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 아이돌(...) 빌리 헤링턴이 카미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서 꽤나 화제가 됐었죠.

이해가 안 된다, 일본이랑 싸웠던 미국 사람이 왜 저러는거냐 하는 식의 반응이 대다수였던 듯 한데

사실 미국인의 일본과 일본 전통문화 사랑은 상당히 오래된, 그리고 제법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빌리가 보였던 반응 역시 딱 그 세대의 미국인이 보일 법한 반응이고 말이죠.

여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해보겠습니다.





위는 요즘 인벤에서 핫한 마블코믹스의 삽화입니다만... 뭔가 익숙한 문양이 하나 보이지요?

우측은 울버린이고, 좌측은 마찬가지로 마블의 히어로(혹은 빌런) 중 하나인 '실버 사무라이'입니다.

보시다시피 가슴팍에 욱일기를 아주 커~다랗게 달고 있지요. 일본인이 만들었냐구요? 전혀요.

작중 설정상으론 일본인이 맞지만 100% 미국인 만화가가 창작한 캐릭터입니다.

(이 녀석도 스토리상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 한번 소개해보고 싶지만 일단 다음 기회에)

이런 물건이 버젓이 나돌아다닌다는 것은 미국 국민들이 욱일기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죠.

이처럼 제국주의의 유산이 용인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부분을 살펴봐야 합니다.


익히 알고계시다시피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맞붙었습니다.

뭐 국력의 차이는 명백했고, 초반은 선빵친 일본이 어느정도 가져갔지만 결국 승리한 쪽은 미국이었죠.

헌데 이 때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부분에서 미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일단 전통적인 강대국이 아니었다는 점. 유럽 열강들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대에 웬 듣보잡 국가가 나타났는데,

심지어 그런 국가가 미국에게 덤벼들고, 비록 초반에 국한되지만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이게 첫번째였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과는 아주 상이한 문화와 정신세계를 보유한 나라였다는 점이 두번째였습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정말 '일본이기에' 가능했던 각종 기행들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카미카제. 반자이 착검돌격. 가이텐 자폭어뢰. 동양인의 집단주의+일본의 생명경시사상이 빚어낸 작품(?)들이죠.

이러한 기행들은 작전적으로는 완전히 실패였습니다마는, 적어도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던 미국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행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가?'

이 의문은 종전 이후 미국이 동양,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미군의 지배 하에 놓이면서 두 나라는 접촉할 노선이 다양해졌고,

미국인들은 '우리와 싸웠던 기묘한 나라'의 이모저모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관찰하고 탐구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하나의 붐을 일으켰고(이 영향으로 명상이나 참선을 영어권에서 'Zen'이라 부르죠),

문화적으로는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의 무가 문화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통제하는 discipline, 즉 '절제'의 미덕은 미국인들에겐 매우 신선한 개념이었지요.

개인의 감정이나 의사를 억제하고 오직 목적만을 위한 도구, 조직의 부품으로서 자신을 갈고 닦는다.

동양인인 우리로서는 익숙하다 못해 이제 좀 벗어나고 싶은 개념입니다만 서양인들에겐 숭고해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때부터 카미카제가 동양의 절제의 극한(...) 비스무리한 개념으로 경외시되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퍼스트 컨택트의 시기기 지나고, 60~70년대로 넘어가면 일본은 버블경제 시대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에 호황을 타고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는데, 이 중 소위 말하는 '챤바라',

즉 사무라이나 닌자들이 나와서 칼부림하는 영화들이 미국에서 제법 호응을 얻었습니다.

(일본 입장에선 그냥 내수용 영화 만들었는데 해외에서 갑자기 난리니 좀 황당할지도)

냉병기술이 거의 사멸하다시피 한 서구인들에게 칼싸움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도 있었습니다마는,

역시나 사무라이들의 '절제'된, 정적인 모습이 큰 셀링포인트였지요. 활력 넘치는 레슬러나 복서들과 달리

목석마냥 고요하게 앉아있다가 한순간에 칼을 뽑는, 정동의 전환이 그들에겐 꽤나 멋지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무술 영화들이 유행을 타자, 80년대부터는 미국인들이 이런 영화를 직접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가 위의 다소 해괴한 포스터지요. '아메리칸 닌자'라는 이름답게 미국인이 인술(...)로 다 때려눕히는,

상당히 심플한 물건인데 이게 흥행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작들의 성공에 힘입어 수많은 유사품들이

쏟아져나와 90년대 초반에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3 Ninjas', 'The Karate Kid' 등의 작품들이 이 시기 물건이죠.

당시 '미국인이 일본 무술 배워서 무쌍찍는' 영화는 못해도 중박은 치는, 일종의 흥행 보증수표였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대체로 일본의 정신문화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절제하면 초인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뭔가 일본 본토에서는 절대 안먹힐듯한 뉘앙스가 강했는데, 이를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30~40대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의 전통, 일본의 정신에 대한 열광은 미국인들에게 있어 상당히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지금도 무술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무기는 일본도, 무술은 인술이 최고'라는 응답이 1위를 차지하지요.

심지어 일본 본토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인술' 도장이 미국에서 성업중일 정도입니다.

일본 만화를 봐도 본토나 한국에서는 원피스>나루토>블리치인데 미국에선 나루토>>>>>원피스=블리치죠.


이쯤 되면 다들 느끼시겠지만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일본은 현실의 일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협소설과 중국 역사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아시아에 대한 환상이 듬뿍 가미된 일종의 판타지지요.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 찬양이나 카미카제 찬양 등은 사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시는게 편합니다.

그 친구들의 태반은 일본과 그 역사에 대해 무지합니다. 어렸을적부터 미국식 닌자물에 홀릭했을 뿐이죠.

일본의 정신이 어떻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전체주의가 어떠한 결말을 낳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서구 사상이 세계의 스탠다드가 된 이유를 정작 서양인들이 모르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그냥 걔들은 이러한 판타지를 가지고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시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반응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