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영의 본명은 임준열.

조선 남로당의 박헌영을 존경하여 필명을 임헌영으로 사용.

이 놈이 웃긴게, 애비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잡혀들어가서 사형당했고,

본인은 혁명자금 마련하겠다고 강도짓까지 하고 다니던 남민전 출신.

임헌영이 여기에서 직접 강도짓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쨋든 남민전 출신이라는 말

국보법 위반으로 아마 6년인가 살다 나왔다.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박원순도 같이 작업.

임헌영이 참 졸렬한게 룰루랄라 작업하다가,

자기 제적등본 뗏는데 알고보니 제적등본 원본에 지 애비가 보국대 출신(무려 7년간 활동)인게 나와있었고 은근슬쩍 발을 빼버림.

보국대가 초기에는 동원이 아니었음.

사실 박원순의 부친이 이데올로그형 친일임을 확인하긴 어렵겠다만, 민문연에서 테크노크라트형들까지 전부 친일파로 만들고 있는데

그렇다고 지 애비만 아니라고 할 수 있었겠나?? 그러니 그냥 아닥 후 발을 스윽 빼버렸지.

 

저 단체에서 방응모,김성수,백선엽,박정희 등등 우파의 근간-뿌리가 되는 인물들을 전부 친일파로 낙인 찍어버림.

근데 웃긴건 박정희-백선엽을 비롯해서 만군-일본군 출신 간부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데,

박정희-백선엽을 비롯한 몇몇 정도만 친일파 낙인.

 

즉, 박정희 죽이기라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만든 책이라는 것을 책 스스로 인증한 꼴.

같은 논리라면 일본군 소위였던 故김수환 추기경도 저 명단에 포함되어야 함이 맞음.

 

 

 

 

 

일본군 소위였던 김수환 추기경.

故김수환 추기경을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음. 다만 형평성의 문제.

 

 

 

 

김희선은 지 애비가 친일파인거 아는지 모르는지, 지 애비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며 구라를 치고 친일청산 운동 하고 다니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지 애비가 친일파 출신이거 드러나서 씹버로우 탔었고, 신기남 애비는 일제 헌병 오장 출신임.

 

일제 헌병이라고 하면, 그 시절은 검사 따귀도 갈기던 리즈시절이었고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징집이란 없었음.

일제 헌병은 철저히 자발적 지원에 의한 선발. 근데 여기서 신기남 애비는 빠짐.

  

그 외 지들 입맛대로 끼워넣거나, 빼버리거나 한거 굉장히 많다.

민좃문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을 근거랍시고 내세우는 병신들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거기서 그냥 그렇다고 하면 그게 진리인가....

 

앞으로 누가 친일인명사전에 나와있다고, 그것이 진리인것마냥 떠들어대면 버벅 대지마라.

그냥 민간단체임.

 

사실 나는 테크노크라트형 인간들이 왜 친일파냐 라고 따지는 부류다만,

민문련쪽에서 테크노크라트형이든 이데올로그형이든간에 지들 입맛대로 친일파를 만들어버리니

그게 참 어이가 없어서  민문연과 민주당 인사들을 까는거임.

 

암튼 민문연은 테크노크라트형 인간들을 매국적 친일파 범주에 끼워넣어, 대중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그형 친일파처럼 인식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계속 그런식으로 멀쩡한 대다수 테크노크라트형 인간들을 매국적 친일파로 만들게 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인들도 일본의 전쟁범죄에 한몫을 했다는 논리전개가 가능함. 실제로 일본우익들이

 

봐라.  조선인 친일파들이 저렇게 많지 않았나

 

이런 소리를 하기도 한다.

정말 그 단체 건물에 벼락이라도 내려쳤으면 좋겠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죄다 종북새끼들밖에 없다. 이 새끼들이 그 <백년전쟁>인가 하는 쓰레기영상 만들었잖어.


이 연구소 주도 멤버가 누군지 함 봐라. 

이런 새끼들이니까 쉴새없이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또 대한민국을 일궈낸 우리의 훌륭한 리더들을 폄훼하려고 주작질을 하지. 이런 새끼들이 만든 영상 믿고 좋다고 박수치는 새끼들도 다 종북에게 세뇌당한거다. 


출처: http://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880


민족문제연구소의 親北실체 분석

'親日인명사전'작업이 민족문제연구소와 親日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親北성향 인물들에 의해 주도돼 물의를 빚고 있다.

북한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여해 온 親北인사들이 주도하는 親日청산작업은 자료의 고증이 결여돼 있고, 자의적으로 이뤄져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南民戰연루 任軒永, 親北단체 '통일연대'대표

  
▲ 임헌영씨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任軒永)씨는 1979년 적발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南民戰) 사건' 등 두 차례의 공안사건 연루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이영민 대변인은 지난 31일 "임헌영(任軒永)씨의 부친과 부친의 4형제가 6·25사변 당시 모두 좌익 활동을 한 혐의로 전후(戰後) 총살당했다"며 "이 같은 사실은 任씨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 거주하는 친척들을 통해 직접 확인된 것"이라고 덧붙혔다.

임헌영(任軒永)씨가 연루된 '남민전(南民戰)'은 주범 안용웅(安龍雄) 등이 월북해 김일성(金日成)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했던 共産혁명조직이었다.

80년 운동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남민전' 잔당들은 주사파(主思派)를 비롯한 80년대 좌익세력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까지 복역한 후 대통령 특사(特赦)로 출소한 임헌영(任軒永)씨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직 이외에도 '통일연대' 공동대표와 '전국연합' 참여단체인 '사월혁명회'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통일연대'와 '전국연합'은 국가보안법철폐, 주한미군철수, 북한식연방제통일 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대표적인 親北단체들이다.

'사월혁명회'는 본래 1988년 '사월혁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사월혁명연구소' 소장을 지낸 윤성식은 1998년 10월 越北, 현재 북한 조선로동당 외곽조직인 '在北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찬위원장 윤경로, '민족공조'로 통일 주장

  
▲ 윤경로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尹慶老) 한성대 총장 역시 '민족공조'에 입각한 통일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尹 총장은 지난 7월20일 일본 토쿄에서 열린 '6·15공동선언발표5주년과 광복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南과 海外합동강연회'에서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민족공조'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 일본의 한복판 동경에서 우리의 말, 우리의 정신을 가지고 ‘민족의 공조’를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뜻 깊은 일인가. 올해는 광복60주년이자 6·15공동선언5주년이다. 조선민족, 한민족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찾아보고 그 속에서 민족공조를 찾자...6·15선언 2항의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민족공조로 통일이 가능하다"

尹 총장에 이어 주제를 발표한 한동성 日本조선대학교 조교수는 "北에서는 主體思想의 기치 밑에 제국주의와 첨예한 정치군사적 대결 속에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이 일관되게 진행됐다"며 "민족공조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주체적 역량을 강화해 준다면 선군(先軍)정치는 그를 위한 물리적 담보를 마련해 준다"고 역설했다.

 

親北사관의 姜萬吉·李泳禧 등 지도위원

  
▲ 강만길씨
민족문제연구소의 이념적 노선을 이끄는 지도위원에 강만길(姜萬吉) 광복60년기념사업회장, 리영희(李泳禧) 한양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강만길씨는 각종 저술에서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민족사적 정통성이 없었다"고 단언하면서 "반대로 北에 성립된 정권은 조국해방에 대비했던 세력들이 연합하여 세운 정권이었다"며 민족사적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역사관을 확산시켜 온 인물이다.

그는 6·25사변(事變) 또는 동란(動亂)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미인 '사변'이나 '동란'이 아닌 '전쟁(戰爭)'이라 부를 것을 주장하며, 이는 '김일성(金日成)에 의한 침략전쟁'이 아니라 '南과 北의 통일전쟁'이라고 강변해왔다.

리영희씨의 사관(史觀) 역시 이와 유사하다. 그는 최근 출판된 '대화'라는 책에서도 남한의 역대(歷代) 정권을 "광적 反共주의와 극우집단의 폭력주의 체제" 또는 "反인간·反생명·反윤리적 체제"로 비난하고 있다.

李씨는 이승만(李承晩) 정권을 "잔인무도한" "포악한" "타락한" "파탄난" 등 극렬한 수식어를 사용해 정권이 아닌 "집단"으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민족의 배반자" "천황숭배자" "기회주의자" "변절자"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반면 그는 북한의 '공산화숙청'을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한 것"으로 묘사한 뒤 "以北에서는 새 나라 건설을 위해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민족정기가 넘쳐 있는데 같은 시각 남한은 '썩은 술을 낡은 부대'에 그대로 담고 있는 꼴 이었다"고 적고 있다.

 

"연방제통일" 주장하는 김승교 고문변호사

  
▲ 김승교씨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顧問)변호사 김승교씨는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기소된 송두율은 물론 간첩죄로 실형을 살다 지난 15일 광복절특사로 사면된 민경우의 변호를 맡았던 인물이다.

金씨는 각종 세미나, 토론회, 기고문을 통해 북한의 인권현실을 부정하고, 미국의 북한인권법제정을 비난하는 한편 '연방제통일'을 주장해 왔다. 그의 주장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북한인권법의 제정 의도는 '조사결과' 25개 항목을 보면 다 드러난다. 객관성과 공정성의 상실은 물론 불신과 적대감 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2004년 11월11일 북한인권대응방안토론회)"

"이젠 어느 한쪽을 흡수하는 통일이 아닌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통일이 돼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인 연방제통일이다(2001년 4월5일 인터넷매체 U-news인터뷰)."

"헌법19조에도 사상보장이 명시되어 있다. 모든 사상에 금기란 있을 수 없다. 주체사상(主體思想)도 마찬가지다. 이번 토론회는 그러한 금기를 깨는 토론회라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2001년 6월 14일 고려대 주체사상토론회)."

 

연구실장은 맥아더동상철거 집회에 등장

이밖에도 민족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이돈명(李敦明) 씨는 親北단체 '전국연합' 고문으로, 이사 장두석 씨는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남측본부' 고문으로 각각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다.

이사 이해학(李海學)씨는 1991년 '범민련남측본부' 창립 시부터 참여했던 인물로서 親北단체 '통일연대' 고문으로 활동하다 최근 고문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됐다. 그는 대법원판결을 통해 거짓임이 드러난 김대업의 소위 '兵風의혹'을 지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박한용씨는 강만길씨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기자는 지난 7월14일 강희남 등이 주도한 맥아더동상철거집회에서 깃발을 들고 집회를 주도하는 朴씨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도위원인 성대경, 정창렬, 주섭일 씨 등도 국보법폐지에 참여해 온 인물들이다.

 

金希宣·姜禎求·金南植 등도 민족문제연구소 참여

  
▲ 강정구씨
민족문제연구소는 2004년 열린우리당 김희선(金希宣) 의원의 '조부(祖父) 독립운동조작'사건이 물의를 빚은 후 몇몇 인물들을 간부명단에서 삭제했다.

이 중에는 金의원 외 김원웅(金元雄) 열우당 의원, 이창복(李昌馥) 열우당 前의원, 강정구(姜禎求) 동국대 교수, 김남식(金南植)씨, 이관복씨 등이 포함돼 있다.

김희선 의원은 1991년 '범민련남측본부' 창립준비위원을 거쳐 1992년 '전국연합' 통일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金씨의 남편 방국진씨는 오랜 재야생활을 거쳐 현재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상근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는 '전국연합' 참가단체인 '사월혁명회' 대외협력위원으로도 이름이 올라 있다.

김원웅 의원은 노무현 정권 들어 북한인권개선안 국회결의 등에 대한 반대에 나서는 한편(2003년 7월 국회결의 등), 부시 美대통령의 대북강경발언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2002년 2월7일).

金 의원은 국가보안법폐지(2001년 3월 폐지법안 제출)와 한총련합법화(2000년 11월22일 탄원서제출)를 위해서도 힘을 기울여왔다.

이창복 前 의원은 '전민련' 상임의장을 거쳐 1993년부터 1998년까지 親北단체 '전국연합'의 상임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광화문 할아버지'로 이름이 알려진 이관복씨는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남측본부'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이 단체 산하 여중생 汎對委 고문을 맡고 있다.

지난 1월7일 사망한 김남식씨는 1963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전향을 조건으로 풀려났으나, 1980년대 후반 들어 점차 親北的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김일성 수령을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조건에서 선군정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영생(永生)과 선군(先軍)은 하나의 결합체로서 계속 이어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지난 해 7월9일 통일뉴스 기고문)"고 주장하는가 하면, "선군정치는 영원한 수령인 김일성 주석이 개척하고 전진시킨 主體혁명위업의 완성을 목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하는 정치방식" 이라고 주장하는 등 노골적으로 북한체제를 찬양해왔다.

金씨 검거 時부터 그를 담당해했던 前職 국군기무사 간부는 "김남식의 위장전향 가능성이 내부에서 여러 차례 논의됐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관리가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명백한 親日행각 左派 여운형은 제외시켜

친북인물들이 주도한 친일명단 작성은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에 기여해 온 인물들을 자의적으로 끼워 넣는 편파성을 드러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명단에 '군인으로서 위관급 이상의 장교와 분대장급 이상의 헌병'으로 활동한 인물들을 포함시켜 박정희 前 대통령과 함께 백선엽(白善燁) 대장 등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박정희 前대통령은 물론 백선엽 장군은 일제시대 反민족적 행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선엽 장군의 경우 6·25전쟁 당시 육군1사단장으로 공산군의 침략으로 낙동강까지 밀린 백척간두(百尺竿頭)의 대한민국을 지켜 낸 인물이다. 白장군이 이끄는 육군1사단은 낙동강 다부동 전선에서 북한공산군을 저지한 데 이어 최초로 평양에 입성, 공산군과 중공군에 불패(不敗)의 신화를 남겨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말기 학병참가를 권유한 '전쟁협력자'라는 이유로 김성수(金性洙), 방응모(方應謨), 김활란(金活蘭)을 친일명단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김성수 등의 학병참가 권유는 강압 속에서 이름만을 빌려준 것이라는 說이 유력할 뿐 아니라 이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기여는 친일논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주장이 정설이다.

특히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은 그가 친필로 작성한 '반도 이천오백만 동포에게 호소함(半島二千五百萬同胞に)'이라는 학병참가 독려의 글이 언론에 공개됐음에도 친일명단에 누락,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선정이 이념에 따라 취사 선택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족통신 "주한미군철수 후 南韓개혁(?)하기 위한 친일청산" 주장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명단선정의 의도는 친일청산을 주도하는 강만길씨의 주장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냉전세력의 정체와 극복방안'이라는 글을 통해 소위 남북간 평화로운 통일을 저해하는 것이 냉전세력이라며 "지금 시점에서 냉전세력 극복의 길은 우선 냉전세력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친일세력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철저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남북평화통일'이라는 명분 하에 소위 좌익(左翼)들이 냉전세력이라고 지칭하는 우익(右翼)척결을 위해 친일청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속내는 미국에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진 친북매체 '민족통신'의 논평에서 조금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민족통신'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발표 직후 이를 지지하는 '친일친미세력을 청산하자'는 논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美帝에 의해 일어난 침략전쟁으로 우리민족의 무고한 형제자매들 4백만 여 명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잃었다...그 이후에도 윤금이 사건을 포함하여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 수없이 많은 살해사건들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냉혈동물들이 바로 침략자, 美제국주의자들이었다...친일사대 매국인물들은 8·15이후 대부분 친미사대주의자로 둔갑해 민족의 화해와 협력, 자주적 평화통일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친일매국세력과 친미사대주의세력을 청산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가로막아 온 주한미군철수 투쟁의 고삐를 당겨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만이 남한의 개혁을 이루는 길이다"

 

자유진영, '민족문제연구소' 해체 촉구 기자회견 열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발전시킨 우파(右派)세력을 척결하고, 주한미군철수 후 '개혁'이라는 이름의 체제변혁 의도마저 엿보이는 친일청산은 自由애국세력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국민행동본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8월 31일 서울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親日人名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북성향을 비판하며 연구소의 해체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강만길(姜萬吉), 강정구(姜禎求), 한상범(韓相範) 등 親北인사들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했거나 현재 활동하면서, 친일청산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제공 :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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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83%81%ED%9D%AC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

 

 

 

박정희가 남로당이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을 보면 김창룡 특무대장의 부하들이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 이재복을 체포한 후 이재복이 소지한 명단에 박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인물포섭 전문 이재복의 접근

이재복은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주임무는 인물포섭이었다. 이재복은 박대통령의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서 우익으로부터 피살 당하자 박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복수심을 부추키며 접근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박대통령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 이재복은 사망한 박상희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박대통령을 포섭명단에 올렸던 것이다. 박대통령을 수사한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특무과장도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확인해 준 사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휘하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은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활동도 미약했다",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 김완룡은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가입후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는데다 군 내부에서 그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살렸다"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당시의 숱한 증언에 의해 박대통령은 실질적으로 남로당 활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됐었다. 하물며 박대통령 두번 죽이기에 나선 좌파조차 지금까지 더 이상의 뚜렷한 이적행위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박대통령의 '남로당 총책'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음모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재복의 접근-향우회 참석하라

박정희 대통령도 훗날 김종신에게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며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했으나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였어."


"나는 거기서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라고 술회했다. 박대통령이 체포 되었을 당시의 증언들과 훗날 박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제출한 명단도 당시 모인 향우회 빨갱이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비굴해 하거나, 구명을 부탁하지 않고 의연하게 고문에 대처했다.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정을 알게 된 김창룡과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대통령의 혐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구명요청서를 작성해 이를 백선엽 장군이 미 고문단에 제출했다.


그간 좌파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로당 빨갱이 명단을 제출하고 변절했다고 변절자, 기회주의자 등 모진 누명을 씌우는데 혈안이 됐었다. 빨갱이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자가 맞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 계략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빨갱이들을 일망타진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자로 새삼 확인되고 정의된 것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 반정부운동에 앞장서면서 이념을 내세운 운동권 출신들은 지금도 대남적화에 나서야 변절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역사속에 진실은 언제나 역사 곁을 지키며 산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날, 우리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www.frontiertimes.co.kr/news/htmls/2012/06/2012062086505.html

 
 
 
 
 
 
 
 

여순반란과 박정희

 

여순반란이 일어나자 크게 놀란 군 당국은 여수·순천 지구의 군인 3,000여 명을 수사하여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적색분자 150여 명을 색출해냈다. 이 과정에서 적색분자가 육군사관학교에까지 박혀 있음을 발견하고 수사범위를 넓히면서 당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부의 고위 간부임을 밝혀냈다.

 


1948년 11월 11일, 육사 7기의 졸업에 참석했던 박정희는 그날로 체포됐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숙군 피의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박정희는 몇 차례 전기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어떤 시점부터는 순순히 자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사기록에는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 동기가 이렇게 진술돼 있었다.

 


“형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경찰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총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수사관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수사책임자였던 김안일은 이 문제를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에게 가지고 가 “국장님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박정희 소령을 한 번 면담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후 김안일은 박정희를 정보국장실로 데려왔는데 이때의 일을 백선엽은 이렇게 적었다.

 


“박 소령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백선엽, <군과 나>, 1989)

 


이후 백선엽·정일권·원용덕·김일환·김백일 등 일제 만주군 인맥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박정희는 그 해 12월 10일 구속수사 한 달 만에 풀려나게 됐다. 

 
 
 

아래 링크의 박정희 친인척 비리라는 글이 인터넷에 퍼져 있다. 

http://blog.daum.net/ikdominia/123

 

박정희 반대자라는 것들 추잡한 꼬라지는 익히 알지만, 저 글은 그 야비함과 비열함에 있어서 가히 모범적 수준을 자랑한다. 그 무슨 재벌가의 혼맥도를 얼기설기 엮어 가며 박정희와 친인척이 다 해 먹었다고 선동하는 참으로 천한 사기질이다.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내용인데, 아래는 그에 대한 반박이다.

 

 

 

추잡한 왜곡질

 

저 글은 박정희 비난하는 인간들의 허구성과 사악함을 상징하는 대표 짓거리로 보아도 좋을 정도이다.

크게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박정희의 친인척이 뭘 엄청 해먹었다는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결국 박재옥, 박재홍, 박준홍, 박재석, 박재호, 그리고 육인수, 기타 김종필, 박근혜, 박지만 이야기, 그리고 박재선이 의사와 결혼했다는 저런 엄청난 이야기와 박계옥에 대한 이야기 정도. 

 

다른 하나는 박설자로 말미암아 그랜드 서클 어쩌고 하는 뒷부분. 다른 방향으로 한 번 가 보자고 완전히 딴길로 빠져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딸의 남편의 형의 마누라의 오빠로부터 시작해(이거 도대체 뭔데?) 그물처럼 엮인 우리나라 재벌 혼맥도를 마치 엄청난 박정희의 비리나 되는양 사기쳐 놓은 추한 짓거리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전라도 없었으면 국가가 없었다는 말이라며 이순신 장군의 말씀마저 그럴싸하게 떡쳐 붙이며 왜곡하던 김대중식 사기법을 연상시키는 것이, 역시 닮는 것인가.   

 

 

 

 

개잡설의 출처

 

저 잡설의 기본 소스는 재계 혼맥도를 빼면 정지환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 군수>(2002년)이다. 정지환은 80년대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 전대협 제1기 의장권한대행을 역임했고 94년부터 월간 "말"에서 일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로 불렸다. 지금은 오마이뉴스 기자이다.  

 

구미에서 연필장사하던 박재석이나 벽돌공장 박재호, 박재홍의 포항제철, 동양철관 사장 이야기, 박준홍 대한축구협회 회장 스토리, 육영수의 오빠 육인순 이야기 같은 거 다 여기서 인용한 거다. 정지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뒤 친인척들이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자리를 얻은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며 박정희는 제가는 커녕 수신도 못한 인물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과연 그럴까?

 

박정희 친인척 문제를 정확하게 엿보기 위해 먼저 비슷한 계열인 강준만의 글을 옮긴다.  

 

<동창관계는 몰라도, 친인척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박정희는 확실하게 맺고 끊는 자세를 취했다. 박정희의 친인척 특혜는 없었다. 박정희는 친인척을 너무 냉정하게 대하고 오히려 박대하는 바람에 그들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516 때 66세였다. 그는 박정희 이상으로 엄격하게 선을 그어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중에(65년) 한국전력의 연차적 계획에 따라 자기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마저 행여 특혜시비가 일까봐 단호히 반대했다. 급기야 한전 사장이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고 나서야 전기 공사를 받아 들였다.>(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제2권 251페이지)

 

박정희 까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준만이 이렇게 박정희 친인척 문제를 좋게 평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객관적이라 판단하고 인용한 자료가 그랬기 때문이다.

 

강준만의 자료는 이상우의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년)이다. 이상우는 박정희의 곁에서 그를 가장 가까이 지켜 본 청와대 출입기자이다. 이상우는 1936년 목포 출신으로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 내내 청와대를 출입한 정치부 기자이다.

 

그럼 정지환이 박정희의 친인척 관리를 신나게 까는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의 소스는 무엇일까? 희한하게도 이 또한 이상우의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이다. 강준만의 인용서와 똑 같은 책을 정지환도 인용했다. 

 

그런데 어째 두 사람의 인용 내용이 이렇게나 다를까? 강준만은 <박정희의 친인척 특혜는 없었다. 박정희는 친인척을 너무 냉정하게 대하고 오히려 박대하는 바람에 그들로부터 원망을 들었다>는데 정지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뒤 친인척들이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자리를 얻은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며 오직 비난 일색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결론적으로 이건 강준만이 그나마 원전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정지환은 이상우의 원전을 인용했다기 보다는 글의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극도로 자의적으로 편집해서 갖다 붙였기에 저리 달라진 거다. 정지환은 본인들이 자칭하듯 순수한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람인데, 그런 기자가 책은 이렇게 쓰나?

 

객관적으로 그냥 두 사람의 공통된 원전인 이상우의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을 직접 보자. 김정렴의 회고록 <아, 박정희> 역시 박정희 친인척 관리를 극찬하는 것으로 모든 언론이 인용하는 책이지만, 정지환이 이건 편파적이라고 불만스러워 하니 지가 좋다고 인용한 책이나 한 번 보자는 거다.  

 

 

 

 

박정희 친인척 관리의 진실

 

박정희는 박동희, 박무희, 박귀희, 박상희, 박한희, 박재희 등 여섯 형과 누나를 둔 막내이며 형제들은 다들 몇 명씩의 자녀들을 두고 있다. 형 박상희는 6남매를 두고 있다. 부인 육영수는 육인순, 육인수 등 위로 두 남매, 동생 육예수를 둔 4남매 중 셋째이고 언니 육인순만 해도 8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저 자녀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이리저리 엮여 나가면 정말로 많은 친인척들이 박정희의 주변에 있었던 셈이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사촌들을 다 제외한다 해도 그 친인척을 다 합하면 백여명은 훌쩍 넘는다.

 

이상우는 박정희의 통치기간이 18년 5개월이라는 헌정사상 최장의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7남매의 막내로서 수많은 친인척 관계가 있었기에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친족의 비리가 발생할 여지가 많았으나 박정희가 다행히도 친족들의 권력 간여가 초래할 병폐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에 친인척의 비리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245페이지).

 

이상우는 245페이지에서 박정희의 친인척 관련 기본 입장을 이렇게 소개한다.

 

<혈연정치의 폐해를 남달리 인식하고 있던 박정희는 516 집권 직후부터 자기 친족들의 정치간여를 철저히 봉쇄했다. 민정이양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박정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지닌 실력으로 자립해야 하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란 직위가, 나 개인은 물론 가족이나 집안의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이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박정희의 생활신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한 때 친척들로부터 적지 않은 원망을 듣기도 했고, 너무 야박스럽다고 감정까지 사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친척들에 관한한 공사를 가름하는 태도는 단호했다. 박정희는 그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자격 유무에 관계 없이, 친척 가운데 누가 정부 고위관리로 들어가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을 극력 봉쇄했다. 정치참여뿐만이 아니라 이권개입 등에 관해 항시 집안단속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럴 가능성을 미리 막기 위해 친족의 서울거주마저 봉쇄하려 했고, 친척들이 청와대를 방문하는 일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이상우는 다른 건 몰라도 박정희의 친인척 문제만은 오직 칭찬으로만 일관한다. 비판? 전혀 없다.

 

<그 중에 박용빈(박정희의 작은아버지)의 아들 한 사람이 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성북구에서 입후보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알고 사촌 동생이 되는 이 사람에게 처음엔 입후보를 포기하도록 권유했었다. 그러나 고집을 굽히지 않자 선거 당일 새벽 경찰로 하여금 그 동생을 연행토록 함으로써 사실상 입후보를 포기토록 만든 적이 있다. 그만큼 박정희는 친족의 정치참여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겼었다.>(247페이지)

 

 이런 일화도 있다. 박재희는 박정희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그의 누나이다.

 

<516이 나고 박정희가 대권을 잡자 한정봉, 박재희 부부는 시골 농사를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친족 가운데는 가장 친하게 지낸 사이였지만 박정희는 그들의 상경을 몹시 못마당하게 여겼다. 우려했던 대로 대통령의 누님이라고 하여 뭔가 한자리, 또는 한건을 노린 청탁꾼들이 모여 들었다. 모모하는 국회의원들도 곧잘 찾아 갔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박정희가 하루는 권상하 비서를 시켜 누님댁을 찾아가 서울에 있지 말고 시골로 내려가 있으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박재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래 대통령의 누님은 서울에서 살 자유도 없느냐?" 권비서는 그때 혼쭐이 났다고 한다. 대통령의 둘째 누님 박재희는 끝내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살았다. 대통령으로도 어찌할 수 없어 누님의 서울 거주를 막지는 못했지만 매부를 비롯하여 조카들에 대해 특별한 도움은 주지를 않았다. 둘째 매부 한씨는 66년 4월에 작고했다. 조카딸이 결혼할 때는 '부질없는 부조'가 들어올까봐 박정희는 청첩장을 찍지 못하게 했다.>(256 페이지)

 

노무현의 형 노건평씨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의 미담이나 육영수 여사가 조카 홍소자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일반버스를 타고 다니라고 단속하는 사례 등 옮기자면 한이 없다.

 

혹시 이거 박정희 찬양서 아닌가? 아니다. 이상우는 책 표지에서 <독재, 반민주, 반인권, 공작정치, 국민기풍의 왜곡 등 갖가지 두려움으로 얼룩졌던 박정희 통치 18년> 운운하듯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부정적인 측면이 노정된 것이 박정희 정권 18년이었다고 비판하지만 그래도 그는 친인척 관리만큼은 한치도 흠잡을 게 없는 박정희였음을 넉넉히 인정하는 거 뿐이다. 이런 책 인용했다는 정지환이라면 말 저렇게 하면 안된다.

 

박정희가 친인척 관리를 잘못해서 모조리 해 먹을 만큼 다 해 처먹었다는 말은 정말로 야비한 유언비어에 불과하다.   

 

 

 

 

대여섯 명 이야기

 

박정희의 통치기간은 18년 5개월이며 게다가 7남매의 막내로서 수많은 친인척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위 글에서 말하는 그 중에 뭘 해먹었다는 인물은 겨우 대여섯명. 왜 그런지 아나? 이상우의 책을 불을 켜고 뒤져서 뭔가 조금이라도 걸리적거리는 거라고 찾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처 김호남의 딸 박재옥. 그 남편 한병기는 원래 박정희의 군대시절부터의 전속 부관이었다. 516후 주뉴욕총영사관 3등 서기관인 영사로 나간 이후 주로 국제적 감각이 있어 외교관생활로 일관했다.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병기는 8대 국회의원이 된 적이 있었으나 주로 외교관 생활로 일관해 대통령의 사위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기회도 없었다.>

 

무엇보다 박재옥과 한병기에 관해 중요한 점은 이상우의 책 258페이지에 나온다.

<박재옥은 가정적인 환경의 탓인지 몹시 소극적이고 얌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아버지가 훗날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그녀 자신은 최고권력자의 핏줄이라는 낌새조차 내비치지 않을 만큼 검소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5.17' 사태 이후 당국으로부터 조사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 알려진 사실로는 박재옥은 패물 하나 지니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박씨는 자신이 대통령의 맏딸이면서도 몸가짐을 검소하게 가져왔다는 증거였다. 박정희의 전처인 김씨는 해인사, 직지사, 동화사, 통도사 등으로 돌아다니며 공양주 생활을 해 왔는데 현재도 생존해 있다. 그리고 동생들, 그러니까 박정희의 본처 처남들도 지금 선산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뭔가 저리도 해 먹었다는 자의 부인이 어째 패물하나 지니지 않고 있었고 그 엄마는 공양주 생활이나 하고 그 형제들은 그저 농사나 짓고 있었을까? 한병기가 젊은 나이에 외교관으로 나간 문제는 이렇다. 이건 다음에 나오는 박재홍, 박준홍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지금이야 개나 소나 대학생이지만 1930년에는 문맹률이 무려 77%였다. http://blog.daum.net/ikdominia/38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4년 콩고의 40.4%, 1983년 적도기니의 38.0%보다 거의 두 배 이상이며 1970~80년대 극도의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아프리카에서도 이 정도의 문맹률은 찾기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은 해방 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625가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운명을 걸머진 육해공군 최고 사령관에 겨우 1917년생, 33세 정도의 정일권이 올랐을까? 대한민국은 그런 한심한 꼴이었다. 그나마 문맹이나 면해도 당시 제대로 뭔가 국가의 일을 할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으니, 그때 대학을 나왔다는 자들 치고 그 누구인들 한자리씩 맡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병기는 대통령의 사위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출세할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런 부정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아무리 뒤져도 부인이 패물 하나 가진 게 없는 수준이고 그 처남들이 다들 농사나 짓고 있다면 그 내막이야 알만 한 것이다.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도 그렇다. 그는 고대법대를 졸업하였다. 고대법대? 당시 이건 상위 0.0001%에 드는 최고 학력의 소지자였다. 그가 28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는 게 무어 그리 이상할까. 그보다 그는 오히려 박정희의 조카라는 이유 때문에 그 능력에 비해 출세를 못했다고 지적되는 사람이다. 이상우는 251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동희는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박재홍씨는 현재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11대 국회 때부터이다. 따라서 그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생존해 있을 때는 오히려 그늘에 있다가 제5공화국이 들어선 다음에야 햇빛을 보게 된 셈이다. 바꿔 말하면, 박정희의 친족에 대한 견제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반증해 주는 사례이다>

 

여기서 잠깐, 저 정지환 기자의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는 박재홍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아나?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고한 뒤에 얻은 지위는 생략>이라고 아주 그럴싸하게 갖다 붙이면서 박재홍이 1969년 포항제철 비서실, 1973년 동양철관 사장을 역임했다며 친인척들이 얻은 일자리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상우의 글에서 보듯이 박재홍은 오히려 박정희가 죽은 다음에 햇빛을 본 사람이다. 박재홍에 대해 제대로 말하려면 이런 말도 해 줘야 하는 거다. 이상우가 박정희의 친족에 대한 견제가 심했음을 반증하는 사례로 소개하고 있고, 최소한 그의 글을 인용했던 정지환이라면 이런 말도 해야 자기 말처럼 공정하다. 그러나 정지환 기자는 참 편리하게도 글쓴다. 앞에 것만 똑 떼면서 그게 객관적인 척 말하고 있다. 이런 게 오마이뉴스가 헛소리 퍼대는 전형적 찌라시 방식이란 거다. 박정희라면 털끝만한 흠이라도 찾아서 튀기고 또 튀겨 보려는 개뻥질 근성들. 진짜 놀구들 자빠졌네. 이러니 오마이가 박정희 유산이 최소 1조 내지 5조라고 떠들어 댄들 무어 하등의 이상할 게 있을 것인가.

 

저 잡설에 등장하는 장덕진이란 인물도 그렇다. 고대법대를 나왔고 사법, 행정, 외무 등 고시 3과를 합격한 수재였다.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아니었으면 오히려 더 잘 나갔을 인물이였지만 이상우가 263페이지에서 말하듯이 대통령의 친인척인 탓에 오히려 출세에 지장을 받았다.  

 

박준홍도 마찬가지. 박정희의 세째 형 박상희의 외아들이다.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나오고 국제정치관계의 저서도 낼 만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는 게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하냐고? 당시 저 정도 학력과 경력이면 그 정도가 뭐 그리 큰 무리일까. 물론 박정희가 유복자였던 조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  이틀 전인 5월 14일에도 박준홍의 집에 된장 한 통, 고추장 한 통을 갖다 주고 거사를 치르러 갔다고 한다(이상우, 동저 253페이지). 그러나 박정희는 쓸만 한 인재만을 썼고 그 사후 관리는 철저히 했다. 잡설에서 박정희가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박정희는 쓸만 한 인물만 데려 썼고 그것도 아주 잘 썼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하게 마구잡이로 감투를 씌우 주려면 그럴 수 있었던 그의 친인척은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 육인수. 이상우의 책에서도 이 사람만은 단 하나의 예외였다고 나온다. "박정희의 손위 처남이었던 육인수는 일가 친족들의 처신에 그토록 엄격했던 박정희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거의 유일한 케이스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우 동저 264 페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격도 인물도 되지 않는데 박정희가 어거지로 썼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동경 무사시노 고등공업학교를 나와 516 전 진명여고, 대구고, 서울고, 동경고 등에서 수학교사로 일했던 학식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박정희로 인해 정계로 들어온 것은 분명해 보이나 그렇다고 이 정도 가지고 박정희가 자기 친인척이라면 물불 안가리로 다 해 처먹인 대통령이라 말할 수 있나?

 

박재석박재호. 연필장사를 하다가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고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으니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냐고 한다. 그러나 이상우는 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친인척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는 취지로 말할 뿐이다.

<이러했던 조카들도, 516과 작은 아버지 박정희의 집권으로 하루아침에 많은 신상변화가 일어 났다.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한 자리나 한 건 기대해 볼까 하여 순박한 조카들을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자신이 조카들을 포함한 친족들의 이권개입에는 철저히 경계하여 한 건도 들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재호도 작은아버지로부터 호통을 받아 시골로 쫓겨 내려갔다. 박정희는 친척들의 이권개입은 결코 용서치 않았으나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곤궁한 친족에게는 비서실을 통하여 최소한도의 생활이 되게끔 도움을 베풀었다. 가령 연탄을 보내기도 하고 학자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친족에게 경제적 도움을 베푸는 박정희의 기본적인 생각은 "대통령의 친척으로 지나치게 곤궁하게 지내는 것은 바라지 않으나 축재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252 페이지)

  

저게 친인척에 대한 박정희의 기본 입장이었다. 생계마저 어려웠던 두 사람에게 박정희가 명목상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절대 비리는 못저지르게 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만 가능하게 한 것이 그렇게나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박정희는 이권개입을 철저히 경계하여 단 한 건도 들어 주지 않았다.

 

동양육운? 국제전기기업? 어느 정도 회사인지 모르나 이상우의 책에 딱 그 이름자만 나온다. 그러나 저 잡설은 아주 이게 엄청난 비리인양 미친년 널뛰듯 난리를 피우고 있다. 정지환도 "새옹지마의 드라마틱한 사례", "꿈같은 인생유전", "친인척 관리에 너무나 철저했다는 대통령 삼촌 덕분에 연필장사하다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고 벽돌공장에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다 동양육운회장" 운운하며 비아냥거린다. 이상우가 의미 없이 한 줄만 적은 것도 정지환 기자에게 걸리면 신기하고 화려하게 대서특필된다.

 

박정희와 직결된 저 잡설의 내용은 이게 전부다. 

 

정수장학회가 1조 5천억? 육영재단? 그래서 박근혜 박근영 재산이 1조가 넘는다는 말을 하는 건가? 법인과 자연인의 기본 개념도 모르는 천하에 개무식함을 꼭 그렇게 드러내야 하나?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냐고? 박지만이 회장 겸 대주주로 있는 코스닥업체 ㈜EG의 주가가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자 1개월여 사이에 46억3670만원이 늘어났을 뿐이다. 이게 박정희의 친인척 관리 실패 때문인가? 이런 식으로까지 나오면 진짜 추잡한 거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5&aid=0000154673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의사랑 결혼하면 안되나? 평생 서민의 대표 운운하던 김대중이 대한민국 의사 면허 4호인 이용기의 딸 이희호와 재혼한 건 괜찮고 박정희의 조카가 의사와 결혼하면 비리인가? 김종필이 환수조치된 재산이 887억이라? 찢어진 입이고 돈 안들면 숫자같은 건 나오는대로 지껄여도 되나? 이런 사기가 대체 어디있던가? 제발 단 한 줄 근거나 좀 대고 떠들어라 병진들아.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21년 집권한 마르코스, 32년 집권한 수하르토는 구두만 삼천 켤레에 스위스 비밀 계좌에 자식들만 수천억씩, 그 재산은 미화 40억 내지 400억 달러나 되었구나. 인간의 욕심이 그런 거였나? 사치할 놈에게 평생 보장해 주면 평생 사치할 뿐인 거다.  

 

 

 

재벌 혼맥도가 친인척 비리? 

 

저 잡설이 왜 더러운 종자의 글인가는 "그런데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한번 가보자"라고 설치는 이야기 때문이다. 앞에 대여섯명으로는 극심하게 부족하니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 건데, 이건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수준의 협잡질이다.  

 

박정희의 딸도 아니고, 형 박상희의 딸인 박설자의 남편도 아니고 그 남편 김희용의 형인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란 걸 시작으로 우리나라 그물처럼 얽힌 재벌 혼맥도를 아주 웃기지도 않게 사돈의 십팔촌까지 엮어 대고 있는데,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창세기 아담의 이브과 자손들을 외우고 읊어 댄들 이렇게 열심일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재벌가에 조카의 사돈의 팔촌이라도 한 사람만 결혼해 들어가면 모조리 엄청난 친인척 비리 집안인양 이죽거리는 거, 타당한 일인가? 대체 그게 박정희 비리랑 무슨 상관인가. 비근한 예로, 백범 김구 선생도 저런 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저 추잡한 방식, 한 번 따라 해 볼까?   

 

김구 선생은 아들로서 김인과 전 교통부장관 김신 둘을 두었는데, 김신은 김진, 김양, 김휘 등 3남과 김미라는 1녀를 두었다. 이 김미의 남편이 누구인가. 바로 빙그레 회장인 김호연이다. 김구 가문은 이 김미로 인해 비로소 그랜드 서클로 들어가게 된다. 혓바닥 시뻘겋게 되는 우뢰매니 투게더니 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회사의 회장 부인이 다름 아닌 김구의 손녀이다.

 

김호연의 형은 누구일까. 유명한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이다. 김호연은 잘 몰라도 김승연은 얼마 전 유명세를 치른 바가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기 아들이 나이트클럽에서 맞고 왔다며 보복폭행을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양로원에 가서 죽 떠먹이면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던 김승연 회장이 바로 김구의 손녀사위의 형이다. 김승연 회장의 제수씨가 바로 김구 선생의 손녀인 것이다.

 

이 김승연의 큰아버지는 또 누구인가.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낸 김종철이며 그의 아들은 김신연 한화폴리머드 대표이다. 김승연의 삼촌 김종식은 천안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승연, 김호연 형제의 누나인 김영혜의 남편이 누구인가 하면, 다름아닌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차남 이동훈이다. 허걱,,, 김미의 남편의 매형이 바로 이후락의 둘째 아들인 것이다. 김구의 손녀와 이후락은 겨우 3촌간의 친인척이며, 김구와 이후락은 5촌 인척 관계이다. 아주 가깝다.  

 

김승연의 장인은 또 누구인가. 서정화라는 인물인데 그의 6촌형은 호남석유의 사장 서정귀이고 서정귀의 딸은 이동익이란 자와 결혼했는데 이 이동익은 이후락의 장남이다. 김승연가는 백범 가문 이외에 이후락 가문과 여러번 사돈을 맺었다.

 

여기서 멈추면 고구마 줄기라고 할 수 없겠다. 이후락의 3남 이동욱의 부인, 다시 말해 김미의 남편의 매형이 되는 이동훈의 동생 이동욱의 부인이 누구인가? 바로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 최예정이다. SK 최태원 회장의 부인은 또 누구인가? 노태우 전대통령의 딸 노소영이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은 신동방그룹 회장 신명수의 딸 신정화와 결혼했는데, 이 신정화의 이모 송원자의 딸 이원영은 이회창의 아들 이정연의 부인이다. 아... 몇 다리만 건너가면 김구와 이회창이 연결되는구나. 그 뿐이 아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조금만 더 건너면 백범 가문은 전두환과도 직결된다.

 

이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으면서 백범을 까자고 나선다면, 이거 미친 짓이라 아니할 수 있나? 저렇게 연결되는 수많은 정치인들, 이게 김구의 친인척이 해먹은 비리인 듯 떠들어 대면 이거 미친 사기꾼 아닌가?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인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란 걸 고리로 재벌가 인맥따위나 줄줄이 엮어 대며 이게 마치 박정희 친인척 비리인양 사기치고 선동하는 작태, 김대중 광신도 아니면 과연 착상이나 할 수 있는 사기술일까? 이따위 짓을 해 놓고 박정희 친인척이 오만가지 요직을 다 해먹었다고 사기치는 추태,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가진 인간의 망동이라 볼 수 있나?

 

오마이뉴스 기자 정지환이 좋다고 인용하는 이상우마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사촌동생의 국회의원 입후보를 막기 위해 선거날 새벽 경찰로 하여금 동생을 연행토록 할 만큼 친족의 정치참여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겼다고. 최소한의 공정성은 가지고 떠들어야 할 것 아닌가 추잡한 잡족들아. 도대체 뭐하자는 건데? 

 

 

 

 

사기질이 유전자가 된 안티 박정희들

 

박정희가 진심으로 국가를 위한 마음을 가졌다는 거, 절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한여름에도 집무실에 에어콘은 커녕 부채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의 무기업자의 증언이다. 18년간 대통령 생활을 했지만 김대중보다 친인척 관리도 훨 잘했다. 비교 자체가 불능이다. 박정희 때 못 밝혀서 안 나온게 아닌 거다. 실제로 박정희의 친인척 관리는 거의 기적적이었을 뿐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18년간 지켜 본 이상우가 그렇게 증언한다.

 

박정희 친인척 관리 문제는 김대중 친인척 문제가 떠들썩하게 제기되고 욕처먹으면서 나왔다. 정지환은 2002년도에 박정희 친인척 비난할 자료를 뒤지다 이상우의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원전은 박정희 친인척 관리에 대해 오직 너무나 좋게 기술한 것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털끝만 한 건덕지만 있어도 튀기는 재주 하나만은 대단하다고 인정한다. 또한 이런 책이 나오면 인터넷에 저따위 개잡설이 따라 나오는 거 역시 시간 문제인 거다.   

 

김대중은 집권하자마자 이희호의 오빠 이강호의 아들 이형택이 동화은행 본점에서 이사로 갑자기 고속승진을 하더니 동화은행이 퇴출되자 99년 3월에는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전격승진 임용되었다. 김대중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되던 그가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취임했을 때부터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 것이란 우려가 충분히 제기되었으나 김대중은 쌩무시했고, 마침내 이형택은 김대중의 비자금 수백억을 운영하다 이형택 게이트를 터뜨렸다. 이형택은 1998년 6월 26일 청와대로 찾아 가 이희호 여사에게 퇴출은행 명단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동화은행을 빼달라고 로비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용호 게이트는 핵심 관련자이자 조폭 두목으로 거론된 여운환이 김홍일 의원과 접촉하고 김홍업은 수사 초기 측근을 시켜 신승남 검찰총장에게 수사중단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희한한 사람들이랑도 엮여 사는 대통령 친인척들 아니겠는가. 하긴 김대중의 처남 이상호란 자는 77세나 처먹어서 17세 여고생과 원조교제를 하다 구속되는 지경이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김대중의 동생 김대현은 굿모닝 게이트를 일으키고, 세 아들이란 것들은 바로 직전 대통령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도 줄줄이 알선수죄, 조세포탈로 구속되었다. 그렇게나 친인척 관리에 자신 있다고 큰소리 뻥뻥치던 김대중, 자기는 이전 정권과 절대 다르다고 그렇게나 호언정담하던 김대중, 딱 5년 맡겨 주니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졌다. 저런 자가 박정희처럼 18년을 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도 안간다. 이상우의 말처럼, 박정희는 친족들의 권력 간여가 초래할 병폐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으며 김대중과 차원이 다른 너무나 단호한 자세로 대처했기에 친인척의 비리를 막을 수 있었던 거 뿐이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친인척 관리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사기뻥질이 유전자가 된 습성, 박정희 안티들은 이거 천년의 고질병이다. 박정희의 흠은 태산같이 뻥질하고, 김대중의 태산같은 흠은 티끌같이 줄이려다 이도저도 안되면 저따위 악랄한 개잡 사기설이나 퍼지르고 다니는 꼬락서니,,, 과연 평생을 한 번도 거짓말 한 적이 없다는 김대중 광신도들답다 아니할 수 없는 거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고, 사기나 안치면 더럽지나 않을 것이다.
이 사악하고 추잡하며 비열하고 열등한 종자들아.

 

 

 

 

 

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1)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57

 

 

 

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2)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78

 

 

 

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3)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79

 

 

박정희가 천황폐하에게 충성하는 혈서를 썻다고??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