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C2015의 두 번째 날. 아침 해가 정오의 뜨거움으로 바뀌기 전, '레디앳던'에서 시니어 아티스트로 재직했던 이호성 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강연에 앞서 슬쩍 찾아보니 경력이 화려함을 넘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영화에 접목한 디지털 아트를 중점적으로 다룬 그가 거쳐 간 영화만 해도 수 편. 대표적인 작품은 '캐리비안의 해적'과 '스피드 레이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꼽을 수 있다.

게임 쪽으로 오면 임팩트가 더 커진다. '퀀틱 드림'의 '다크 소서러'라는 작품에 슈퍼바이저로 참여했고, 소니 PS4 발매 시 실시간 기술 데모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게이머라면 거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동영상. 블리자드에서 만든 '디아블로3'와 '스타크래프트2'의 영상 제작에도 참여했다.


▲ 이 영상도 이호성 연사의 라이팅이 들어간 작품

그리고 그 모든 작품에서 그는 '빛'을 다루었다. 시각적 효과의 베이스가 되며, 조작에 따라 같은 장면도 천차만별로 달라지게끔 하는 힘을 가진 '빛'. 최신 게임에서 빛은 굉장히 다양하게 쓰인다. 같은 질감을 표현함에도 빛의 방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며, 빛의 강약, 혹은 광원의 크기로도 각각 다른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레디앳던'에서 재직할 당시 만든 '디오더 1886'도 '빛'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임이다. '디오더1886'라는 '게임'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갈리는 편이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사항도 있다. '영상미' 하나만을 보았을 땐 확실히 최고의 퀄리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애초에 '영화'에 가까운 게임을 목표로 만들어지다보니, 장면 하나하나의 영상미나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컷신 효과, 그리고 특유의 분위기를 제대로 녹여낸 비주얼까지. '디오더1886'은 확실히 '영상'만큼은 제 값을 하는 게임이다. 그 점이 오히려 평가를 망쳤지만.

디지털 세계에서 그는 빛의 마법사다. 그리고 그 마법을 전하기 위해 그는 강단에 섰다. 같은 장면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같은 질감도 더욱 살려낼 수 있는 그만의 라이팅 기법과 그 모든 것이 녹아든 작품 '디오더1886'에 대한 단상. 예상외로 강연장이 밝아 모든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의 강연은 라이팅에 대해 눈곱만큼도 모르는 나조차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웠고, 편안했다.


◈ '라이팅'은 무엇이며, '좋은 라이팅'은 또 무엇입니까?


◈ 라이팅: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빛을 이용해 실용적이거나 미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작업

이호성 연사는 위키피디아에 나온 '라이팅'에 대한 정의를 말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빛'을 다루는 기술이다. 질감을 살리고, 이미지에 심도를 만들며, 사물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라이팅'이다. 이어 이호성 연사는 디지털 아트를 실사와 가깝게 만들려면 '좋은 라이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좋은 라이팅(Good Lighting)'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그는 '좋은 라이팅'을 '무엇'이라고 딱 떨어지게 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말인즉, 라이팅은 매번 다른 결과가 도출되며, 하나의 사물에 대한 라이팅도 수만 가지의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좋다'라고 할만한 표준을 지정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방향'은 존재했다. '좋은 라이팅'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좋은 라이팅을 위해 다섯 가지 목표를 세웠다.

1. 다양한 분위기와 '톤'의 표현

'분위기', 그리고 '톤'의 표현은 라이팅이 목표로 삼아야 할 기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디오더 1886'의 전체적 분위기는 스팀펑크, 음울함, 축축함 등이다. 이호성 연사는 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푸른 색조의 색상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따듯한 광원을 사용함으로써 분위기를 살려냈다.

▲ '디오더 1886'의 분위기


2. 사물의 '형체' 표현

사물의 형체 또한 라이팅에 큰 영향을 받는다. 카메라가 곧 광원이 되는 직선형 빛, 즉 '플랫 라이트(Flat Light)'는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기 쉽지 않다. 반면 '측광(Side Light)'을 이용하면, 사물의 형태가 확연히 드러남과 동시에 심도(Depth)가 표현되며, 하단에 기술할 '키아로스쿠로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 좌측이 플랫 라이트, 우측이 사이드 라이트


3. 캐릭터와 배경의 분리

영화 '더 그레이'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배경을 아주 밝게 하거나, 아주 어둡게 하여 캐릭터를 분리한다. 말 그대로 캐릭터를 나타낼 때, 배경의 빛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모습이 분간되며, 나아가 캐릭터의 분위기가 정해진다. 가령 밝은 빛을 배경으로 한 어두운 인물상은 비장함, 성스러움, 비밀스러움 등을 느끼게 하지만, 어두운 배경의 밝은 캐릭터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 비장함을 보이는 광원의 예


4. 배경의 심도(Depth)를 표현

'좋은 라이팅'이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는 바로 '심도'의 표현이다. 사실상 모든 이미지, 영상은 2D다. 모니터 패널 자체가 2D이기에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한계다. 2D의 화면에서 입체감을 표현하려면, 라이팅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때는 전경(Foreground), 중경(Mid ground), 배경(Background)의 광량을 조절함으로써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 비교적 어두운 전경, 밝은 중경, 등불로 장식된 배경


5. 질감(Texture)의 표현

'질감'은 그래픽의 수준 척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요소다. 더불어 그래픽 리소스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같은 처리 과정을 거친 객체라 하여도, 광원의 위치, 광량, 빛의 톤에 따라 질감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이를 살려주는 것 역시 '좋은 라이팅'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 같은 바닥이라 해도 라이팅에 따라 질감의 차이가 있다.




◈ '라이팅'의 기본과 개념. '빛'은 하나가 아니다.


빛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호성 연사는 '좋은 라이팅'에 대해 설명하고 난 후, 라이팅에 쓰이는 기법, 그리고 간단한 용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1. 로우 키(Low key), 그리고 하이 키(High Key)

'로우 키 라이팅'과 '하이 키 라이팅'은 분위기에 극적인 차이를 준다. 로우 키 라이팅은 빛의 양을 줄이고, 강조를 줄 부분에 빛을 배치해 극적이면서도 음울한,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반면 하이 키 라이팅은 빛을 광범위하게 배치함으로써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내며, 코미디에서도 자주 사용한다.

▲ '로우 키 라이팅'과 '하이 키 라이팅'의 예시


2. '하드 라이팅'과 '소프트 라이팅'

하드 라이팅과 소프트 라이팅은 빛의 소스, 즉 광원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하드 라이팅은 작지만 강한 빛을 사용해 날카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뚜렷한 명암비를 이끌어낸다. 이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중후하면서 과격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반면 소프트 라이팅의 경우 광원이 크기 때문에 빛이 닿는 부분이 비교적 광범위하며, 그 때문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는 여성적인 이미지를 주며, 피부의 잡티나 주름을 상당 부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셀프 카메라를 찍을 때는 소프트 라이팅을 해야 한다!)

▲ 하드 라이팅의 '루칸 경'과 소프트 라이팅의 '이그레인 경'


3. 라이트 샤프트(Light Shaft)

'라이트 샤프트'는 미세한 먼지, 혹은 모래 등이 직사광선을 맞아 빛줄기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훌륭한 광원으로 쓰이며, 동시에 배경의 분위기나 특정한 감정을 끌어내는데 굉장한 효과가 있다.

▲ 이것이 라이트 샤프트


4. '키아로스쿠로' 기법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이탈리아어로 빛을 뜻하는 '키아로(chiaro)'와 어둠을 뜻하는 '스쿠로(scuro)'를 뜻하는 말로, 명암이 반복되어 등장함으로써 입체감과 질감을 살려내는 것을 뜻한다. 가령 얼굴 왼쪽 위에 광원을 둘 때, 왼쪽 얼굴은 밝고, 상대적으로 오른쪽 얼굴은 어두워지나, 이후 배경은 또다시 밝아지면서 입체감을 살리는 식이다. 이는 고전 미술에서도 자주 나타나며, 좋은 예로 '렘브란트(1606~1669)'의 초상화들이 있다.

▲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모범인 '렘브란트'의 작품




◈ '디 오더 1886'에서의 사례. '라이팅'은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후 이호성 연사는 '디 오더 1886'의 장면을 하나씩 보여주며, 그 안에 녹아있는 기법들과 라이팅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라이팅'에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자면, '디 오더 1886'의 배경은 런던이니, 당연히 달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반면 장면에 쓰인 광원을 잘 살펴보면, 달빛이 분명히 보이지만, 반대쪽에 광원이 존재한다. 이호성 연사는 이를 말하면서 "실제로 광원 효과는 영상을 살리고,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굳이 논리를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연장에 있는 대다수 이들이 이호성 연사의 설명이 있기 전까진 광원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이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인데, 나즈굴에게 쫓기는 프로도의 모습을 잘 보면 나즈굴의 등 뒤에 달빛이 있음에도 프로도의 앞에 또다시 달빛이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라이트 샤프트를 만들고, 반대편인 갤러해드의 등에도 달빛이 어린다.


이호성 연사는 여러 장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기법을 설명했다. 말 그대로 교과서였다. 그가 지금껏 말해 왔던 모든 조명 기법이 이미지 안에 하나로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가 중요하게 언급한 내용은, 라이팅을 하기에 앞서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A라는 캐릭터가 어떤 설정을 갖고 있으며,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을 살려줄 수 있는 라이팅 기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설명이 끝난 후, 이호성 연사는 라이팅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팁을 소개했다. 그가 말한 팁은 세 가지였다. '사진, 카메라, 그리고 클래식 페인팅을 배우기' 사진을 찍는 법, 카메라를 조작하는 법, 그리고 고전 미술을 공부해 과거의 화가들이 어떻게 라이팅 기법을 사용했는지 파악하는 일. 이호성 연사는 이 세 가지 팁을 주며 강연을 마쳤다.