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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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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 '라울 곤잘레스 '[한준의 티키타카] 라울 곤살레스 블랑코. 올해로 만 38세가 된, 너무도 스페인스러운 이름을 가진 공격수는 올해를 끝으로 프로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전성시대를 누리던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북미사커리그 소속 클럽 뉴욕코스모스가 그의 발길이 닿은 마지막 클럽이다. “몸이 허락하는 한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친정팀 레알마드리드를 떠난 지도 어느 덧5년. 세상은 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이제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이라는 시간이나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라울이 16년의 시간 동안 레알에서 쌓은 기록은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되고 있다. 라울은 수많은 트로피와 골을 남겼지만, 그 보다 위대한 가치로 기억할 선수다.라울이 남기고 간 등번호 7번을 이어 받은 포르투갈 공격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0)는 최근 레알의 득점 역사를 새로 썼다. 호날두는 어느 덧 레알에서 일곱 번째 시즌을 맞았고, 최근 레알 입단 후 325호골을 터트리며 라울이 유지했던 클럽 통산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가져갔다.
등장 당시 라울이 가지고 있던 레알의 최연소 리그 데뷔 기록의 주인공도 바뀐 지 오래다. 노르웨이의 신동 마르틴 외데고르가 2015년 5월 23일, 2014/2015시즌 헤타페와의 경기에 호날두 대신 교체 투입되며 만 16세 157일의 나이로 신기록을 세웠다. 레알과 스페인 대표팀을 상징하던 7번. 라울이 떠난 이후 레알은 염원하던 ‘라 데시마’를 이뤘고, 스페인 대표팀은 세계 정상에 섰다. 레알과 스페인이 보낸 최근의 황금기는, 어쩌면 라울에게는 서글픈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울이 스페인과 레알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쉽게 사라질 만큼 가볍지 않다. 레알 유니폼을 입고 741경기를 뛴 최다 출전 기록은 여전히 도달하기 어려운 금자탑이다. 물론 언젠가는 이 기록도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것이다. 라울이 위대한 이유는 숫자에만 있지 않다. 라울은 기네스북이 아닌 팬들의 가슴 속에 자신의 플레이를 새긴 선수였다. 10월 29일은 라울의 역사를 되새기기엔 더 없이 좋은 날이다. 21년 전 오늘. 1994년 10월 29일에 라울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7세 소년은 어떻게 프로가 되었나 영웅은 난세에 나타나는 법이다. 라울이 데뷔한 1994년은 요한 크라위프가 이끌던 ‘드림팀’ FC바르셀로나의 시대였다. 레알은 1975년부터 1990년 사이 무려 10번의 라리가 우승을 이루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를 중심으로 한 독수리 오형제의 시대에는 라리가 5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그러나 1990/1991시즌 크라위프의 바르사가 레알의 우승 행진에 제동을 걸었고, 내리 4연속 우승을 이루며 레알이 세운 역사에 도전했다. 이 사이 레알은 무려 6명의 감독을 갈아치웠다. 1994년 여름 레알의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레알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독수리 오형제 시대의 선수 호르헤 발다노였다. 1991년 레알 유스 팀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발다노는 1992년 테네리페 감독으로 프로 팀을 맡아 지도력을 인정 받았다. 강등권에서 경합하던 테네리페를 잔류 시키는 1차 목표를 달성했고, 나아가 UEFA컵 진출권 획득이라는 쾌거를 안겼다. 레알이 발다노를 1군 감독으로 원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독수리 오형제 시대의 쾌거는 유스 팀에 대한 과감한 투자의 결실이었다. 기실 바르사가 유소년 선수를 키워 성과를 낸 것은 크라위프 시대 이후다. 자체 육성 선수에 먼저 공을 들인 팀은 레알이었다. 발다노는 4년 연속 라리가 정상 탈환에 실패한 팀을 개선하기 위한 과정에 젊은 피를 중용했다. 이 과정에서 기회를 받은 선수가 라울이다. 발다노는 프리시즌 카를스루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이미 라울이 가진 잠재력에 주목했고, 불과 만 17세(지금 칠레에서 열리는 2015 FIFA U-17 월드컵에 참가 중인 선수의 연령대다)에 불과한 라울은 1군 선수단에 합류시켰다. 본래 아틀레티코마드리드 유소년 팀에 소속되어 있던 라울은 1992년 아틀레티코가 재정 문제로 유소년 팀을 일시 해체하며 무소속이 되었는데, 레알의 수석 스카우트였던 파코 데 가르시아가 눈여겨 보고 있다가 재빨리 낚아챘다. 1994년 레알마드리드C팀에서 골폭풍을 몰아친 라울은 레알카스티야로 승격된 것에 이어 발다노에 의해 1군 팀으로 고속 승격했다. 스포르팅히혼과의 리그 5라운드부터 벤치에 앉기 시작했는데, 8라운드 콤포스텔라전에 핵심 공격형 미드필더 마르틴 바스케스가 부상을 당하자 그 대안으로 라울을 택했다. 10월 29일, 리그 9라운드. 사라고사와 원정 경기에 라울은 선발 출전했다. 모든 언론의 예상을 뒤엎은 과감한 선택이었다. 칠레 공격수 이반 사모라노와 투톱을 이룬 라울은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레알은 이 경기에서 2-3으로 패했지만, 라울은 경기력 면에서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곧바로 1994년 11월 5일 아틀레티코마드리드와의 리그 10라운드 경기, 마드리드 더비에도 선발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아틀레티코는 라울에게 유소년 시절의 친정팀이었다. 라울은 이 경기에서 전반 36분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어 4-2 완승에 기여했다. 두 경기 만에 프로 데뷔골을 성공시켰다. 2선의 지원을 받아 왼발 논스톱 슈팅으로 골문 구석을 날카롭게 찌른 아름다운 골이었다. 유소년 팀을 해체하며 라울을 지역 라이벌 레알에 내준 것은 아직까지도 헤수스 힐 아틀레티코 회장의 가장 크나큰 실책으로 스페인 축구 역사에 남아있다. 라울은 바스케스가 부상에서 돌아온 발렌시아와의 11라운드 경기까지만 선발로 나섰다. 발렌시아전에는 전반전이 끝난 뒤 교체됐다. 레알은 2-1로 승리했다. 이후 라울은 테네리페와 레알소시에다드전에 후반 말이 교체 투입 선수로 나섰는데, 다시 주전 자리를 찾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울은 다시 선발 출전한 14라운드 오비에도 전에 선제 결승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었고, 이어 15라운드 바야돌리드전에도 풀타임을 소화하며 득점해 5-0 대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라울은 1995년 1월 7일 FC바르셀로나와의 엘클라시코에도 선발 출전 공격수로 낙점 받았다. 직전 시즌 엘클라시코에서 참패를 당했던 레알은 5-0 대승으로 설욕에 성공했다. 라울은 득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대승 과정에 일익을 담당했다. 데뷔 시즌에 라울은 라리가 28경기에 출전해 9골, 코파델레이 2경기에서 1골을 넣어 총 30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인 10골을 넣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데뷔였다. 그해 레알은 바르사의 타이틀 방어를 저지하고 라리가 우승을 이뤘다. 라울은 신인왕을 수상하며 스페인 최고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결혼 이후 아내를 위해 시작한 세리머니, 라울은 원조 반지의 제왕이었다.우아한 마타도르, 스페인의 황태자 라울은 마드리드 근교 도시에서 태어나 레알 유소년 팀에서 성장해 2군 팀을 거쳐 10대의 나이에 1군 스타가 된 부트라게뇨와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 선수였다. 황혼기를 맞은 부트라게뇨는 1994/1995시즌 리그 8경기에 나서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부트라게뇨에 대한 향수와 여운은 라울의 등장으로 인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라울은 스타일 면에서도 부트라게뇨를 닮은 선수였다. 특출나게 빠른 것도, 개인기가 현란한 것도,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최전방에서 누구보다 탁월한 득점력을 보였다. 그 배경에는 공간과 흐름을 이해하는 영민함을 바탕으로 한 위치 선정, 간결하고 섬세한 터치로 동료를 활용하고, 냉정하고 정교한 마무리 슈팅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침착함이 있었다. 두 선수 모두 투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절제된 우아함을 갖춘 공격수였다. 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인 투우의 ‘마타도르’를 연상케 했다. 여기에 당시 여성팬들을 사로 잡은 수려한 외모가 더해져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라울은 스페인의 황태자로 불렸다. 라울에게 2년 차 징크스는 없었다. 1995/1996시즌 리그 40경기에 출전해 19골을 몰아쳤다. 라울의 영향력은 스페인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UEFA챔피언스리그 8경기에서 6골을 넣었다. 페렌츠바로스를 상대로 한 해트트릭으로 유럽 대항전 마수걸이 골을 넣었고, 유벤투스와의 8강전에도 1-0 승리를 이끈 결승골을 넣었다. 원정 2차전에서 당한 0-2 패배로 일찌감치 여정이 끝났지만, 라울이 ‘월드클래스’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1년이었다. 만 19세의 라울은 유로1996 대회 이후 세대 교체를 진행한 스페인 대표팀에 승선했다. 그 이후 라울이 남긴 역사를 열거하는 것은 지루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울은 1995/1996시즌부터 2003/2004시즌까지 9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고, 프로 데뷔 시즌 이후 2004/2005시즌까지 12시즌 연속 공식 경기 두 자릿수 득점을 채우며 레알의 역사가 되었다. 이 사이 네 번의 라리가 우승과 세 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해냈다. 특히 부트라게뇨의 독수리 오형제로 이루지 못한, 갈락티코 군단도 잇지 못한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세 번이나 따낸 것은 불멸의 위업이다. 라리가 보다 챔피언스리그에 더 강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라울은 챔피언스리그 승부처에 강했다. 1999/200시즌에 챔피언스리그에서만 10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고, 2000/2001시즌에도 7골로 2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라울은 엘클라시코에도 15골이나 넣었을 정도로 큰 경기에 강했다. 레알은 ‘라울 마드리드’로 불렸다. 레알에서의 경력에 이어 샬케04에서도 챔피언스리그 득점을 추가한 라울은 통산 142회 챔피언스리그 출전에 71골을 넣어 대회 역사상 최다 득점 공격수가 됐다. 이는 차순위였던 네덜란드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로이(56골)에 15골이나 앞선 수치였다. 이 기록은 역대급 득점력을 보이고 있는 현 시대의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현재 118경기 82골)와 리오넬 메시(현재 100경기 77골)에 의해 경신되었다. [표] 라울의 트로피 리스트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레알로 모이던 시절 갈락티코 시대, 진흙탕에 구르기를 마다 않는 캡틴 라울의 기록이 깨졌다고 해서, 라울의 가치가 퇴색된 것은 아니다. ‘레전드’의 진정한 가치는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발휘되는 법이다. 라울은 2004/2005시즌에 리그 득점이 9골로 떨어졌고, 2005/2006시즌에는 5골, 2006/2007시즌에도 7골로 저조했다. 레알이 세계 최고의 스타를 영입하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갈락티코 정책이 만개한 시기였다. 루이스 피구와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가 가세했을 때만 하더라도 유럽을 정복하며 상승세를 타던 레알은 데이비드 베컴 영입 이후 팀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클로드 마켈렐레 등 팀에 헌신하던 선수들이 떠나고, 후속으로 영입된 이적생들이 팀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공격은 화려하지만 수비는 부실한 ‘무관의 제왕’이 됐다. 이 시기 레알은 역대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우승 트로피는 챙기지 못했다. 라울이 득점하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공격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신이 골을 넣기 위해 욕심을 부리기 보다, 동료들이 비워둔 자리를 커버하고, 수비를 지원하며, 팀 정신을 고취 시키기 위한 리더 역할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플레이 뒤에 누군가는 궂은 일을 해야 한다. 라울은 기꺼이 팀을 위해 뛰었다. 2003년 페르난도 이에로가 팀을 떠나면서 레알의 주장 완장을 이어 받은 라울은 더 이상 우아한 피니셔가 아닌 투혼의 상징이 됐다. 공을 쟁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고, 때로는 안면으로 공을 따낸 뒤 패스했다. 문전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이곳 저곳을 뛰어 다니며 진흙탕을 뒹굴었다. 이미 화려한 명성을 안고 온 스타들도 계속된 무관에 고개를 떨궜지만, 진전 팀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는 주장 라울이었다. 라울은 놀라운 승부욕을 보였지만, 라리가 경력 내내 단 한번도 퇴장을 당하지 않은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기품 있게 승리하길 바라는 까다로운 레알 팬들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했던 캡틴이었다. 오히려 이 시기 라울의 충성심이 빛났다. 레알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팀이 됐지만, 여전히 마드리드 지역 팬들의 마음에는 라울의 자리가 가장 컸다. 모두가 떠나도 라울은 남아 팀을 지켰다. 라울은 레알 그 자체였다. 갈락티코 정책을 도입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난 뒤, 선수단은 한물간 스타들을 정리했다. 2006/2007시즌 팀을 맡은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레알에 다시금 라리가 우승을 안겼으나 지루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다음 시즌의 임기를 보장 받지 못했다. 보다 좋은 축구로 승리하자는 열망 하에 헤타페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낸 베른트 슈스터가 2007년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슈스터는 다시 라울을 중심으로 한 공격 전술을 구사했고, 라울은 37경기에서 18골을 몰아치며 부활을 알렸다. 라울은 네 시즌 만에 공식 경기 20골대 득점을 해냈다. [표] 세계대전 이후 레알의 역대 주장들 (주장 재임기, 기록, 포지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라울 야속한 세월, 현장에서 목격한 마지막 시즌 이때 라울은 티키타카 스타일로 변화를 진행하던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의 스페인 대표팀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스페인은 유로2008 대회에 라울을 뽑아야 한다는 여론으로 들끓었는데, 스페인은 라울 없이 유럽 챔피언 등극에 성공했다. 라울은 2008/2009시즌에도 리그 18골을 넣었으나 이미 스포트라이트는 리오넬 메시와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중심이 된 바르사였다. 스페인 대표팀의 주역도 차비와 이니에스타였다. 2009/2010시즌은 라울이 레알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 됐다. 필자는 이 시기 스페인 특파원으로 현장에서 라울의 은퇴 시즌을 취재할 수 있었다. 루이스 피구가 레알에서는 등번호 10번을 달 수 밖에 없었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조차 등번호 9번을 달아야 했던 이유는 라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라울에게서 7번을 빼앗을 수는 없다. 지난 두 시즌의 득점 행진으로 레알은 다시 라울 마드리드로 불리고 있었다. 바르사의 전성 시대가 열리자 레알은 다시 화려하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엘클라시코에서의 참패, 화려한 경기력과 트레블 달성 등 바르사는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의 팀으로 칭송을 받았다. 레알 팬들은 반격을 원했다. 페레스 회장이 재선에 성공하며 2009/2010시즌 다시 갈락티코 정책이 부활했다. 이번에도 라울은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새로 영입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카, 카림 벤제마와 사비 알론소가 팀의 얼굴이 되었다. 주장 라울과 부주장 호세 마리아 구티는 팀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다. 라울은 리그 개막전인 데포르티보라코루냐전에 1득점 1도움, 취리히와의 챔피언스리그 개막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새로 영입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역동적인 축구를 구상한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의 계획에 전통적인 골잡이 유형의 공격수 라울은 잘 맞지 않았다. 흐름을 이해하고 기회를 만드는 유형의 라울은 교체 투입 선수로는 맞지 않았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면서 더더욱 위력이 떨어졌다. 라울은 짧은 출전 시간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실직적으로 팀 경기력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고, 제한된 기회 속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부상까지 겹치며 그라운드 위에서 라울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오히려 구티가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뽐내며 재조명되었다. 라울은 더 이상 레알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직감하며 이적을 결심했다. 그러나 라울이 마지막 시즌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 시즌 만에 지휘봉을 내려 놓은 펠레그리니 감독은 코파델레이 조기 틸락과 챔피언스리그 16강 탈락 과정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시즌 후반기 주로 벤치에 머물렀던 라울은 자신이 뛰지 못하는 상황에도 동료 선수들을 강하게 독려하는 모습으로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다. 라울은 자신이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갖고 팀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난 이제 서른 세 살이고, 젊은 선수들이 열정과 노력을 가지고 마드리드에 왔다. 레알에서 선수로 뛰는 것이 가장 큰 꿈이지만, 추구 선수라는 직업으로 더 싸워보고 싶다”고 말하며 퇴단의 변을 전했다. 라울은 늘 자신 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고 헌신했다라울이 남긴 메시지, 엠블럼을 대표하라 레알의 원클럽맨으로 남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최대 스포츠지 ‘마르카’는 “디스테파노와 함께 레알 100년 역사에 가장 중요한 선수다. 베르나베우에 ‘캡틴’의 혼이 영원할 것이다”라고 헌사했다. 라울을 떠나 보낸 페레스 회장도 “레알의 문양은 라울의 문양이고, 레알의 팬은 모두 너의 팬이다. 디스테파노와 그랬던 것처럼 ‘안녕’이나 ‘다시 보자’는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다”며 라울이 영원한 레알맨이라는 것을 재차 못박았다. 라울도 “’곧 보자’는 말도 할 필요 없다. 여기가 내 집이다.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스페인을 떠났다. 선수 생활에 대한 라울의 고집은 샬케04에서의 챔피언스리그 4강 및 유로파리그 8강 진출 견인으로 욕심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다. 선발 출전과 꾸준히 경기 기회가 돌아가자 라울은 자신의 진가를 뽐냈다. 이후 카타르 알사드와 미국 뉴욕코스모스를 거치며 해외 생활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이뤘다. 알사드에서 두 시즌 동안 16골, 올 시즌 북미사커리그에서 26경기 7골을 기록하며 여전한 킬러 본능을 보인 라울은 21년에 이르는 프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다. 라울이 은퇴를 결정한 것은 더 이상 팀에 기여하기 어려운 컨디션이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라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을 찾아 황혼기를 보냈고, 이제 그의 역할이 그라운드 밖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영욕의 세월을 보낸 라울이 남긴 마지막 말은 “팀 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라울은 후배들에게 등번호 보다 엠블럼으로 기억되는 선수가 되라는 조언을 남겼다. 자신이 거쳐간 팀에서 라울은 그 미션을 충분히 달성한 선수였다. 라울을 놓친 아틀레티코는 이후 페르난도 토레스를 배출하며 아쉬움을 덜어냈다. 그러나 아직 레알은 부트라게뇨와 라울의 뒤를 이을 자체 육성 공격수를 찾지 못했다. 알바로 모라타는 유벤투스로 떠났고, 헤세 로드리게스에 대한 기대와 기회도 떨어지고 있다. 레알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선수는 외부 영입 선수들이다. 외부 영입 선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안달루시아에서 자란 세르히오 라모스는 레알의 주장 역할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다. 그는 엠블럼을 대표하라는 라울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리더다. 그러나 한 때 ‘라 마시아(바르사 유소년 시스템, 농장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보다 우수한 선수를 배출했던 ‘라 파브리카(레알 유소년 시스템의 총칭, 공장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의 숙제는 제2의 라울을 키워내는 일이다. 기록이 아닌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가 필요하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축구 클럽의 전통은 결국 지역 출신 스타를 통해 강해진다. 계속된 감독 교체와 선수 영입이 이뤄지고 있는 레알은 지난 여름 이케르 카시야스마저 떠나 보냈다. 레알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철학적 기반을 다진 라파 베니테스 감독의 영입은 그 일환의 결정이라 볼 수 있다. 지금 레알 선수단에는 새로운 라울이 필요하다. [표] 레알 역대 최다 득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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