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숫제 사람의 마음마저 불쾌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이야말로 샴발리 수도사 젠야타를 즐기던 내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무도 젠야타를 선택하지 않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경쟁전에서 젠야타를 꺼낸 나는 귀히 자란 공격수들 치닥거리를 한 끝에 2연승을 할 수 있었다. 첫 번에 1점, 둘째 번에 또 1점. 강캐 취급은 커녕 존재 여부조차 의심받던 젠야타를 가지고 마침내 2점이 내 손 안에 들어왔을 때는 숫제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본디 2승은 커녕 승리 한 번 쌓지 못했을 기구한 팔자였으나 어느 날을 계기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달이 여러 번 바뀌도록 젠야타가 얼굴조차 내밀지 못한 것은 조화의 구슬이 약해진 까닭이니, 그나마 젠야타를 찾던 트레이서 아낙이나 겐지 도령도 이후 젠야타를 찾는 일이 없었고 나는 그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기계부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본디 젠야타가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좋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젠야타가 밝은 빛의 별처럼 빛나던 시절, 그는 반짝이는 조화의 구슬을 겐지나 트레이서에게 붙여 그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헌신하며 그들의 길을 이끄는 킹 메이커, 그것이 바로 젠야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조화의 구슬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귀소 본능이 생겨버린 조화의 구슬은 잠시만 눈을 떼면 마치 산란기에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듯이 젠야타에게로 돌아와버렸다. 조화의 구슬은 더 이상 승리의 길을 비춰주지 못했다.


조화의 구슬은 잠시만 눈을 떼면 도로 젠야타에게 돌아오곤 했다. 젠야타는 온 정신을 집중해 조화의 구슬을 유지해야만 했고, 필연적으로 적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하물며 젠야타가 시메트라 수준의 체력만 지녔더라면 이 얼마나 기쁘기 그지없었을 것을! 마음을 비우는 데 일생을 바친 젠야타는 그러느라 체력까지 비워버린 것인지 기계의 몸을 지녔음에도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기껏 부조화의 구슬을 던지더라도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부조화의 구슬 또한 도로 젠야타에게 돌아왔으니,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기약없는 아군의 협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그렇다고 아군을 믿지 못해 직접 전선에 나서려고 하면 그것 또한 고난의 행군이다. 위도우메이커의 총에 발가락만 맞아도 죽는 약하디 약한 젠야타로 무엇을 능히 잡겠는가.

승리의 길이 점점 옅어지면서 그곳엔 깜깜한 어둠만이 들어섰고, 젠야타는 거기 갇혀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

경쟁전을 같이 돌리던 동지들이 하나 둘 패배에 지쳐 우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지도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나는 "에이, 망할 것들! 더러운 팀 운은 할 수가 없어. 캐리를 못해서 져, 해도 져, 어쩌란 말이야!"라며 야단을 쳐 보았지만 승리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마음 한편에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있던 나는 수많은 낯선 이와 함께하며 수행을 하고자 마음먹었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다시 한 번 동지들과 경쟁전을 하며 승리에 도취될 것임을 다짐했다.

그러나 조급함은 곧 혼돈과 무질서를 불러오니, 승리를 원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는 더욱더 멀어질 뿐이었다. 수많은 낯선 이들은 나를 무슨 짐짝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불쾌감과 적개심을 드러냈고, 동시에 메르시나 루시우에 대한 그리움만을 표할 뿐이었다. 여전히 푸대접을 받으며 경쟁전을 하던 어느날, 차오르는 언짢음과 서운함을 간신히 억누른 나는 힘겹게나마 억지 웃음을 지으며 겐지에게 조화의 구슬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조화의 구슬은 답지않게 빨라 스스로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7월 20일의 일이었다.

뜻밖의 2승을 손에 쥔 나는 거리로 나서 조화의 구슬을 달고 더 많은 팀원들을 물색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머리숱이 없는 한 남성의 둥근 머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슬근슬근 남성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형씨, 조화의 구슬 받으시랍시요?" 그 남자가 한참은 눈을 흘기며 입술을 꼭 다문 채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기색을 살피며, "형씨, 메르시나 루시우 따위보다 아주 찰떡같이 붙어다 드리겠습니다. 이놈의 구슬이 이제 어찌나 날랜지 속도가 무려 1300이나 되었답니다. 구슬 받으실 건가요?" 하고 그 남자의 몸에 조화의 구슬을 붙였다.

그랬더니 남자는 "왜 이래? 남 귀찮게."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시공의 폭풍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랍시요 하고 물러섰다.


간만에 맛보는 승리란 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더 이상 젠야타는 스치기만 해도 쉬이 죽는 그런 약골이 아니었다. 상당량의 보호막을 방패삼아 지형지물을 곁에 두고 교전을 하면 구급약이 따로 필요가 없으니, 이는 곧 승리의 지름길이라. 게다가 눈동자 속으로 아군을 들여보내면 디바의 필살기가 아닌 한 그 누구도 죽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본디 젠야타가 위험했던 것은 진정으로 초월하기 위해선 그 연약한 몸을 이끌고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서 아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그 이유가 있었으나, 이제는 안전한 곳에서 기회를 살피다가 초월한 채 접근하면 능히 모두를 살릴 속도까지 얻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젠야타 얼굴만 보여도 뱁새 눈을 하고 쳐다보던 자들이 이제는 짐짓 젠야타가 소중한 듯 치켜세우기 바쁘다. 동생을 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추모를 하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이 한조같은 놈들의 역겨움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다스리고 승리의 길을 열어주었다.

외부인과의 수행은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한 듯하다. 나는 오랜 시간 곁을 떠났던 동지들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과거엔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나는 4중으로 강해진 젠야타를 이끌고 다시 한 번 경쟁전, 왕의 길로 향했다.

그러나 경쟁전을 시작하자 나는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마땅히 조화의 구슬을 받아야 할 아군은 온데간데 없었고 주변에서는 무시무시한 정적, 마치 동주불허주(冻住不许走)가 지나간 뒤의 거점과도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다만 이 한겨울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 깨뜨린다기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고 불길하게 하는 화물 바퀴가 느리게 굴러가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나는 이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짐짓 크게 호통을 치며 말했다.


"이놈들, 주야장천 킬만 따면 제일이야. 거점을 따도 화물을 밀지를 못해."
"......"
소리를 쳐도 보람이 없자 나는 짐짓 더 화가 난 척을 하며,

"이놈들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망할 놈들!"
"......"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놈들아, 킬 따는 데 정신이 나갔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정신이 나갔나보이."

그러다가 화면을 가득 채운 패배라는 글자를 알아보자마자
"이 화물! 이 화물! 왜 화물을 밀지 않고 밖으로 기어나가기만 하느냐, 응."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4중 강화를 받았는데 왜 이기질 못하니... 왜 이기질 못하니...!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더니만..." 그 순간, 나의 사고회로는 큰 변화를 맞았다.



그 후, 지원가로서의 젠야타를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양손 가득 부조화의 구슬을 들고 "나는 지원가를 그만두겠다, 겐지!"라며 최전방에서 행패를 부리는 한 옴닉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