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새벽에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단계를 완료한 상태여서 저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잘나서 가능했던 게 아니라 도와주신 분들의 유능함과 행운이 겹쳐서라는 결론이 나오네요. 모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저는 라그나로스 호드의 사제 [투르암]입니다. 칼리안 공대에 적을 두고 있고, 이번에 홀퀘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절 아시는 분은 저를 오그리마 은행 앞 투석기에서 마부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막간 광고! 안퀴 제외 현존 모든 마부 가능! 오래 영업해온 전통있는 가게! 지금은 장기 휴업ㅠㅠ

네, 제가 '혼자 몰래 먼저 치려고 물자 반납은 안 하고 골찍누로 몰래 홀퀘를 진행했다!'는 뇌피셜 루머에 등장 못한 주인공입니다. 루머를 퍼뜨리신 분은 저의 존재도 모르셨던 것 같지요.

아무튼 녹색용 마지막 단계인 달숲 전투를 언제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이 전투가 어렵긴 하지만 이벤트이기도 하니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오는 수요일, 8월 5일 저녁 10시에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구경 겸 경험 겸 저 좀 도와주세요 으어어어

같은 의미에서 저는 징을 치는 시점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제가 게시판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서버 소식에도 어두운 편이라, 인지하고 있는 홀 주자는 호드에서 저를 포함한 3명뿐입니다. 얼라 혹은 그 외 호드 중에 도전 레이스 중이신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그나로스 서버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검은 실리시드를 탔으면 합니다.

아래부터는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둔 제가 겪은 홀퀘 레이스의 경험입니다. 감상 포인트는 제 예상이 틀릴 때입니다. -_- 맞아떨어진 게 거의 없어요. 아래 내용을 한줄요약하면 "열정적인 미친 사람들을 곁에 두어라" 되겠습니다.



0. 힐봇 도전!

클래식 서비스 오픈 발표 때부터 '징을 최초로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리지널 때 이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그게 제 내면에서 좀 큰 한이 되었나 봅니다.

그때부터 생각만 나면 정보를 찾아보고 그 정보를 크로스체크하면서 계획을 만들고 폐기하고 만들고 폐기하고 다시 만드는 걸 반복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뜨면 거기에 맞춰 또 계획을 만들고, 허점이 발견되어 폐기하고... 대충 괜찮은 정도로 예측과 계획이 섰을 때가 페이즈5 오픈 한 달 전. 플로우차트를 이중으로 만들어서 최적의 동선을 짜고, 검증하고...

저는 직업이 프리랜서라 한 주 벌어서 한 주 먹고 삽니다. 노후대책이 없어요. 그래서 집중 준비 기간을 6개월로 잡았습니다.

전반부 3개월은 제가 가진 캐릭터 세 개를 돌려서 하나는 장사하고, 하나는 풀 캐다가 팔고, 하나는 골팟을 돌고 하며 골드를 모았습니다. 후반부 3개월은 그걸 다 중지하고 일을 많이 잡아 정공 출석만 근근이 하면서 생활비를 모았습니다. 무한 마감에 시달리며 모은 그 생활비는 지금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이 남...


1. 껍질 생산

힐러 매니아인 저는 캐릭터 세 개 중 두 개가 힐특입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한 마리는 잡을 수 있겠더군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근거가 잘못됐지요. 여러분은 이런 근거로 자신감을 생성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필요한 단계니 사람을 모읍시다.

일단 공대에 문의합니다. 다들 직장인이어서 '물자 반납이나 하지 우리가 그걸?' 이라는 반응이 많습니다. 그래도 제가 도전 의지를 불태우자 몇 분이 도와주시겠다고 합니다. 조금 지나서 알았는데 그분들은 휴가를 내셨더군요. 어떤 정신나간 분은 퇴사를 했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대신 저는 기분이라도 좋으시라고 등급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일명 '피라미드 (주) 투르암'입니다. 위임 안 받고 다른 사람 파밍 도우면 브론즈 등급, 위임 받고 파밍해오면 실버 등급, 1000개 이상 반납하면 골드 등급이라는 식이지요. 플래티넘 등급은 저-_-였습니다. 혼자 만든 옥좌에 혼자 앉아본 거지만 10초는 기분 째지더군요.

그리고 저는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난으로 만든 저 등급에 진짜 목숨을 걸더군요. 개당 골드를 받고 도와주시겠다는 분들도 여럿 섭외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분이 물어보십니다. "골드 등급 위에는 없나요?" 아, 인간 심리란 무엇인가.

그분은 홀로 1만 개를 넘기셨고, 크게 당황한 저는 그분을 위해 다이아몬드 등급을 새로 만들어 헌정합니다. 투르암의 마부를 평생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엄-_-청난 혜택이 있다죠. 이분은 돈이 아니라 이 등급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의 파밍 속도는 엄청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종의 하청업체를 차린 거셨더군요. 그리고... 이분도 하필이면 휴가중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드와 공대에서 온 휴가낸 사람들이 서로의 파밍 속도와 양을 비교하면서 경쟁 의식을 불태웁니다. 저희 공대에서 '틀딱탱'으로 굳어져버린 열반 님은 뒤늦게 합류해서 빠른 파밍을 보여줬지만, 그는 하청업체 사장님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죠. 그래서 결국 2600개로 4위.

영세한 업체에서는 업주도 노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열심히 해주는데 저도 뭐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게 뼈빠지는 노동을 하는 공산주의 락-_-원이 실현되었습니다. 제 순위는 2400개로 5위.

잠은 딱 4시간 잤습니다. 피곤했지만 외롭진 않습니다. 맵 저편에서는 하청업체 사장님이 저랑 똑같이 달리고 있었거든요. 종종 서로 귓말하면서 외로움을 위로합니다. 친구가 생겼어요. 꺄아;

파밍 속도가 엄청 빨라집니다. 시간과 집중력이 많은 사람들이 멀박도 쓰지 않고 직접 투클라로 힐러를 붙여놓고 뜁니다. 탐도 거의 필요없이 리젠되는 대로 사냥이 가능합니다. 제가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이, 실리더스에는 24시간 내내 손수 투클라를 돌리는 제 조력자가 최소 2명(저 포함)은 있었습니다. 모두의 시간이 교묘하게 맞아들어갔죠.

분위기란 무섭습니다. 몇 명이 각자의 길드창과 공대 채널에서 껍질 개수 얘기를 열정적으로 하니 퇴근하고 온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듭니다. 저는 사냥하다 말고 세나 요새로 돌아가 십수 명에게 임명을 줍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사냥으로 복귀하지 못합니다.

예상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사람이 늘고 사람들에게 줄 보상도 혜택, 의리, 골드 등등으로 제각각 다르다 보니, 챙겨줘야 할 것과 안내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업무량 폭주! 그래서 심야와 새벽에는 사냥을 하다가 관리 업무로 가고, 그러다 혼자 노는 거 같아 미안해지면 다시 사냥을 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잠은, 당연히, 못 잡니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힌 십수 명이 실리더스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실리더스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껍질 반납의 결정타는 예상 외로 제 조력자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청 사장님 ㅈㅅ. 이 시점에서 저희와 아텍 길드가 1~2위 속도를 다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아래쪽 순위에 있었던 개인 도전자들이 도전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보유량을 제게 넘긴 것입니다. 어떤 분은 힘내시라며 그냥 2천 개를 넘겨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당시 경매장 시세의 반값으로 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골드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제게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특히 5천 개를 팔아주신 A님은 러뷰.

기분이 되게 묘했습니다. 경쟁자들이 사라지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아닌 겁니다. 왜냐면 저분들은 사냥을 돌면서 계속 마주쳤던 그 이름들이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이니, 거듭거듭 고맙고 아쉽다고 말해드렸습니다.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 되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처음 시작하기 전의 껍질 수집은 4일 걸리냐 5일 걸리냐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피라미드 회사 (주)투르암 -_- 에 버닝한 분들 덕에 이게 2~3일의 문제로 축소가 되었고, 양도자분들은 이걸 48시간 안쪽으로 끌어들여버렸습니다. 저는 1일차인 30일 자정 무렵부터 시작을 했는데, 3일차인 1일 오후 5시 경에 반납이 끝나버렸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왜 벌써 끝나. 예상보다 세 배는 빠른데? 아니 그것보다... 나 시작하고 4시간 밖에 못 잤는데 이제 잘 수 있네?

아니었습니다. 이미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제 등을 떠밉니다. 다음 단계 뭐냐고. 빨리 하러 가자고. 그래서 저는 계획표의 한 줄을 보면서 말합니다. 오늘은 저 단계까지만 하고 밤에는 잠을 자러 가자고.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2. 하루만에 끝내기

푸른용 조각 퀘스트. 가장 복잡하고, 가장 돌아다닐 곳 많아 길고 깁니다. 녹색용 조각 퀘스트. 짧지만 동선이 길고, 까다로운 보스가 있습니다. 저의 자랑스럽-_-게 미친 길드원들은 이걸 전부 하루만에 해내버렸습니다.

분명히 껍질 반납을 끝냈을 때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사람들을 각자의 용무로 복귀하게 하고, 나는 혼자서 돌아다니며 전반부 퀘스트 라인을 한 후엔 초저녁 시간에 사람들을 모아서 녹색용의 차원문 4군데 퀘스트만 하고 나머지는 내일부터!

운도 따랐습니다. 푸른용 라인에는 화심에서, 그 후엔 여명과 저땅의 정예들에게서 랜덤 드랍되는 퀘템을 얻어야 하지요. 이게 굉장히 빨리 떠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직도 썬퓨 없는 모 전사 님을 위해 가르를 잡아봤지만 꽝.

랜덤드랍이 빨리 떴다는 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나서(정확히는 뭔가에 씌인 것처럼) '다음 단계는 뭐냐!'를 외쳐댔다는 거죠. 저는 당시 시점으로 48시간 동안 딱 4시간 자고 깨있는 거라 졸려 죽겠는데, 그게 50시간이 되고 60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무 판단이 안 되고 사람들이 묻는 대로 대답하고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갑니다. 파티창에 체력이 비면 판단 없이 힐을 하는 힐봇이 됩니다.

그 와중에 여명에서 박사 위빌의 고릴라, 넘버투를 불러내려는데 두 명이 혼자 발을 헛디뎌서 아즈샤라로 추락해 죽는다는가 하는 몸개그도 속출하지만... 저는 그냥 졸립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한 단계 더!'를 하여 오늘 새벽, 홀퀘 시작 약 60시간만에 마지막 단계들만 남겨놓게 되었습니다.


3. 너무 졸렸어요

사람이 잠을 못자면 평소에 하던 판단도 제대로 못내리고 상황 인지도 잘 안 됩니다. 오늘 새벽 4시 이후의 제가 그랬습니다.

더 할 수 있는 퀘스트 단계가 없는 상태에서 ID Technic 길드의 현 상황을 /누구 검색으로 보니 아마도 우리가 아까 하던 단계를 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럼 이제 협의를 할 단계죠.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고 협의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가장 어렵다고 하는 달숲 전투를 각자 언제 시작하고 언제 공지해서 서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가. 그걸 서로 도와서 하긴 할 것인가. 둘은 징을 언제 누가 먼저 칠 것인가. 그 과정에서 다른 서버 사람들의 합의는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때 저는 인간보다는 잠에 대한 욕망 그 자체에 좀 더 가까운 존재였고, 문장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리버스 님과 대화해서 기본적인 논의를 진행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자리비움이셨더군요.

그리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저는 저의 존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몰래 징을 칠 것이 뻔한 사람이 되어있더군요. 아무 노력도 안 하고 골찍누하면서 기회를 앗아간 나쁜놈.



누군가가 징을 처음으로 치는 순간은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서버 전체가 공유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서버의 위상 면에서, 검은 실리시드 탈것을 가진 사람은 많으면 많을 수록 서버의 프라이드가 됩니다.

스카라베 군주는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쟁자를 정치적으로 음해하거나 서버 사람들을 무시하고 오픈을 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딴 군주 칭호를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습니다. 길드, 공대, 서버도 함께 이득을 봅니다. 블러드후프 서버의 이름이 아직도 불명예와 반목의 의미로 언급되는 것처럼.

그래서 제 껍질 반납은 끝났지만, 아직 가끔 껍질 생산을 나가시는 분들이 저희 길드와 제 지인 중에 있습니다. 이분들은 껍질을 만들어 다른 분에게 드립니다. 아직 이따금 저에게 껍질을 보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 역시 그분에게 보내드립니다. 현재 3위로 추정되는 이분도 반납 완료가 보이는 국면에 들어가셨고, 이분을 물자 반납 완료 전까진 징을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그게 제가 제가 추구하는 명분에 부합하고, 저의 이득과도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최대한 챙겨드려야 그분과 그분의 사람들도 저를 챙겨주시겠죠. 실제로 그분은 제가 가장 심각하게 막혔던 녹색용 차원문 퀘스트의 정예 보스 잡는 것을 도와주셨습니다. 오리 시절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었거든요.

가능한 사람들과 최대한 같이 가도록 할 겁니다. 누군가는 제가 아무와도 협의하지 않고 몰래 자기들끼리 치려하는 거 같다고 추정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선수를 쳤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루머를 퍼뜨려서 저 사람들이 먼저 칠 거니까 내가 먼저 치게뜸'이라는 식으로는 안 움직이겠습니다. 칭호도 매우 중요하지만 제 명예심, 혹은 자존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 수준으로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