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할 때는 뭐다? 박사 붐!”
“아, 답 없어요. 벌목기에서 파멸의 예언자라도 나오는 게 아니면!”
“뉘-이가 보인다-”

하스스톤 대회를 보다 보면 위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실제로 하스스톤을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이 이미 하는 사람들에게 “뭐부터 해야 하나?”하고 묻는다면 “일단 낙스라마스 열고 고블린 대 노움 팩 어느 정도 사서 덱 맞춰라. 첫 전설은 박사 붐으로 만들고!”라고 답할 정도로 “낙스라마스의 저주” 모험모드와 “고블린 대 노움” 확장팩은 현재의 메타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어그로 덱에도, 미드 덱에도, 빅 덱에도 인기 많은 박사 붐과 벌목기


물론 이후에 “검은바위 산”, “대 마상시합”, “탐험가 연맹” 등 새로운 모험모드 및 확장팩이 나왔지만 “박사 붐”, “로데브”, “누군가 조종하는 벌목기”, “임프 폭발”, “불안정한 차원문” 등 현재 대회에서 나오는 대체 불가능 카드들은 대부분 첫 모험모드와 확장팩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월 3일 발표된 신규 모드 “정규전”“야생”의 도입으로 봄부터는 이들 2개의 카드 팩이 공식 대회에서는 퇴출될 예정이다. 정복전 규정이 발표되자마자 거의 모든 대회에 적용될 정도로 “공식 룰”에 민감한 하스스톤인 만큼, 공식 대회에서 사용하는 카드 세트가 달라지는 것은 그 여파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확장팩이 나오면 레벨 제한이 풀리면서 기존 아이템이 무가치해지는 것 이상으로, 직접 돈을 내고 구입한 카드팩이 비주류가 된다는 이번 조치는 플레이어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태다.


▲ 블리즈컨 포인트는 오직 정규전에만 지급된다.


그렇다면 이번 정규전과 야생의 도입은 하스스톤에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 금지, 제한, 그걸로 모자라 블록 로테이션 적용한 매직 더 개더링


카드 대전 게임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 MTG)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트레이딩 카드 게임(TCG)의 아버지라는 별명답게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랑받았던 이 게임은, 2만 장을 바라볼 정도로 많은 카드 팩을 발매했고, 발매하고 있으며, 발매할 예정이다.


▲ 카드 대전 게임의 아버지이자 관련 규정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MTG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출시된 카드 중에는 이른바 “OP”(Over Power)라고 불리는 밸런스 붕괴급 카드가 존재했다. 그래서 이런 카드들은 덱에 넣을 수 있는 수를 제한하는 “제한”, 경기에서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금지” 등을 통해 밸런스에 미치는 영향을 조율하곤 했다.

하지만 1994년 적용된 이 금지/제한 규정만으로는 밸런스 조율에 한계가 있었고, 이미 절판된 카드 세트는 신규 플레이어가 구매할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최근 발매된 일부 카드 세트만을 이용하는 스탠다드/모던(Standard/Modern) 방식이 생겨났다. 반면, 기존에 사용하던 카드들은 빈티지/레거시(Vintage/Legacy)라는 형태의 방식으로 약간의 금지/제한을 적용해 플레이할 수 있다.


▲ 사기적인 성능과 희귀성으로 수 만 달러의 가치를 갖던 블랙 로터스
(출처 : MTG 공식 홈페이지 카드 정보)


사용할 수 있는 카드 세트를 일정한 블록으로 묶어 놓은 이 방식을 “블록 로테이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블록 로테이션이 도입됨에 따라 개발자 입장에서는 기존에 득세하던 카드들을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카드를 설계할 수 있는 유연성을 얻었고, 주기적으로 파워 인플레를 조장하던 구 카드가 폐기되면서 메타의 변화의 계기가 되곤 했다. 또, 신규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이미 절판된 카드를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최근에 발매된 카드 세트만 구매하면 스탠다드/모던 방식을 플레이하는 데 문제가 없어, 새로운 대전 상대의 유입을 쉽게 해주는 장점도 존재한다.

다만 주기적으로 새로운 카드 세트를 구입해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하나 새로운 메타를 따라가기 위해 새로운 카드가 필요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금지/제한 목록을 끝없이 늘려가면서 OP를 OP로 막는 “유희왕” 같은 TCG의 악순환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유희왕의 경우 OP를 OP로 막다 보니 텍스트가 문서급으로 길어졌다.
(출처 : 유희왕 공식 홈페이지 카드 정보)


하스스톤에 정규전과 야생이 도입된 것도 결국 이러한 블록 로테이션의 장점을 살리고자 하는 맥락으로 보인다.




■ 정규전의 도입, 그 효과는 과연 얼마나?


일단 이번 봄에 적용될 정규전의 핵심 내용은 “낙스라마스의 저주”“고블린 대 노움”이 퇴출된다는 점이다.

현 메타에서 두 카드 세트에서 활용되고 있는 카드를 살펴보자면, 초반 필드 장악에 최고 존엄이라는 “간식용 좀비”를 시작으로 마법사/사냥꾼의 친구 “미치광이 과학자”, 최고의 4마나 카드인 “누군가 조종하는 벌목기”, 기사회생의 하수인 “낡은 치유로봇”, 든든한 도발 하수인 “썩은위액 누더기골렘”, 그리고 전설 1티어인 “박사 붐”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직업 전용 카드까지 합치면 “땜장이의 뾰족칼 기름”, “병력소집”, “불안정한 차원문”, “임프 폭발”, “죽음의 이빨” 등 그 직업의 덱을 꾸릴 때 빼놓기 힘든 카드들이 대부분이다.


▲ 퇴출 카드 세트에는 퍼텐셜이 높은 카드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규전에서 이들 카드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결국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카드를 활용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기존에 1티어급 카드에 밀려 활용되지 못했던 카드가 재조명받을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으로 7마나 하수인은 박사 붐 하나 때문에 “성기사 에드릭”, “예언자 벨렌”과 같이 동일 비용이나 6마나의 “흑기사”, “안개 소환사” 등 잠재력 있는 하수인이 많음에도 활용되지 못했는데, 이러한 비주류들이 정식 메타로 채용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벌목기에 밀려 사용되지 않던 생명력 4 이하나 공격력 3 미만의 4마나 하수인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기존 미드덱에서 인기였던 “서리바람 설인” 같은 준수한 능력치의 하수인이 다시 채용될 수도 있지만, “고약한 야유꾼” 같은 5/4 도발을 활용한다거나 “마상시합장 의무관”처럼 생명력만 무지막지하게 높은 운영형 하수인의 등장 역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 고블린 폭발법사와 비교되서 그렇지 얘도 4마나 5/4다.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 입장을 놓고 보면, 처음 하스스톤을 시작하기 위해 모험모드 3개를 기본적으로 열고 각 확장팩 세트별로 적어도 30-50팩이나 되는 카드팩을 뜯어야 기본적인 덱을 꾸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본 카드와 오리지널 팩, 그리고 최근 발매된 세트만 선택적으로 구입하면 되기에 부담이 상당히 줄어드는 편이다. 만약 기존에 사용하던 팩이 정규전에서 퇴출당하면 해당 세트의 카드를 전부 가루로 바꾸어 새로운 세트의 필요한 카드를 만들면 된다는 점도 오프라인 TCG에 비해 장점으로 다가오는 점이다.

사실 하스스톤의 카드 세트는 오리지널을 제외하면 5번 밖에 나오지 않아 당장에 큰 체감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하스스톤이 5년 이상 서비스를 계속하게 된다면 일 년에 3번의 카드 세트만 나와도 15개 이상의 카드 세트가 나오는 셈이고 이러한 카드들을 전부 외우는 부담이나 필요한 카드를 얻기 위해 신규 플레이어가 들여야 하는 기본비용을 생각하면 진입 장벽에 대한 부담이 많이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 이미 발매된 확장팩과 모험모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히, 일반적인 모바일 가챠 게임이 짧으면 1개월, 길어도 3개월 정도면 기존 과금 콘텐츠가 사장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중에 가루로 환원할 수 있는 카드를 1~2년가량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비용적으로 크게 부담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기존 메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카드를 더 강하게 출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이처럼 OP를 OP로 막는 폐해는 유희왕이나 기존 모바일 게임에서 충분히 문제가 발견된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경우에도 과금이 강요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국, 정규전의 도입으로 인해 기존에 메타를 정형화하던 카드가 빠지면서 생기는 신선한 게임 양상과 기존 카드를 제압하기 위해 과도하게 강력한 신규 카드의 발매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점, 신규 플레이어 진입 장벽 약화를 통한 인구 유지 등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기존에 산 카드도 아깝고, 예전 카드를 이용한 덱을 이용하겠어!”라는 플레이어라면 야생을 통해 기존 카드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며, 야생 역시 별도의 등급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규전과 야생 중에서 높은 쪽의 보상을 언제라도 받는 것이 가능하다.


▲ 당장은 현 등급전과 큰 차이가 없겠지만... 내년 말 정도만 되어도 정말 야생스러워질 예정





■ "이거 종이 카드 아닌데요?" 밸런싱의 포기로 느껴지는 부분은 아쉬워...


다만, 이러한 정규전의 도입이 긍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패키지 게임의 DLC나 부분 유료화 게임의 업데이트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신규 과금 요소를 강요하는 폐해는 이미 잘 알려진 부분이기에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오프라인 TCG나 가챠형 모바일 게임과 비교하면 “혜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하스스톤이었던 만큼, 지속적으로 신규 카드팩을 구입하게 유도하는 의도가 다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 소비자 관점에서 이성으로는 이해해도 감성으로는 반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블록 로테이션”이 MTG에서 보여준 선순환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로 게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오프라인 TCG와 달리적극적인 에라타(Errata. TCG 등에서 기존 효과를 수정하거나 오류를 정정하는 것)가 가능하다는 온라인 게임만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할만하다.

기존에 “개들을 풀어라”가 제대로 된 밸런스 기준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변화했던 부분이나, 한때는 손님전사의 코어 카드였다가 완전히 망해버린 “전쟁노래 사령관”, 고작 “수수께끼의 도전자”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기존에 폐급 취급받던 비밀과 로데브, 박사 붐이 조합되면서 단번에 노양심 덱을 갖게 된 성기사의 사례를 보면 새로운 카드 세트를 발매할 때마다 기존 카드와의 시너지 요소를 모두 고려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 실제로 장의사, 전쟁노래 사령관 등은 고인 테크를 밟았다.


하지만 기껏 박사 붐을 정규전에서 퇴출시킨 후, 새로운 카드 세트에서 폭탄이 0/1 폭탄을 2개 소환하는 “석사 붐”이나 8/5 스탯의 바뀐 “교수 붐” 같은 카드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 역시 없고, 오리지널 시절부터 “자연의 군대”-“야생의 포효”로 이어지는 과정이 거의 고정적인 드루이드 같은 직업은 얼마나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을 주는 요소다.

무엇보다 바뀌는 체계에서는 “정규전” 이외의 방식은 “공식”으로 취급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MTG의 스탠다드 적용 이후에도 지적된 사항이지만, 밸런스 등이 결국 새로 나오는 카드 세트를 기준으로 하고 대부분의 공식 대회가 스탠다드 기준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기존 발매된 카드 세트는 가치를 떨어트리게 된다.

다만, MTG는 오프라인에서 즐기는 게임이기 때문에 기존 카드를 가지고도 충분히 즐기도록 빈티지나 레거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층이 갈린 것과 달리, 온라인 게임인 하스스톤은 야생이 있다고 해도 정규전으로 사람들이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브루드워가 발매된 이후엔 기존 오리지널만으로도 충분히 배틀넷 이용이나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안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MTG의 스탠다드와 빈티지는 공존하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디지털 상품인 하스스톤은 디아블로의 오리/확팩처럼 공존이 어렵다.


블리즈컨의 월드 챔피언십을 정규전으로 진행하더라도, 소규모로나마 별도로 블리자드가 공인하는 야생 방식 대회를 블리즈컨에 진행한다면 아쉬움은 다소 덜하지 않았을까 한다. 아니, 적어도 변경되는 시스템에서 친구들에게 표기되는 등급이 야생도 포함된다거나, 야생에 별도의 Top 100을 매긴다거나, 정규전에서 폐기되는 카드들에 대한 소소한 보상책만이라도 표현했더라면 “버린 자식 취급한다”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 정규전은 하스스톤의 롱런을 위한 고비가 될 것


어쨌거나 이번 정규전 도입과 관련해서 커다란 변화가 이뤄지는 것은 예정되어 있고, 이와 관련해서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이슈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제를 플레이하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네루비안 알”을 꺼내놓고 “언제나 너의 하수인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한 다음 사제가 싫어하는 4/4 하수인으로 괴롭힐 거야”하는 흑마법사나 “비보병벌로수붐티”로 이어지는 파마 성기사의 콤보 카드가 5장이나 사라진 건 기쁘기도 하지만, 당장에 있는 덱에서 카드 10장 이상 가까이 다른 카드로 바꿔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수많은 미드 레인지덱은 1~5턴을 버텨줄 카드의 부재로 운영에 골머리를 앓아야 할 것이고, 생태계를 위협하는 해로운 노루를 한 턴이나마 막아주던 로데브, 썩은위액 누더기골렘, 낡은 치유로봇의 부재는 현재의 최상위 포식자를 절대 지존으로 만들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 "노루 강ㅎ..." - 이미 자연화 된 기자입니다-
(인벤 게쉬님의 하스스톤 만화 中)


그러나 정규전에 맞춰 기존 카드들의 조정 역시 계획되어 있는 상태고, 메타 역시 대대적인 변화도 준비되고 있다. 최근의 하스스톤 판을 보면 등급전에서 만나는 직업이 뻔하다 싶을 정도로 메타가 고착화되어 있는 편인데, 이제는 벌목기에서 어떤 하수인이 튀어나오고 박사 붐의 폭탄이 뭘 때리느냐의 의외성이 아니라 상대하는 직업과 메타에 대한 의외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연 정규전은 하스스톤이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프라인 TCG와는 달랐다는 한계를 맞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앞으로 하스스톤이 명작이자 e스포츠로 장기간 흥행하기 위해선 오프라인 카드 대전 게임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요구에 좀 더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