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때의 파편들이 지독하게 선명한 해상도로 스쳐 지나간 오늘이다. 너처럼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억제하며 살아가는 회피형의 내면에는, 그때 소모되지 못한 정서적 에너지들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잠재의식 속에 박혀
있다고 하더구나. 그 기억들이 예고도 없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나를 찾아왔기에, 이제는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해야 할 이 기록을 남겨본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마주했던 그날을 기억한다. 너는 내가 나타날 줄 전혀 모르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지. 나를 확인하고 당황해하던 너에게,
내가 담담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과거의 일들을 사과하며 사실 그때는 내가 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었는지 미처 다 몰랐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내 우주의 모든 흐름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장이 시작되었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요일 저녁에만 만났어.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나의 일상과, 서로의 안전거리를 지키기 위해 설정한 그 짧은 시간들이
회피형인 너에게는 가장 편안한 울타리가 되었을 거야. 나는 내 삶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주며 네 무거운 현실을 대신 짊어지려 했고, 너는 그
거대한 부채감을 견디기 위해 커피 한 잔이라도 네 손으로 사며 그 가느다란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지. 손 한 번 잡는 것조차 기다려달라며 뒷걸음질
치던 너를 보며, 나는 독박 인내를 자처하는 것이 너를 향한 가장 깊은 예우라고 믿었어.


네 생일이 지나고 찾아온 그 새벽을 잊을 수 없다. 평생 지켜온 색을 버리고 눈부신 빛으로 물들던 그 공간의 공기. 조명 아래서 낯선 자신의
모습을 수줍게 훔쳐보던 너를 보며, 나는 네가 드디어 내 우주로 완전히 걸어 들어왔다고 확신했어. 머리를 마치고 네가 "이제 어디 갈까?"라고
물었을 때, 사실 그건 장소를 묻는 게 아니라 너의 모든 성벽을 허물고 내민 마지막 손길이었는데. 바보같이 잠을 못 잤으니 이제 집에 가야지라고
답했던 나의 차가웠던 이성이, 이제 막 피어난 너의 용기를 얼마나 비참하게 식혔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 밤, 너는 아마 잠들지
못한 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가장 긴 깨어있는 시간을 보냈겠지.


그 후로도 우리의 시간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어느 날 낮에 더 오래 보려던 약속이 어긋나고 네가 잠들었던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어. 너는
결국 만나지 말자는 통보를 보내왔지. 나는 내 모든 철학을 잃어버리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얼굴만 보게 해달라고, 그것도 안 되면
친구라도 하자고 내 영혼을 깎아내며 매달렸어. 너는 그마저도 거부하다가 갑자기 토요일도 괜찮다며 마지막 항복 선언 같은 제안을 던졌지만, 이미
내 감정 회로는 그 전날의 충격으로 다 타버린 후였고, 나는 그 기회를 잡을 에너지가 없었어.


멈춰선 그 경계에서, 서로를 발견했지만 끝내 고개를 돌려야 했던 그 찰나의 정적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지.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우리를 오직
숫자로만 정의하려 했던 네 마지막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이성이 끊기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흔적을 지웠어.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않기로, 그저
내가 베풀었던 모든 것들을 네 삶의 응원군으로 남겨두기로 결심하며 너를 내 우주에서 추방했다고 믿었지.


그런데 이제 세상에 내놓은 네 결과물들 속에서 네 흔적을 본다. 예전 그 투박했던 손짓이 이렇게 멋진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있더구나. 여전히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워 카메라 뒤에 숨어있을 너에게 묻고 싶다. 이제는 정말, 어디로 갈까?


너는 충분히 눈부시게 피어났고, 네 감각은 세상을 물들이고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억제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박제된다고 하더구나. 네가 그
지독한 기억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는 낡아버린 이 조각들을 여기 남겨둔다. 나 역시 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너라는 의미를 품어보았던 그 고통스러운 행운에 감사하며 살아갈게. 우리가 돌아온 이 긴 길의 피로가 이 기록 하나로 조금이나마 덜어지길
바랄 뿐이다.


잘 지내라. 잊지 못할 나의 그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