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딱 봐도 B급 감성이 줄줄 흘러 내 아싸 감성과 잘 맞았다.


내가 어릴 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먼 시절이다. 1990년대 초반이니. 워낙 시골이라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두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게 낙이었던 시절인데 유일하게 하나 다른 곳이 오락실이었다. 널찍한 화면에 전자음과 화려한 그래픽이 눈과 귀를 모두 사로잡던 당시의 인싸 플레이스. 처음에는 좀 더 저렴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내 기억에 제일 많이 남아있는 한 판의 비용은 50원이었다.

그때는 나도 청소년이었으니 그런 나이 대와 똑같이 행동했었다. 시덥잖은 걸로 친구들과 다투고 방귀나 트름같은 원초적인 것들에 웃음이 터지고 뭔가 이상하고 기묘한 것에 끌리고. 오락실에서 모탈 컴뱃이 유독 그랬다. 오락실 스피커와 음질의 한계로 게임 소리가 이상한 한국어처럼 들리는 현상은 흔하지만 모탈 컴뱃은 아예 원래 소리 자체가 괴상했다. 뭔가 이해가 안되지만 최소한 사람의 말로는 느껴지는 기술 명이 아니라 와다~ 끼요옷~ 냐히~ 뭐 이런 괴성들. 그래서 더 웃겼고 꽤나 좋아했다.

조작도 이상했다. 우리가 흔히 장풍과 어류겐으로 부르는, 격투 게임의 필살기 입력 방식을 정착시킨 스트리트 파이터 2가 91년에 나왔다.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이후로 대부분의 격투 게임들은 모두 (↓↘️→) 이런 방식의 입력을 따라갔는데 모탈 컴뱃은 미국에서 건너와서 그런지 독자적인 방식을 추구했다. 일단 방어 버튼이 따로 있었고 밸런스도 개판이었다.

그래픽은 더 이상했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이게도 모션 캡쳐를 통한 실사 풍이었는데 그래서 캐릭터가 현실적이면서도 기괴했다. 파워레인저 보는 것처럼 특촬물같은 느낌이 들면서 오락실 화질의 한계상 도트가 조금씩 깨져보이고 그 와중에 기술과 장면들이 하나같이 기괴해서 뼈와 살이 분리되고 사람 머리가 날아가도 덜 잔인했다. 물론 여전히 잔인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랄까 뭐 그랬다.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페이탈리티. 승리하면 Finish Him! (혹은 Her) 라는 문구와 함께 적이 비틀거리는 상태가 되는데 여기서 그냥 어퍼컷 같은 걸로 쓰러트리고 끝내도 되지만 특별한 커맨드를 입력하면 상대방을 잔혹하게 처형할 수 있는 기술이 나간다. 그냥 뭐, 척추 뽑고 심장 뽑아내고 불태우고 전기로 지지고...그랬다. 덕분에 미국에서는 청문회가 열리고 94년부터 게임 자율 심의 업체가 생겼다.


▲ 피니시 힘! 이 소리 들리면 주변 애들 시선이 죄다 몰렸었다.


모탈컴뱃이 어떤 게임인지 궁금하신 분은 유튜브에서 'mortal kombat fatality'를 검색해 보자. 성인 인증 필수는 당연하고 갑자기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날뛰며 이 삿된 게임을 당장 우리 배달 후손들의 앞에서 치워 버리라는 선비 정신이 발동할 확률이 높다. 취향에 잘 맞는다고? 만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부디 나와 좀 거리를 두어 줬으면 좋겠다. 다른 의미는 없다. 코로나 시국이니까.

사실 모탈 컴뱃 1편은 한국에 출시되기 어려운 게임인데 90년대는 유관 기관이 눈뜨고 장님이던 시절이라 유야무야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을 거쳐 오락실에 등장했다. 페이탈리티로 척추를 뽑아내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어퍼컷으로 사람 머리를 날려대는 게임이 심지어 모션 캡쳐를 활용한 실사 풍의 게임인데 한국 오락실에 나온게 신기하다. 지금은 게임위가 있으니 꾸준히 심의 거부 당하는 중이다.

어릴 때 이상해서 더 좋아했던 게임 모탈 컴뱃이 영화로 나왔다. 예전에도 영화로 나왔었는데 2021년 4월 8일 지난 주에 신작 영화로 개봉했다. 모탈 컴뱃은 출시된 이래 미국에서 격투 게임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프랜차이즈 게임이고 철권이나 스트리트파이터 못지않게 팬도 많다. 2019년에 출시된 11편 게임의 평가가 다소 안 좋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만장 넘게 팔렸다니 철권 못지 않다. 그래서 게임 외에도 굿즈, 애니, 영화 등등 꾸준히 뭔가 계속 나온다. 돈 되는 판에 뭔 들.


▲ 겟 오버 히어~ㄹ



▲ 게임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약간 불친절한 영화가 되서 아쉽다.


호구가 될 필요는 없지만 덕질은 애정으로 시작되고 소비로 완성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냥 추억 소환하는 비용치르는 셈치고 봤다. 다른 건 다 버리고 예고편에 나온 '겟 오버 히어~ㄹ' 하나만 기대하며 불편한 방역 감수하고 영화관에 다녀왔고 후회는 없다.

영화 점수를 굳이 매기자면 10점 만점에 한 6점? 난 괜찮았는데 개인적인 추억 보정 때문에 점수 두 배로 올린 거니까 보실 분은 알아서 판단하자. 게임을 해봤다면 알아챌 곳들이 꽤 많아 반갑지만 게임을 모른다면 초지일관 물음표만 되새기다 싸움 몇 번 보고 끝난다. 시리즈의 팬들은 봐도 후회는 없을테고 영화의 완성도는 우베 볼 형님보다 좀 더 낫다.

그리고 오늘 보니 의자도 나왔다. 시크릿랩 모탈 컴뱃 에디션. 게임은 한국에 출시할 수 없지만 영화와 의자는 나온다니 내 어린 시절 기괴하고 이상했던 모탈 컴뱃 게임과 어찌 그리 또 잘 맞는지. 영화는 봤으니 의자도 구경하는 중인데, 그냥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꽤 멋있다. 촌스러우면서도 그만한 게 또 없는 검빨 감성에 구태의연하게 적당히 멋있는 드래곤 문양. 용 아니다, 드래곤이다. 모탈컴뱃 모르는 사람에게는 뼈대있는 가문의 유교 드래곤이라고 우길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넘쳐나던 질풍가도의 시절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와패니즘이 적절히 뒤섞인 모탈 컴뱃을 좋아했다는 과거가 부끄럽기도 했었는데, 좀 더 지나고 보니 그것조차 다 즐거웠던 추억이다. 새삼 느끼지만 세상 그 어떤 뷰티앱이나 뽀샵질보다 추억 보정이 더 강력하다. 그냥 뭔가라도 나와주면 일단 고맙다. 영화는 12,000원이라 바로 봤는데 의자는 50만원 좀 더 넘는다. 얼마 전에 블리츠웨이 메칸더V만 안샀어도 고민은 안 했을 텐데. 몇 달은 더 통장과 협상이 필요할 것 같다.


▲ 검빨금.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을 깨워줄 것 같은 감성이다.


▲ 게임도 영화도 애매하지만 의자 디자인은 진짜 예쁘게 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