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년 연속이다. 한국과 한국이 맞붙는 결승전 대진이 성사된 것이 말이다. 작년 그리고 2년 전 결승 때는 한-한 구도가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그만큼 한국팀과 해외팀 사이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2015년 롤드컵 토너먼트 스테이지에서 한국팀이 해외팀으로부터 거둔 성적은 9승 0패고, 2016년에는 12승 2패였다. 도합 21승 2패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성적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예전 같지 않았다. 한국팀이 토너먼트 스테이지에서 해외팀에게 거둔 성적은 9승 5패다. 어쩌면 한국팀과 해외팀의 결승전 대진이 성사되지 않겠냐고 예측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해외팀이 한국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한국팀은 해외팀을 모두 물리치고 한-한 결승 대진을 이뤄냈다. 분명 SKT T1의 '페이커' 이상혁과 삼성 갤럭시의 정글-봇 듀오가 제 1의 주역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번 대진은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 탑 라이너들도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해냈다. 한국 팀이 공통으로 해외팀보다 강한 곳이 바로 탑이다. 한국은 토너먼트 내내 탑 우위를 통해 이득을 봤다. 또한, 부진을 겪었던 선수들이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몫을 해낸 것도 주요했다.


'큐베' 이성진-'후니' 허승훈의 질 높은 챔피언 폭
주도권과 다양성 만들어, 여기가 탑의 나라다



모든 라인이 강해도, 한국은 탑의 나라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과거 '막눈' 윤하운부터 '마린' 장경환의 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고 뛰어난 탑 라이너가 등장해온 탓이다.

원거리 딜러에 집중된 향로 메타가 한국에 부정적이라는 의견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도 탑이 강해서였다. 하지만, 원거리 딜러 메타라고 해도 LoL이 팀 게임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다른 라이너들의 기량 차이에 따라서도 경기의 양상은 여전히 바뀐다는 이야기다. 이전 메타들 만큼은 아니지만, 탑 라이너가 강한 이점은 한국에 분명히 있었다.

순수 기량도 분명 뛰어나지만, 한국의 탑 라이너들에게 주목할 점은 챔피언 폭이다. '큐베' 이성진과 '후니' 허승훈은 중국의 탑 라이너보다 챔피언 폭이 확연히 넓었다. 챔피언 폭이 넓다는 얘기가 단순히 많은 챔피언을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양 국가의 탑 라이너를 따져보면, 사용한 챔피언의 개수는 한두 개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어떤 챔피언을 '더' 사용하는지가 핵심이다. 마오카이-노틸러스를 사용하는 선수와 마오카이-제이스를 사용하는 선수를 비교하면 챔피언 사용 갯수 자체는 2개로 똑같지만, 챔피언 폭의 질적인 부분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훨씬 앞선다. 마오카이와 노틸러스는 단순해 어느 정도 수준의 선수라면 잘하기 쉽지만, 제이스는 그렇지 않다.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형이다. 또 마오카이와 노틸러스는 역할이 같지만, 제이스는 전혀 다르다.


결국, 탱커를 기반으로 한 지금의 수비적인 탑 메타에서 어떤 챔피언을 더 사용해 선택의 폭을 늘렸는지가 중요한데, 양국이 판이하다. 한국은 공격적이고 주도적인 픽 위주로 선택의 폭을 넓힌 반면, 중국은 메타 그대로 수비적인 픽 위주였다.

중국 선수들은 쉔, 초가스, 마오카이, 럼블을 자주 사용했다. 이 챔피언들 모두 상황에 따라 충분히 공격적이고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픽들이지만, 한국 탑 라이너들이 뽑은 픽은 나르, 제이스, 카밀, 트런들 등이었다. 즉, 거의 모든 경기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여지가 많았다.

이 부분에서는 삼성보다 SKT가 두드러졌다. '후니'는 조별 리그에서 보여줬듯이 초가스와 같이 메타 대표 챔피언도 능숙하지만, 4강 모든 경기에서 상성의 우위가 있는 주도적인 챔피언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스플릿 운영에 힘을 실었는데, 유럽 팀인 미스핏츠를 상대할 때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삼성도 주도적인 픽 위주로 선택의 폭을 늘렸지만, SKT처럼 항상 앞서는 상성을 선택해 스플릿 운영에 나선 것 아니었다. 삼성은 탑 픽의 다양성으로 경기 스타일의 다변화를 시도했다. 한타에 집중하기도, 스플릿에 나서기도 하는 등 '큐베'를 가진 이점을 제대로 이용했다.

▲ '후니'와 '렛미'의 대진

반면에, 중국의 탑 라이너는 늘 수비적인 스타일로 일관했다. 미드-정글이 경기를 흔들고, 원거리 딜러가 캐리하는 형태. 탑은 버티다가 한타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에 치중했다. 팀적인 전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의 탑 라이너들이 상성의 우위를 가져간 경기도 있었는데, 해당 경기에서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은 탑 격차로 밴 카드까지 허무하게 소비해야 했다. RNG는 SKT와 대결할 때 늘 첫 번째 밴 페이즈에서 제이스를 밴했다. 자신들의 진영이 블루건, 레드건 상관없었다. 만약에 제이스 사용에 자신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SKT의 핵심 픽으로 사용된 갈리오를 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에 중국이 한국만큼 뛰어난 탑 라이너를 보유했다면 이번 결승 대진은 어떻게 됐을까. 다른 부분에서도 뛰어난 한국팀들이기에 같은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끔찍한 상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한국 탑 라이너들은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다.




부진했던 '뱅' 배준식-'피넛' 한왕호-'크라운' 이민호
그래도 해줄 때는 해줬다



세 명은 탑 라이너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눈길이 갔다. 지난 2016 롤드컵에서 '크라운' 이민호, '뱅' 배준식, '피넛' 한왕호의 경기력은 뜨거웠지만, 올해는 팀 내에서 가장 차가웠다. SKT와 삼성이 위태로워 보였던 데에 세 선수가 확실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크라운'과 '뱅'의 약점은 라인전이었다. '크라운'은 조별 리그에서 존재감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더니, 8강 롱주 게이밍과의 경기에서는 라인전에서 크게 곤욕을 치렀다. 스크림에서부터 상대 미드에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었는데, 그 모습이 대회에서도 이어졌던 것이다.

절정일 때의 '뱅'은 상성에서 밀려도 최소 반반을 가줬고, 앞선다면 라인전을 박살 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번 롤드컵에서는 오히려 반대였다. 상성에 앞섰을 때 압박을 가하지 못했고, 상성이 밀렸을 때는 예상보다 크게 밀렸다.

'피넛'도 정글러에게는 라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초반 단계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피넛'의 최대 장기인 공격적인 라인 개입이 없었고, 오히려 상대의 먹잇감이 되곤 했다. 초반을 지나 중후반에 도달해도 존재감은 없었다. 아쉬운 모습이 계속되자 '블랭크' 강선구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었다.


만약 부진한 채로 끝났다면 이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언급할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이름값 있는 선수들답게 중요한 순간에는 해줬다.

'뱅'은 4강 4세트에서 앞 점멸로 트위치를 잡아내는 등 한창 좋을 때 보여줬던 플레이를 재현해냈다. 5세트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던 '우지'보다 2배에 가까운 딜량을 뽑아내며 폼을 끌어 올렸다. '피넛'은 4강 5세트에서 반등의 계기를 만들었다. 과감한 2레벨 갱킹으로 이른 시간에 선취점을 만들어 냈고, 몇 번의 다이브로 팀에 주도권을 가져다줬다. 경기를 마무리 지었던 순간도 '피넛'의 손끝에 나왔다.

'크라운'은 조금 다르게 난관을 극복하고 있다. 라인전 약점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다. '크라운'이 토너먼트 단계에서 주로 선택한 챔피언은 탈리야다. 신드라와 라이즈는 선택에서 제외됐다. 탈리야는 라인전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특유의 라인 푸시력으로 쉽게 라인전을 풀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말자하도 애용했는데, 라인전이 강한 챔피언이 절대 아니다. 약한 편에 속하지만, 초반 라인전을 어느 정도 버리더라도 사라진 양피지가 나온 후에는 어렵지 않게 파밍이 가능하다. 또한, 궁극기를 배운 시점부터는 교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지금의 '크라운'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크라운'은 탈리야와 말자하를 적절히 기용해가며 라인전의 단점은 최대한 줄이고, 로밍이나 한타를 통해 팀을 돕고 있다. 어느새 여러 지표에서 상위권에 올라와 있는데, 그중에서도 킬 관여율이 꽤 상승했다. 조별 리그에서는 64.7%으로 최하위권에 불과했던 킬 관여율을 현재 78%까지 끌어올렸다.

프로 선수라고 항상 최상의 기량을 유지할 수는 없다. 세계 최고라 평가 받는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극복이 중요하다. '뱅-피넛-크라운'이 회복세를 보여줬기에, SKT와 삼성이 롤드컵 결승에서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