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해저 터널 구상은 의외로 100년이 넘어가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초로 구상한 것은 1917년에 일본의 고이소 구니아키입니다.

1941년에는 쓰시마에서 지질 조사와 함께 규슈 방면으로 시험 굴착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지질 조사 이후, 이 구상은 점점 더 구체화가 되었고 1942년에는 위의 사진과 같은 "대동아 종관 철도" 계획의 핵심이 되기도 했죠.
이 계획은 지도에서 보이는 대로 동남아와 중국, 한국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일본이 수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1943년이 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이 계획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후, 1949년에 신칸센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제안이 되기는 했지만 그대로 묻힙니다.


이렇게 그대로 영영 끝나나 싶었던 한일 해저 터널 계획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통일교의 문선명입니다.

1981년 11월, 문선명은 국제 평화 고속도로를 제안하면서 한일 해저 터널을 다시 꺼내들게 됩니다.



그냥 대놓고 자기들 홈페이지에 아주 자랑스럽게 게시해 놨습니다.

통일교 측은 노태우부터 시작해서 역대 대통령 들에게 계속 접촉하면서 설득을 시도했지만,
누가 봐도 일본만 이득인 이 계획을 받아들인 정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2021년 2월 1일,




느닷없이 김종인이 이 한일 해저 터널 계획을 꺼내듭니다.

당연히 이 제안은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이 계획에 찬성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준표입니다.







7월 7일에는 김태호 역시 가세하게 되었죠.




10월 19일에는 원희룡이 대선 경선 중에 다시 한일 해저 터널을 제안합니다.

그러다가, 통일교는 한차례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바로 2022년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암살 당한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넌 배경에 통일교가 관련되었음이 밝혀지자, 일본에서 통일교 퇴출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일본에서 통일교의 입지가 줄어들게 되면서
자기 돈으로라도 터널을 파겠다 그러던게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일 해저 터널 계획을 가장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정치인은 바로 원유철입니다.








논의가 된 기간이 오래 되었던 만큼, 
한일 해저 터널의 구체적인 계획안도 시대별로 몇 개가 존재합니다.

문제는 역시 비용인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죠?

네, 일본 고속도로가 드럽게 비싼 이유가 바로 이런 식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변제 끝나면 무료로 풀겠다 그러면서 톨비를 계속 비싸게 물리고 있는데...
유지 보수 비용 등을 근거로 시간이 지날 수록 변제 기간이 계속 늘어나는 마법이 진행 중이죠.




지금은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작년에도 이렇게 버젓이 모임을 가졌죠.
참석 인원 가운데 몇몇 사람이 눈에 띄는데,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한일미래포럼이 뭐냐고요?




네, 한일터널연구회가 슬쩍 이름을 바꾼 단체가 신한일미래포럼입니다.
그리고 한일터널연구회는 통일교가 만든 단체이기도 합니다.
저 위에 통일교가 만든 터널 관련 연혁에 자랑스럽게 한일터널연구회 설립 내용이 박혀 있죠.


계엄 여파로 올해는 아직 이들의 활동이 눈에 띄지 않고 있습니다만,
9월 5일이 창립 기념일이니 올해도 뭔가 모임을 하겠죠.
거기에 누가 참석하는지 잘 지켜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