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기자는 FPS 플레이어라는 자긍심이 매우 강한 게이머 중 하나다. '둠'이 성행하던 FPS의 여명기부터 게임을 해왔고, '언리얼 토너먼트'와 '퀘이크'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으며,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수많은 '하프라이프' 모드들을 즐기며 밸브의 스팀 서비스 원년을 지켜봤고, '헤일로'와 '기어즈 오브 워' 같은 슈터 장르 때문에 첫 콘솔 게임기를 샀다. 기자에게 슈터 장르, 그중에서도 FPS란 평생을 함께 해 온 게임들이다.

그리고 유독 이런 슈터 장르는 개발자들도, 게이머들도 충성도가 굉장히 높았다. 슈터를 만들던 사람들은 언제나 슈터를 만들었고, 한 번 슈터를 즐긴 사람들은 언제나 슈터 게임을 했다. 수많은 이름들을 댈 수 있을 거다. 존 카멕, 존 로메로, 게이브 뉴웰, 클리프 블레진스키…. 이 모든 이들은 슈터로서 하나씩 혁명을 이뤄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전설 중 하나인 클리프 블레진스키의 신작 '로브레이커즈'는, 당연하게도 기자의 마음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솔직히 2000년대와 2010년대 사이 큰 인기를 끌었던 '콜오브듀티' 같은 '얌전한' FPS들은 이제 지겨웠다. 잠시 TPS를 외도를 떠났던 그가 과거의 정통 스타일 FPS를 다시 만든다니, 그것만으로 기대는 엄청났다.



그리고 마침내 PAX EAST 2016에서 직접 '로브레이커즈'를 플레이해 볼 수 있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5대5 매치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비록 많이 해볼 수는 없었지만, 몇 번의 플레이로 감이 왔다. 아, 이거 물건이다.




4가지 캐릭터, 4가지 스타일



일단, '로브레이커즈'는 우리네 FPS 골수 팬들의 레트로한 감성을 담아낸 게임이지만, 그러면서도 요즘 트렌드를 적절히 반영했다. 그 일면이 바로 클래스로 나뉘어진 캐릭터들이다.

네 가지 클래스가 '로' 진영과 '브레이커' 진영에 하나씩 있고, 같은 클래스라도 진영에 따라 이름이나 모습 일부가 다르긴 하지만 성능은 똑같다. 타이탄, 엔포서, 어쌔신, 뱅가드의 4가지 클래스는 제각각 굉장히 다른 플레이 모습을 보여준다. 무장부터 스킬까지 모든 게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 두 개 정도의 무기를 가지고, 하나씩의 이동스킬과 공격스킬, 하나의 궁극기를 가진다.

타이탄은 전류를 방출하는 일종의 아크 방사기와 로켓 런처를 장비하고 있다. 이동기는 매우 간단하게도 점프해 뛰어드는 리프어택 같은 방식이다. 궁극기는 자신이 직접 강력한 전류를 방출하며 모두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타이탄은 적진에 뛰어들어 마구 휘젓는 역할을 맡는다.



엔포서는 가장 평범한 타입지만, 그만큼 확실하다. 라이플로 정확한 지향사격을 퍼부어 적을 제압하는게 기본이고, 숙련된 군인을 연상케하는 EMP 장치를 구비하고 어깨에 달린 로켓런처를 궁극기로 퍼부어 적을 제압한다. 가장 직관적인 원거리 화력을 가진 캐릭터다.

어쌔신은 두 자루의 전기 칼과 충전식 샷건을 사용하는 아주 화끈한 근접전 캐릭터다. 이동기 역시 와이어를 활용해 이곳저곳 벽에 붙어 스파이더맨처럼 날아다니며, 빠른 대쉬로 적에게 접근한다. 궁극기는 근접 공격의 속도를 매우 높여주고 강력해져, FPS 버전 마스터 이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뱅가드는 개틀링건을 사용하는 점프팩 클래스다. 개틀링건으로 화력을 퍼붓다가도 적을 밀쳐내는 충격로켓으로 낙사를 시킬 수도 있다. 지형을 가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기동성이 최대 강점이다. 궁극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적을 찍어버리고, 주변을 무중력 지대로 만든다.

이 4개의 클래스는 이미 고전 FPS 시절부터 익숙한 무기들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샷건, 로켓런처, 플라즈마 라이플, 미니건... 모두 익숙하고, 또 사랑스런 무기들이 아닌가? 이런 무기의 차이와 스킬셋은 각각의 클래스에게 아주 큰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를 주면서도, 서로 간에 명확한 상성이 있기보다는 얼마나 자신의 클래스를 잘 다루느냐로 승부가 결정되는 느낌을 주었다.


기자는 주로 뱅가드를 플레이했는데, 특히 불나방처럼 나를 베어 넘기려는 어쌔신들을 요격해버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대쉬로 달려들면 충격 탄으로 튕겨내 버리고, 점프팩으로 하늘을 날아 피하면서 천방지축 달려드는 어쌔신을 미니건으로 요격하는 건, 마치 CIWS가 된 느낌이었달까.

클리프 블레진스키는 최종적으로 '로브레이커즈'에 약 5~6종의 캐릭터가 있는 것이 이상적일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런 느낌이다. 괜히 무리해서 새로운, 뭔가 실용성이나 사실성과 좀 거리가 멀어진 무기와 스킬셋을 끼고 있는 이질적인 캐릭터를 양산해내기보다는, 그럴듯하고 멋진 캐릭터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기본은 캡처 더 플래그, 전투는 어디에나 있다


게임의 기본 진행은 이러했다. 배터리라는 오브젝트가 있고, 이 배터리를 각자의 진영으로 가져가 꽂아넣어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다. 몇 분의 시간이 걸려서 배터리를 한 번 충전시키면 팀스코어 1점을 얻고, 그렇게 먼저 2점을 채우는 쪽이 이기는 식이었다.

일종의 캡처 더 플래그 방식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상대 진영에서 배터리를 탈취하려 하거나 상대가 운송 도중 떨어트린 배터리를 차지하려면 배터리를 둘러싼 보호막이 걷힐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클리프 블레진스키는 공개 세션에서 이런 기획은 사람들이 오직 오브젝트만 보고 달리기 경쟁을 하는 식의 플레이가 아니라 서로 치고 박고 싸우게 만들고 싶었기에 추가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말 그대로 전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발생한다.



로켓런처의 직격 데미지는 100 정도지만, 캐릭터 체력은 300이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공격받고선 대처도 하기 전에 증발해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날 수 없었다. 중력을 무시하기 일쑤고, 위아래를 포함해 사방에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자칫하면 눈먼 포탄, 총탄에 맞아 죽기만 하는, 정말 재미없는 전개가 나올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UI는 적을 발견하면 바로바로 그 위치를 화살표로 표시해줬고, 맵 디자인도 격전지가 어디일지 예측하기 쉬운 구조였다. 맵에 흩어져 있는 힐링 스테이션들은 언제나 뜨거운 전장이었고, 모두 날아다니며 상대를 쏘기 바빴다. 실력 격차에 따라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나는 일이 없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아무것도 못한 채 죽는 경우는 없었다.

전방위 전투라는 모토에 맞게 적의 공격은 다양한 패턴이 가능했지만, 그래도 맵이나 무기별 특성에 의해서 상당히 제어가 잘 되었다. 뱅가드라고 해서 공중에서 모든 다른 클래스를 압도해버리는 건 불가능했고, 어쌔신이라고 해서 그런 공중의 적을 처치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스코어는 킬, 데스, 어시스트로 구분되어 기록되었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총합 스코어를 토대로 팀 내 순위를 결정했다. 일례로 기자는 한 세션에서 31킬을 기록하며 8,000점을 맞춰 게임 1위를 차지했는데, 킬도 킬이었지만 적게 죽은 것이 높은 점수에 유효했다.




끝내주는 전투의 맛, 비결은 온 몸이 함께하는 '느낌'


누군가 전투의 재미 자체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이번 PAX EAST 2016 에서 해본 게임 중에서 가장 화끈하고 가장 재미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타격감은 당연히 매우 훌륭했고, 게임에 적용된 여러 전투 관련 컨셉들은 매우 잘 조정되어 있었다.


중력에 반한다는 컨셉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언리얼 토너먼트' 시절 무중력 맵보다 더 심각한 혼돈의 카오스를 떠올렸지만, 그보다 훨씬 온화한 수준의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로브레이커즈'의 슈팅은 중력을 무조건 반하기보다는, 때때로는 그런 중력을 이용하고, 때때로는 거스르면서 하나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자 플레이어 숙련의 척도로서 기능했다.

예를 들어 뱅가드의 궁극기 사용 시 발생하는 무중력의 장은 모든 캐릭터가 그 안에서 공중을 떠다닐 수 있게 하면서도 동시에 모두의 속도를 크게 늦춰버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뱅가드는 가장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다. 덕분에 기동성에서 가장 앞서는 어쌔신도 무용지물이 되고, 짧은 사거리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는 게 치명적인 타이탄도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반중력 컨셉이나 전방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게임에 플레이어가 적응해야 하는 조준속도, 무빙, 슈팅 정확도 같은 숙련 요소가 있듯, 또 하나의 스킬요소로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이는 매우 오래전에는 흔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추억의 요소가 됐다.

전반적으로 요즘의 밀리터리 슈터들은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왼손은 단지 WASD 이동과 점프, 앉기, 많이 가봐야 근접 공격을 분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세로의 Z축을 추가하면서, '로브레이커즈'는 일명 과거의 하이퍼 FPS들 처럼 온몸을 사용해 플레이하는 FPS에 가깝다.




멀티플레이어 FPS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도록


▲ PAX EAST 2016 '로브레이커스' 테스트 첫날 베스트 영상


결과적으로, '로브레이커즈'가 도입한 중력에 반하는 액션 같은 새로운 숙련 요소들은, 또 다른 유저 간의 실력을 가르는 척도가 되었다. 때문에, 섬세한 매치메이킹과 더불어 꼼꼼한 밸런싱이 필수일 것이다. 특히 수많은 멀티플레이어 슈터들이 매치메이킹 시스템의 실패가 곧 게임의 실패로 이어지는 일들을 겪어왔던 만큼, '로브레이커즈'는 그런 선례를 참고해야만 한다.

밸브의 디지털 게이밍 플랫폼 '스팀'을 통해서 서비스될 예정인 '로브레이커즈'는 게임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게임은 확실히 재미있지만, 그럼에도 롱런하지 못하고 고꾸러진 멀티플레이어 게임들이 너무나 많았다. 서비스 측면에서 '로브레이커즈'의 모범 사례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 글로벌 오펜시브' 같은, 디지털 다운로드 기반의 롱런 FPS들이다.

여담으로, PAX EAST 의 '로브레이커즈' 부스에는 항상 긴 시연대 줄이 따라다녔고, 그날그날 게이머들이 만들어낸 하이라이트 장면을 가공해 틀어주었다. 또 시연대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이들을 뽑아 추첨하여 이벤트 매치를 벌이기도 했다. 기자도 후보에 들었었고, 운이 따라주지 않아 이벤트 매치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모두가 굉장히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면서, 벌써부터 캐릭터 간의 특징과 밸런스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클리프 블레진스키는 매번 슈터를 만들어왔지만, 그때마다 그 게임들은 세세하게 달랐다. '재즈 잭래빗'은 특유의 마약 같은 분위기와 플랫포머와의 결합이 좋았고, '언리얼 토너먼트'는 당시 '퀘이크'와 함께 스피디하고 화끈한 하이퍼 FPS 시장을 리드했다. 그리고 '기어즈 오브 워' 시리즈에 와서는 엄폐 기반의 TPS가 막강한 타격감과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는 '로브레이커즈'의 차례다. 클리프 블레진스키는 '로브레이커즈'를 통해 또다시 무언가를 증명하고자 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와도 같은 멀티플레이어 FPS의 난세를 통일할 것인지, 혹은 그들처럼 스러질 것인지는 앞으로에 달렸다. 클리프 블레진스키, 그리고 보스키 프로덕션이 또 다른 추억을 남겨주길 기대한다.

▲ '로브레이커즈' 공식 트레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