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cm FlaK 전차에 더 강했던 대공포

영국 군사박물관(IWM)에 전시 중인 FlaK 36. 원래 대공포로 개발된 88은 제2차 대전 당시 최고의 대전차포로 명성을 날렸다. <출처: (ccRickard Ångman>

당연한 이야기지만 각각의 무기들은 그 용도가 모두 다르다. 총만으로 충분히 교전을 벌일 수 있는 전투에 포가 투입될 수도 있지만 포를 사용하여야 할 상황이나 여건은 분명히 따로 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질 경우 교전 자원의 낭비가 없도록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무기를 적재적소에 정확히 투입하여 사용하는 능력은 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이다.

하지만 다양한 무기를 각각의 목적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일단 전력이 우세하거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상황이 급박하다면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를 동원해서 싸워야 한다. 적 전차가 바로 앞에 달려드는 상황에서 이 포는 대전차포가 아니어서 사용할 수 없다고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효과는 적겠지만 일단은 당장 가지고 있는 무기로 전투를 벌여야 한다.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싸워야 하는 것이 어쩌면 전쟁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래 개발 당시 계획했던 목적과 달리 엉뚱한 분야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던 무기가 전사에 종종 등장한다. 원래 대공포 용도로 탄생하였지만 대전차포로 엄청난 명성을 떨친 독일 8.8cm FlaK(이하 88)이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대공포의 등장

비행기가 제1차 대전을 기점으로 무기로 본격 사용되자 당연히 이를 격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었다. 대공포도 이때 등장한 무기인데 당시 비행기의 성능이 지금과 비교한다면 민망할 정도로 뒤졌음에도 막상 지상에서 포를 발사하여 적기를 격추시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공포는 고고도로 포신을 올려 발사할 수 있어야 했고 높은 고도까지 포탄이 올라가려면 포구 속도가 빨라야 했다. 더불어 초탄에 명중시킨다는 것은 기적과 같았으므로 비행기를 신속히 쫓아다니며 연사를 가할 수 있어야 했다. 사실 고성능 사통장치가 개발 된 오늘날도 포로 비행기를 요격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창기 대공포는 ‘공갈포’로 불릴 만큼 신뢰성이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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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의 모태가 된 독일 해군의 8.8cm SK L/45 함포. 1905년 개발된 부포였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대공포로도 사용되었다. <출처: (ccBundesarchiv>

제1차 대전 말기에 등장한 Kw FlaK 18. 포신의 고각 상향과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연사 능력이 좋았지만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출처: (ccMark Pellegrini>

이처럼 어려운 조건을 충족하는 새로운 형태의 포를 당장 설계하고 만들 시간이 부족할 만큼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당시 참전국들은 기존에 사용하던 포를 개량하여 대공포 제작에 나섰다. 1917년 독일은 고속 연사가 가능한 해군의 8.8cm SK L/45 함포를 기반으로 제작한 대공포를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것이 8.8cm KwFlaK 18(이하 Kw FlaK 18)인데 바로 여기서부터 88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추적하며 계속 사격할 수 있는 반자동 급탄 및 자동 탄피 배출 방식과 360도 회전이 가능한 십자형 포가()를 채택한 Kw FlaK 18은 이후 등장하는 대공포의 모델이 되었지만 곧바로 종전을 맞이하면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진 독일은 대폭 감군하여야 했고 더해서 전차와 전투기 같은 중화기는 개발과 보유를 금지 당했을 만큼 가혹한 제재를 받았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개발

하지만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틈새를 노려 비밀리에 무기 개발에 나섰다. 지난 전쟁 당시까지 개발된 대공포는 양산이 가능하였기에 독일은 겉으로는 기존 Kw FlaK 18을 생산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지금도 유수한 야포 제작사인 스웨덴 보포스(Bofors) 사의 도움을 받아 성능 개량에 착수하였다. 이때 개발을 주도한 크룹(Krupp)은Kw FlaK 18 포신의 앙각()이 상당히 자유로움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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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용 중인 FlaK 18. 1928년에 개발되었으므로 FlaK 28로 명명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기존 Kw FlaK 18로 기만시키기 위해 FlaK 18로 이름 붙여졌다. <출처: (ccBundesarchiv>

포신을 높여 대공 사격 준비 중인 Kw FlaK 18. <출처: (ccBundesarchiv>

포신을 수평까지 내리면 평사포()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88이 대전차포로도 성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처럼 묘사한 자료가 많지만 사실 이처럼 개발 단계부터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 마침내 1928년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신형 대공포가 완성되었는데 이를 8.8cm FlaK 18(이하FlaK 18)로 명명했다. 이는 대외적으로 Kw FlaK 18로 기만시키기 위한 목적이 큰 이름이었다.

FlaK 18은 독일이 1936년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며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는데, 대공 임무 외에 원거리의 지상 목표물이나 기갑 차량 격파에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독일이 파견한 '콘도르 군단(Legion Condor)'은 공군 위주의 소규모 부대여서 많은 무기를 가지고 갈 수 없었다. 따라서 FlaK 18을 다양한 형태의 교전에 투입해 볼 수 있었고 이때의 전과를 바탕으로 탄생한 개량형이 8.8cm FlaK 36(이하 FlaK 36)이다.

이때 대전차전에 적합한 별도의 철갑탄이 함께 개발되었고 포방패가 부착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FlaK36은 개발 단계부터 대공 목적 이외에도 지상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FlaK 36은 포 회전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었고 대차()에 올려놓고 이동하다가 긴급 상황 시에 지지대를 설치하지 않고도 곧바로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량되었다. 이후 전사에 대전차포로서의 대부분의 전설을 쓴 88이 바로 이 모델이다.

이동 대차에서 내려 포상을 구축하는 모습. <출처: (ccBundesarchiv>

이듬해 등장한 8.8cm FlaK 37(이하 FlaK 37)은 사통장치를 개량하여 정확도를 높였지만 크기와 무게가 커져서 주로 고정 진지에 배치되어 대공포 용도로 사용되었다. 1941년 공군의 요청으로 개발 된 8.8cm FlaK 41(이하FlaK 41)은 10,000m 이상의 고고도를 침투하는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도록 사거리를 증대시킨 변형이었지만 탄약과 부품이 이전 모델과 호환이 되지 않고 전쟁 말기에 등장하여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미 육군 박물관에 전시 중인 FlaK 41. 탄약과 부품이 이전 모델과 호환이 되지 않았다. <출처: (ccMark Pellegrini>

대전차포로서의 명성

스페인 내전 당시에 가능성을 선보였지만 88이 본격적으로 뛰어난 대전차포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전 당시였다. 사실 티거 전차가 등장한 1942년 이전까지 독일 전차들은 화력이 상당히 부족하여 적 전차 요격의 상당 부분을 대전차포가 담당하였다. 그런데 기존 3.7cm PaK 36 대전차포로 연합군의 마틸다 II 전차나 샤르B 전차를 격파하는데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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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사격 중인 88. 하지만 대공포로서의 성능은 평균 수준이었고 정작 대전차포로 더 많은 명성을 얻었다. <출처: (ccBundesarchiv>

SdKfz 7 차량에 견인 되어 이동하는 모습. 88은 크기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 기동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출처: (ccBundesarchiv>

1940년 5월 21일 가장 앞서 진격하던 독일 제7기갑사단이 아라스에서 연합군 기갑부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사단장 롬멜은 88을 동원하여 적 전차를 요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프랑스 침공전에서만 152대의 연합군 전차와 151곳의 벙커가 88에 의해 격파되었다. 당시 독일이 이룬 전격전 신화는 선봉의 전차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근처에서 화력을 지원한 88의 도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88은 워낙 포구 속도가 빠르다 보니 종종 고폭탄으로 적 전차를 격파하기도 했다. 따라서 초기에 주로 공군 예하 방공 포병이 운용하였음에도 육군의 요청으로 지원을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반면 정작 원래 탄생 목적인 대공포로서의 성능은 그저 그랬다. 독일 본토를 공격하는 폭격기들에게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전쟁 말기에 다양한 화력 관제 장치가 등장하였음에도 여전히 명중률이 낮았다.

롬멜은 88을 대전차포로 운용한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프랑스 전역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원거리에 있는 영국군 전차를 요격하는데 애용하며 사막의 여우로 명성을 올렸다. 하지만 88이 본격적인 명성을 날린 전장은 역시 광활한 평원 위에서 벌어진 독소전쟁이었다. 한마디로 독일군을 압도하는 엄청난 물량전을 펼치던 소련군 기갑부대를 최전선에서 격파한 제1공신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지상 목표물을 향해 포격하는 모습. <출처: (ccBundesarchiv>

전쟁 말기인 1944년 7월 18일에 프랑스 아미앵 남측 길목인 까니(Cagny)에서 벌어진 전투는 88의 전설이 되었다. 독일은 방공 용도로 배치 된 공군의 FlaK 36을 방어전에 투입하여 불과 수 시간 만에 무려 40여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영국군 제11기갑사단의 진격을 막아내었다. 그것도 대공포를 대전차전에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공군 지휘관을 어르고 달래서 얻은 결과였다.

시대를 상징한 만능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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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K 36으로 적 전차를 격파하는 티거 전차. <출처: (ccBundesarchiv>

제2차 대전 활약한 최고의 대전차포 중 하나인 PaK 43은 처음부터 대전차포로 제작된 88이다. <출처: (ccBalcerat wikimedia.org>

이처럼 88이 정작 대공포보다 대전차포로 명성을 날리자 이를 전차에 탑재하였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특히 독소전쟁이 시작되며 전차끼리 뒤섞여 싸우는 기갑전이 일상이 되자 새로운 전차들에게는 보다 강한 화력과 방어력이 요구되었다. 독일 최초의 중전차이자 전쟁사에 명성을 날린 티거에 56구경장의 88이 탑재되었는데, 이를 8.8cm KwK 36 L/56(이하 KwK 36)이라 한다.

1,000m 부근에서 교전이 벌어질 경우 적 전차를 충분히 격파할 만큼 강력하였던 KwK 36 덕분에 독일 기갑부대는 수적 열세를 질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전쟁 후반기 들어 IS-2 전차처럼 방어력이 대폭 강화된 소련의 신형 전차들이 속속 등장하자 포신을 더 연장하여 공격력이 강화된 88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71구경장의 8.8cmPaK 43(이하 PaK 43)이다.

이를 기반으로 만든 전차포가 8.8cm KwK 43 L/71(이하 KwK 43)인데 쾨니히스티거, 엘레판트, 나스호른 등에 장착되었다. 발사 시의 빠른 포구 속도 덕분에 PaK 43/ KwK 43은 2,000m 이내에 있는 132mm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었는데, 소련 IS-2 전차 등에 장착한 122mm 구경의 주포보다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전차 대 전차의 교전에서 독일은 패망 직전까지도 밀리지 않았다.

물론 이처럼 만능이라 해서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력이 강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크고 무겁다는 의미다. 긴급 시에 곧바로 발사할 수도 있지만 이동과 방열이 어렵고 많은 운용 요원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굳이 88이 아니라도 어쩌면 강력한 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88은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최고의 다목적 포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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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적 전차 요격을 위해 PaK 43을 올려 화력을 극대화한 엘레판트 구축전차. <출처: (ccScott Dunham>

제원 (FlaK 36)

무게 7,407kg/ 길이 5.791m/ 포신 4.938m/ 높이 2.10m/ 포탄 88×571mm/ 앙각 -3도~+85도/ 발사속도 분당 15~20발/ 유효사거리 14,860m(지상목표), 7,620m (대공목표)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3.11

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