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동네 친구들이 역전과 신뢰의 붕권 쓰기에 몰두할 때 나는 혼자서 옆에 있는 KOF 시리즈를 즐겼다. 철권이 싫어서 안한 건 아니고, 그냥 이쪽이 좀 더 좋았을 뿐이다. 특히나 KOF98은 엄청 오래 했던 것 같다. 뭔가 한 명 지면 끝나는 게임과 달리 세 명을 할 수 있으니 이득이라는 근거 없는 합리성을 추구했던 거 같다. 무엇보다도 당시 철권이 동네 오락실에서는 2패하면 끝났던 게 컸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SNK에서 출시됐던 대전 격투 게임들을 대체적으로 좋아했다.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조금씩 달라도, 뭔가 감성은 비슷했으니까. 특히나 좋아했던 '아랑전설' 시리즈는 한국 오락실에서는 유독 찾아보기 힘들어서 아쉬웠고. "떡을 내뿜게!"를 들어본 게 처음은 아랑전설이었는데, 이제는 철권이라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SNK의 격투게임과 캐릭터, 세계관을 상당히 좋아한다. '매니아'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KOF XIV를 응원을 많이 했다. 잊혀져가는 시리즈가 계속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게 참 좋았으니까.
그러다가 이 게임 출시 소식을 듣고, 영상과 이미지를 볼 때의 심정이 생각난다. 과거 SNK 걸즈라는 게임을 만들기도 했으니 또 나올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40주년 기념으로 이걸...? 게다가 KOF XIV에서 그래픽과 관련해 그렇게 많은 피드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래픽을 또?
그래도 이 게임을 PAX에서 시연을 해봤을 땐, 출시되면 해보고 판단하자라고 생각했다. 게임 방식이 상당히 캐주얼하게 바뀌었으니까, 정식 출시 때는 뭔가 다르겠지라고 생각했었다. 마침내 9월 6일, 기다리던 게임이 출시됐다. SNK의 40주년 기념작, 'SNK 히로인즈 태그 팀 프렌지'(이하 SNK 히로인즈)다. SNK의 역대 인기 게임에서 활약했던 총 14명의 히로인들이, 섹시&큐트한 모습으로 싸우는 꿈의 2 on 2 격투 액션이라고 한다.
40주년 기념작이라서 기대했는데, 나는 기대를 뒤로하고 눈물을 흘려야했다.
'캐주얼함'을 추구한 초보 친화적 격투 시스템
간단한 입력과 연속기는 장점, 그런데 게이지는...?
기본적으로 SNK 히로인즈의 대전은 '캐주얼'한 방식을 추구한다. 캐릭터는 어태커(Attacker)와 서포터, 둘을 선택해 태그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구조고 기본적으로는 어태커가 전투에 나선다. 서포터는 화면 밖에서 어태커를 응원하거나 획득한 아이템을 상대 어태커에게 집어던져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어태커는 격투게임처럼 운용하면 된다. 버튼은 참 알차게 썼다. 공격 버튼 둘, 필살기 버튼 하나. 잡기 버튼과 태그 버튼, 그리고 피니시 어택 버튼과 가드 버튼이 있다. 기존에 KOF 시리즈에서 전통적으로 채용하던 커맨드는 죄다 버리고, 간단한 방식을 채택했다. "↓↘→ + 버튼"이런 방식으로 필살기를 쓰는 게 아니고, "→ + 버튼" 이런 식으로 필살기를 쓴다. 보통 방향키와 필살기 키인 ○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 필살기에는 '게이지'가 소비되므로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공격 버튼은 연타하면 알아서 이어진다. PS 패드 기준으로 대부분 □-□-△. 여기에 필살기를 섞어주면 기본적인 콤보가 완성된다. 초보자도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연계 자체도 쉽다. 이러한 연속기는 구석이나 중앙에서 쓰는 수준이고, 제법 고난이도의 콤보는 중앙이라던가 특정 위치가 필요한 정도다.
캐주얼함의 극한을 추구한 탓인지, 일반적인 격투게임에서 상중하로 나뉘는 공격 판정도 '하단'이 없다. 그리고 가드 버튼이 따로 있어서 공격을 막으려면 가드 버튼을 눌러야 한다. 버튼의 조작이나 콤보는 상당히 간단하기 때문에, 조이스틱을 굳이 쓰지 않아도 여유롭게 플레이가 가능하다.
대전 도중 상대 캐릭터의 HP를 일정 수치 이하로 깎으면 주변 BGM이 바뀐다. 이때 바로 앞서 말한 '게이지'를 사용해 '드림 피시니'를 맞추면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 대전은 오로지 '드림 피니시'로만 끝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HP가 0이 되어도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는다. 대신 '스턴'에 매우 쉽게 걸려서, 거의 넉다운 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게이지 시스템은 좀 문제가 있다. 필살기를 사용할 때마다 게이지가 사용되는데, 이 게이지가 모자라면 드림 피니시를 쓸 수 없게 된다. 당연히 격투 게임에서는 한 콤보에 대미지를 많이 주게 되는데, 피니시를 위해 게이지를 아껴야 한다. 어태커는 게이지 회복이 느리기에 강제로 서포터를 꺼내서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 경우도 있다. 게이지 절약을 위해 기본 공격만 강요하게 되는, 룰의 이율 배반적인 구조가 되어버린다.
두 번째는 아이템이다. 서포터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이 여러 효과를 일으키는데, 이중 상태 이상(스턴, 속박, 다운)이나 회복도 포함되어 있다. 나름의 재미 요소지만, 막상 겪어보면 전투 외적인 부분에서 방해받았다는 기분이 들게 된다. 마치 격투 게임에서 공정성이 훼손된 듯한 느낌이기에, 사람에 따라서 아주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대전 시스템 자체는 SNK 답지 않게 매우 초보 친화적인 느낌으로 꾸려졌다. 게이지 시스템에서 다소 미흡한 부분이 보이지만 나름 탄탄하게 잘 마련된 대전 시스템이다. 대전의 룰과 시스템은 기존 KOF 시리즈보다는 '대난투 스매시 브라더스'에 더 유사한 느낌. 그래서 초심자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초심자로 여러 캐릭터를 쉽게 접근해볼 수 있는데, 문제는 캐릭터들의 콤보나 연계가 상당히 비슷해 그 주기가 매우 짧은 편이다. 금방 익숙해져서 다른 캐릭터를 해보게 되는데, 여기서 후술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열 네명"의 SNK 여성 캐릭터
이거 KOF XIV 히로인즈 아니에요?
열네 명의 캐릭터는 아주 미묘하다. 단 한 명의 캐릭터만 선택하는 대전 시스템에서는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러나 'SNK 히로인즈'는 어태커와 서포터, 두 명의 캐릭터를 선택하며 태그로 언제든지 둘의 역할이 교체되는 시스템이다. 두 명의 캐릭터를 선택하기 때문에, 14인의 캐릭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KOF XIV의 캐릭터 모델링과 그래픽을 거의 그대로 재활용했다.
캐릭터들마다 콤보나 연계도 비슷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운용법을 익히고 나면 다른 캐릭터를 해보게 되는 시점이 정말 빠르게 온다. 태그 콤보와 조합을 연구하다 보면 좀 더 파고들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새로 만든 캐릭터(테리)가 있다고 해도 14명은 정말 부족하다.
물론 캐릭터의 개성은 뛰어나다. 애초에 KOF 시리즈 자체가 아랑전설, 용호의 권을 흡수했고, 여기서 더 SNK 히로인즈가 참고해서 가져올 만한 인지도를 가진 시리즈는 사무라이 스피리츠 정도다. KOF가 인지도가 제일 높으니, KOF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은 건 이해할 수 있다.
KOF의 여성 격투가들 또한, 나름의 개성과 장단점을 독특하게 갖춘 탄탄한 IP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이'가 타 게임에 콜라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SQ의 '도적 아서'의 참전 예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
KOF 시리즈만 봐도, 참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정말 많다. 윕, 앙헬, 카스미, 오로치 팔걸집 바이스와 매튜어, 그리고 KOF XIV에서 나름 준수한 모델링으로 평가받았던 블루마리와 킹까지. 이런 준수한 캐릭터들이 남아 있는 와중에 콜라보레이션격 캐릭터가 먼저 등장했으니 팬들은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게임에서 KOF XIV에 안 나왔던 캐릭터는 딱 둘이다. 하나는 '셸미', 다른 한 명은 "테리 보가드"다. 결국 그 외의 캐릭터들의 그래픽은 전부 KOF XIV에서 따왔다고 해도 될 정도다. 약 85%를 넘어가는 수치다.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지라도, 최신 출연작은 KOF XIV가 되어버렸다. 결국 "KOF XIV 히로인즈"라고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수준이다. 나름 인지도 있던 사무라이 스피리츠의 시키, 이로하라도 있었다면 '다양한 개성'을 보여줬단 평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또 남는다.
그래도 SNK가 그간 쌓아놓은 캐릭터들의 '개성'만큼은 어디 안 갔으니 안심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한 들, 캐릭터 수가 부족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캐릭터 선택 창을 보면 너무 큰 허전함이 와닿는다.
SNK 40주년 기념작, 누구를 위한 게임인가?
이건... 뭔가 잘못됐다
SNK 히로인즈의 격투 시스템은 나름 잘 다듬어져 있으나, 캐릭터 수가 부족으로 시너지를 내기 힘든 시스템을 채용했다. 기존의 시스템을 버리고 초보 친화적인 시스템을 채용하면서 '대난투 스매시 브라더스'처럼 쉽게 접근하는 게임을 생각했던 것 같다.
나름 내세운 드림 피시니와 아이템은, 대전을 재미있게 만들기보다는 미묘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타격 이펙트도 너무 장난스럽기에, 코믹하다기보다는 이질감이 앞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대전 게임으로서 접근성은 높였을지 몰라도, 깊이는 너무 얕을 수밖에 없다. 캐주얼함을 강조해 전 연령 플레이어들에게 접근하기에는, 여성 캐릭터들의 심한 노출이 걸릴 수밖에 없다. 심의도 전연령가가 아닌 15세 이상 이용가로 판정이 났으니까.
그렇다면 캐릭터성을 강조한 게임으로 본다면 어떨까? D.O.A.가 약간 의도치 않았는데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D.O.A는 훌륭한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개성만점의 캐릭터들은 여러 곳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뛰어난 모델링을 기반으로 다양한 커스터마이징 아이템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놀 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SNK 히로인즈는 캐릭터의 커스텀이 3개다. 상하의로 옷이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트'가 3개라는 점이 너무 큰 단점이다. 나머지 부위는 악세사리를 착용해 꾸밀 수 있는데, 결국 베이스가 되는 복장이 3개라는 점이 너무 뼈아프게 다가온다. 더욱이 3종 중 1종은 KOF에서 본 해당 캐릭터의 전투 의상이다. 클래식 복장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색상 어레인지는 4개가 끝이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어레인지 보이도 들어있다. 그나마 악세사리의 수가 많다는 점이 다행이다. 하지만 베이스가 되는 복장이 세 개뿐이기에, 꾸미고, 스크린샷을 촬영하고 놀기에는 가짓수가 부족하게 된다.
애초에 KOF XIV는 그래픽과 관련된 지적을 매우 많이 받은 타이틀이다. 호불호가 갈릴 그래픽인데도 불구하고 꾸미기 요소와 촬영 요소는 DOA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수려한 일러스트와 훌륭한 BGM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인'을 내세울 그래픽은 호불호가 심히 갈리고, '격투'를 내세울 시스템은 캐주얼을 추구해 깊이가 얕다.
스토리 모드가 있긴 하지만,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비슷한 시놉시스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오프닝과 엔딩에서의 다른 연출을 제외하면 중간 보스가 계속 등장해 설명하고 웃음 짓는 스토리만 있다. KOF의 네스츠 스토리나 오로치 스토리같이 팀마다 나름의 개성이 있고 중간 전개가 다른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란 것 만 못하다는 뜻인데... 이 게임은 그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캐주얼을 추구한 격투 시스템과 게임의 스토리는 너무 가볍고, 꾸미기 요소를 강점으로 삼기에는 가짓수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할 거리가 증발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타겟층부터 시스템까지, 뭔가 근본부터 잘못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냥 평범한 타이틀이었으면, 좀 아쉽네 하고 웃어넘겼을 것 같다. 그런데 'SNK 히로인즈'는 무려 'SNK 40주년 기념작'이다. 공식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트레일러나 홍보 멘트에서 '40주년 기념'이라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이런 기념작은 준비를 단단히 해서 거대한 규모로 출시하거나, 확실한 팬 서비스를 준비하는 게 보통이다. 당연히 팬들도 그런 멋진 작품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SNK 히로인즈'는 팬들을 위한 게임도, 신규 유저들을 위한 게임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KOF, 아랑전설, 용호의 권,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등 SNK의 팬들은 '격투 게임' 유저다. 그들을 끌어들일 깊이 있거나 개성 있는 시스템은 '캐주얼'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캐주얼함을 챙겨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기에는 여성 격투가들의 노출도가 걸린다. 특히나 캐주얼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가족'들이 이 게임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을까?
다시 돌아보면, SNK 히로인즈를 하면서 즐거웠거나 신났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게 너무 안타깝다. 그나마 각 캐릭터들의 엔딩의 후일담을 보면서 좀 피식한 부분이 가장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40주년 기념작'이 이렇게 실망스러운 게임이 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