

▲ 아침부터 제게 이런 은혜를 주시면 참 감사합니다.

그룹 스테이지 내내 기자들이 쓰던 방은 치어리더, 혹은 대학 무용과 학생들처럼 보이는 수많은 여성들이 대신 쓰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확히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기자들이 모여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몇몇 선수들이 이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C9의 차례가 막 끝나고 MVP 핫식스의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MVP 핫식스 내에선 영어를 잘하는 '힌' 이승곤이 해외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다른 선수들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다지 바빠 보이진 않기에 나 역시 'MP' 표노아를 불러 짧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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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 핫식스의 순서가 끝나고 선수들이 다시 연습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VG와 나비, LGD의 선수들이 입장했다. 제일 바빴던 사람은 물론 나비의 '덴디'였다. 도타2 최고의 유명인사인 덕분인지 '덴디'는 자리에 오자마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인터뷰를 해야 했다. VG와 LGD는 중국 언론들과의 인터뷰가 대부분이었다.

몇몇 선수만 죽어라 고생하는 사이 다른 팀원들 중 일부는 느긋하게 밸브가 차려둔 호화로운 아침 식사를 접시에 담아 식사를 하거나 디저트로 제공된 초콜릿 크림이 올라간 초코 머핀을 먹기도 했다. 나 역시 '덴디'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으나, 다른 지역에서 온 기자들이 카메라맨까지 동원해 물량 공세를 펼치느라 접촉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빠져나온 '덴디'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 봤지만 이미 6번이나 인터뷰를 한 탓에 너무 힘들다며 내일이나 플레이오프 단계에서 인터뷰를 하면 안되겠냐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나도 접시에 음식을 한가득 담아 아침 식사를 했다. 밥을 먹는 동안 LGD에선 'xiao8'이 중국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생각 외로 VG는 한가해 보였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iceiceice'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iceiceice'는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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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 팀들을 기다렸지만 나비의 인터뷰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인지 다른 팀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에 '자이'가 나타나서 '드디어 팀 시크릿이 오나보다'하고 잔뜩 기대를 하며 누구에게 인터뷰 시도를 할까 고민했지만, 알고보니 '자이'는 그냥 혼자서 먹을 것을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카메라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핸드폰을 두고 온 탓에 점심 시간을 이용해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어느덧 시간을 보니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숙소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다시 키 아레나 공원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에서는 이곳 기온이 28도라고 나와있었지만, 잘못된 게 분명했다. 도저히 28도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다.

키 아레나 바로 옆의 커다란 구덩이(?)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쏟아지며 아이들에게 물놀이 장소를 제공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기 바빴다. 이따금씩 세차게 물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꼭 워터파크에 온 것 같았다.

▲ 나, 나도 물놀이 할 거야...!

선수, 관계자들에게는 오후 2시에 개방할 거라던 비밀 상점은 가차없는 '밸브 타임'이 적용되어 오후 3시로 지연되고 말았다. 내가 아이들의 물놀이를 구경하면서 내리쬐는 햇살에 조금씩 타들어가는 사이 하나 둘 선수들과 관계자가 도착했다.

생각보다 줄이 점점 길어지길래 나도 부랴부랴 대열에 합류했다. 내 근처에는 TI5 그룹 스테이지 메인 중계를 맡은 '초브라' 조한규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초브라'를 미국 시애틀까지 와서 보게 되다니 정말 희한한 기분이었다.

우연히도 MVP 피닉스와 MVP 핫식스 선수들까지 내 옆자리에 있었다. 몇 발자국 앞에는 C9의 '이터널엔비'가 있었고 뒤에는 VP의 선수들이 비밀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 TI5 그룹 스테이지 메인 중계진 '초브라'와

▲ VG의 'iceiceice'

▲ '제락스'와 '이터널엔비'까지! 오늘도 '이터널엔비'의 셔츠에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비밀 상점이 열렸지만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많아서 입장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대기열 뒤편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몇몇 선수들의 이야기가 동영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EG의 '수메일', LGD의 'xiao8' 등... 개중에는 '힌' 이승곤의 동영상도 섞여 있었다. 이승곤이 'iceiceice'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그의 동영상이 흘러나왔고, 이를 본 'iceiceice'를 필두로 MVP 팀원들, 주변 관계자들이 함께 '오~~'하며 이승곤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승곤은 창피함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렸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진 '큐오' 김선엽은 이승곤의 흰 머리를 뽑아주겠다며 선뜻 나섰다. 흰 머리를 뽑을 때마다 이승곤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고, 김선엽의 얼굴은 그만큼 즐거워 보였다. 자기는 이승곤을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다면서 '아파서 짜증나는데 흰 머리 뽑아주니까 고마워서 때릴 수도 없지 않느냐'며 이승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 그러기를 십여 차례 반복하자 이승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폭력적으로 변했다.


▲ '큐오'가 흰 머리를 뽑겠다고 스스로 나선 데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듯...

비밀 상점에서 파는 물건의 카탈로그를 보고 나서 나는 내가 살 물건들을 몇 개 정해 주문서를 적었다. 내 주문서를 받은 스태프는 물건 수량을 입력하고 내게 영수증을 건네줬다. 영수증에 적힌 가격을 본 나는 기겁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간 후에는 당분간 라면과 참치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것 같다.

캐셔 앞으로 가서 영수증을 내밀자 캐셔는 내가 주문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주며 커다란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물건 수령 후 계산이 끝나자 캐셔는 내게 뭔가가 담긴 작은 주머니를 몇 개 건넸다. 50달러당 TI '이모티참'이라는 작은 기념품 3개가 담긴 팩을 하나 주는데, 여기 첨부된 스티커 6종류를 모으면 특별한 선물을 준다는 것이었다.

출구 근처에서 이 이모티참 스티커를 상품으로 교환하는 테이블은 서로에게 불필요한 스티커를 필요한 스티커로 교환하는 트레이드 마켓이 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Someone need windranger?', 'I need timber' 등등 스티커를 교환하자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6종류의 스티커 중 5종류를 채웠으나 바람순찰자 스티커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한 줄이 모자랐다. 남들과 교환을 하고 싶어도 교환할 스티커도 없는 상황. 시무룩해진 내가 슬픈 얼굴로 스티커들을 바라보고 있자 한 외국인이 다가와서 내 스티커 목록을 보더니 바람순찰자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필요는 하지만 교환할 다른 스티커가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필요한 거 아냐?'라고 하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여분의 바람순찰자 스티커를 그냥 내게 줬다.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하자 그는 씩 웃으며 자기 짐을 챙기고 떠났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 외국인 관계자의 은혜가 어린 바람순찰자 이모티참 세트.

▲ 그리고 그 은혜 덕분에 얻은 수정의 여인 이모티참.


비정상적으로 큰 가방에 내 물건들을 담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 가방은 나중에 장바구니로라도 재활용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사이즈가 커도 너무 크다. 아마 이 가방은 그저 내가 비밀 상점에 다녀왔다는 기념품 정도로 남지 않을까?

의류가 담긴 비닐을 제거하면 나중에 관리하기가 힘든 탓에 의류는 개봉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내가 구매한 의류 중 절반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기에... 일단은 외계 침략자, 맹독사, 혈귀 피규어와 목담과 목걸이부터 먼저 개봉을 하기로 했다.


목담과 목걸이는 바로 내 목에 걸고 피규어를 하나하나 개봉했다. 아니, 사실 피규어를 개봉한다기 보다는 그 안에 든 아이템 코드가 적힌 카드가 주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순서는 맹독사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일반 카드가 나왔다.

두 번째로는 외계 침략자 피규어를 열어봤다. 이번에도 역시나 일반 카드. 원래부터 황금 아이템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애틀 비밀 상점까지 와서 산 물건인데 황금 카드가 나오기를 내심 바랬었다.

마지막 순서는 바로 혈귀. 모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인 "가라, 혈귀, 너로 정했다!"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혈귀 피규어를 개봉했다.

▲ 색깔이 좀 이상한데?

▲ 우와아아아아앙!

▲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황금을 줍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내 믿음에 보답했는지 혈귀 피규어는 내게 반짝이는 황금 카드를 선물했다. 곧바로 도타2에 접속해 아이템을 개봉하자 루빅과 외계 침략자의 지팡이, 그리고 파도사냥꾼의 황금 잠수모를 얻었다. 아마 당분간 게임 내에서는 파도사냥꾼을 하게 될 것 같다.

기사를 정리하다 또다시 허기를 느끼고 저녁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섰다. 음식점이 많이 몰린 곳은 시애틀 중심가 근처의 피크 플레이스인데, 거기까지 가려면 또 모노레일을 타야 한다. 당장 거기까지 가기엔 배가 너무 고팠기에 숙소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다.

양식집이 아니라 의외로 사케, 감자탕 등 동양 음식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메뉴판에 영어로 'GAMJATANG'이란 글씨와 함께 '감자탕은 돼지고기와 뼈가 들어간 매운 한국식 수프이며...' 로 시작하는 설명도 적혀 있었다.

감자탕이 매우 먹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도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에 일단 보류하고 연어 꼬치를 비롯한 몇몇 음식들을 주문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약 10분 정도 기다리자 서빙 직원이 다가와 기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며 10분 정도 더 걸릴 거라고 말하며 죄송하다고 했다. 음식 시킨지 겨우 10분 밖에 안 됐는데 저러는 모습이 왠지 생소했다.

기다리는 동안 직원이 다시 한 번 미안하다며 떡 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든 디저트를 서비스로 제공했다. 2개 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했다. 약 10분 정도가 지나자 맛있어 보이는 연어구이 꼬치가 먼저 제공됐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방장과 서빙 직원이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음식 제공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면서 음식 값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래 걸렸다고 해 봤자 겨우 20분이었다. 아이스크림까지 서비스로 제공해 준 것도 모자라 음식 값도 받지 않겠다니 이젠 오히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돈을 내겠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끝까지 돈을 받지 않았다. 결국 본의 아니게 무전취식을 한 뒤 가게 문을 나서면서 시애틀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이 가게에 들러 감자탕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 간의 휴식 기간 중 첫 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앞으로 펼쳐질 본선 플레이오프에선 또 어떤 경기들이 펼쳐지며 나를 즐겁게 해줄지 기대된다.


신동근의 잠 못 이루는 시애틀

1편 - 도타2의 성지 시애틀, 감격의 땅에 그 첫 발을 내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