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집단군 얘기가 또 나와야 하는데, 이전 글에서 자세하게 언급드렸으니 간략하게 줄이면,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구데리안의 발목을 잡고자 하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2기갑집단군을 키예프 동북쪽의 브랸스크(Bryansk, Брянск)에서 측방을 엄습하는 작전이었는데... 문제는 이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이 밀고내려오는 시점에서는 그들의 준비가 다 끝나 있었고, 오히려 소련군이 인수인계 문제로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는 것이죠(<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111). 스탈린은 당시 브랸스크 전선군을 담당하던 사령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레멘코(Andrey Ivanovich Eremenko,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에게 전화로 길길이 날뛰면서 승전보를 가져오라고 다그쳤지만(<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132), 아 뭐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고 우물물이 숭늉이 된답니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그나마도 예비대를 다 까먹는 결과만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 동안에 키예프는 병력을 안 빼고 뭐 했냐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강철의 대원수 상대로 그 정도 정치력을 보일 수 있었으면 예레멘코가 반격을 시도하기 전에 진작에 뺐겠죠. 아니면 그 이전에 대숙청 단계에서 위험 분자로 몰려 제거되었거나. 하여간 이런 결과로, 이제 키예프의 후방에 독일군이 들어닥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가 될 뿐이었습니다.
9월 11일이 되어 반격이 완전히 돈좌되자 부됸늬는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어서 당장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그 결과는 부됸늬의 경질이었습니다. 겨울전쟁의 영웅 세묜 티모셴코가 부임한 것이었죠. 아 근데, 티모셴코도 진짜 불쌍한 게,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가 있었겠냐고요. 때문에 애꿏은 패전의 멍에만 티모셴코가 뒤집어쓴 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참을 쉬고 있던 남부 집단군의 제1기갑집단군이 행동을 개시합니다. 드네프르 강의 크레멘추크(Kremenchuk, Кременчу́к)를 돌파하여 크레멘추크의 130 km 북쪽에 있는 로흐비차(Lokhvytsia, Ло́хвиця)로 제1기갑집단군이 돌진해 올라가고, 때맞춰서 코노토프(Konotop, Конотоп)까지 밀고내려왔던 제2기갑집단군이 120 km를 추가로 더 밀고내려와서 로흐비차에서 조우합니다. 양 기갑집단군이 조우한 날짜는 9월 16일. 키예프에서 로흐비차까지의 거리는 약 220 km입니다.
이렇게 후방이 막히자 더 앉아 있다가는 자기가 죽을 판이라 티모셴코와 흐루쇼프(그 스탈린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던 대머리 아저씨 맞습니다)는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모스크바에서도 별수없다는 듯이 9월 17일에 철수명령을 내리죠.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늦어도 한참 때가 늦어버린 이후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빠져나오려면 틈이 있을 때 빠져나오는 게 정상이지, 포위망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일방적인 공세를 두들겨맞으면서 혈로를 뚫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러니 스탈린이 욕을 먹을 수밖에요.
그래도 단기전을 준비했던 독일이었던지라 공군의 지원도 그렇게까지 활발할 수도 없었고, 소련군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치열하게 공격했으며, 무엇보다 독일군이 꽤 지쳐 있었던 탓에 포위망이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덕분에 부됸늬나 티모셴코, 흐루쇼프 등의 상당수 소련군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어느 정도의 선견지명을 갖추고 독일군의 움직임을 독소전쟁 발발 전에 주시하고 있었던 남서 전선군의 지휘관 키르포노스 상장이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전사하고 맙니다.
이 탈출 당시의 전황도가 이렇습니다. 지도가 찍힌 날짜가 9월 19일인데, 이 날이 키예프가 함락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을 섬멸해 버리기 위한 독일군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고,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 4개 야전군 (남서 전선군 소속 제5군, 제26군, 개전 당시 스타브카 소속 예비대였던 제21군, 스타브카 소속 예비대와 키예프 잔존군을 합쳐서 편성한 제37군)이 통째로 날아갑니다. 6월 22일에 남서 전선군의 제5군에 11개 사단과 다수의 연대, 제26군에 6개의 사단과 다수의 연대, 제21군에 10개의 사단과 다수의 연대가 있었고, 제37군이 편성될 때 예하 6개의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다 합치면 일단 기본적으로 사단만 30개가 넘는다는 이야기죠. 여기에 방어지원, 재편성 이리저리 끼여든 인근 야전군의 사단까지 포함하면...
영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일대의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이렇습니다. 총 사상자 70만 명 가량, 이 중 사망자만 60만 명. 얼마나 스케일이 컸던지 독일군의 피해 또한 사상자가 12만 명을 상회하는 엄청난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사망자 : 부상자 비율이 6 : 1로 어마어마할 때 독일군의 사망자 : 부상자 비율은 1 : 4 정도로 외려 부상자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키예프 전투는 소련에게 일방적인 피가 강요된 전투였다는 이야기가 되죠. 물론 그 피의 책임은 80% 이상 스탈린이 져야 할 것이구요. 위키백과와는 약간 수치가 다른데,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의하면 날려먹은 소련군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위망에 걸려든 것만 43개 사단, 병력 45만 2천 7백 20 명. 이 병력들 및 야포와 박격포 3,867문이 함께 전멸. 병력 및 다수의 시민을 합쳐 포로만 60만 명이 넘어감.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오직 이 중 1만 5천 명에 불과한 기록적인 대패였습니다.
여하간 이러한 파멸적인 결과를 세 글자로 요약하면 이만한 게 없죠. 대재앙
제가 이 글 서두에 적어놓은,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제로아워의 장군 중 한 명인 타 훈 콰이의 대사를 보면... 이런 대재앙에 소름끼치도록 어울리는 대사도 저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키예프 이후
완전히 키예프의 병력이 일소된 9월 26일 이후의 전황도를 보고 시작합시다. 9월 29일의 전황입니다. 보다시피 동쪽에 구멍이 아주 크게 뻥 뚫렸습니다. 종전에는 키예프에서 섬멸당한 4개 야전군과 함께 7개 야전군이 지킬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독일군을 막을 소련군의 야전군이 셋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는 방어선이 얇아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따라서 이 틈을 노려서 독일군이 전과확대를 하고자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적의 방어선에 큰 구멍을 뚫어놓았으면 그 구멍으로 몰려들어가서 적의 후방을 교란, 적의 남은 저항을 분쇄하고 전과를 최대한으로 거둬가는 게 바로 투하체프스키의 종심 작전이자 독일군의 전격전의 골자였는데, 당연히 키예프의 섬멸전 이후에도 전과확대가 시도되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자칫 대단히 까다로웠을 드네프르 강 도하의 교두보 확보를 매우 손쉽게 가져갔고, 이는 곧 다음 진격의 발판이 되었죠. 위 지도에서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을 넘어 대거 몰려간 것을 눈치채셨습니까? 동쪽으로 약 150 km 를 진군해 가면 이제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남부 집단군의 목표인 하리코프(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 Kharkiv, Харків)를 향해 돌진할 수 있었고, 동시에 남쪽에서는 공업지대인 돈바스로 몰려갈 수 있었으며, 남부 집단군의 예비대였던 제11군은 이제 안심하고 세바스토폴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바로 제1차 하리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으로 드러난 것이죠.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바르바로사 작전 종료일인 12월 5일입니다). 키예프 포위전을 넘어갔기 때문에 남부 집단군 이야기의 8할이 끝난 것은 맞습니다만... 앞서 언급한 하리코프나 세바스토폴 외에도 로스토프 공방전이라는 녀석이 하나가 더 있거든요.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것 같아 이번에는 여기에서 잘라야겠습니다. 지난 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